본문 바로가기

Review/Book

너의 췌장을 먹고싶어 - 스미노 요루

 

 

생각해보면 췌장 책에서 이리도 많은 문구를 찍어놓은 건 늘 보던 아주 담담한 필체의 문어체가 아닌, 구어체에서의 활용이 뛰어나면서도 간단한 단어의 조합으로 심경을 아주 잘 묘사할수 있었기 때문이다. 매우 현실감각이 있었다.

슬프면서도 예쁜 책


#
그거, 본인들에게 물어본 거야?”
그녀는 내 인간성의 핵심을 꿰뚫어보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물어본 건 아니지. 하지만 틀림없이 그래.”
“그런 건 본인들에게 물어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거야. 그냥 너만의 상상이잖아? 꼭 맞는다고는 할 수 없어.”
“맞든 틀리든 상관없어. 어차피 그 애들과 함께할 것도 아니고, 그냥 내 상상이니까. 내가 그렇게 생각한 것뿐이라고. 내 이름을 부를 때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상상하는 게 내 취미야.”
“뭐야, 그 자기완결은? 자기완결 타입의 사람이었어?”
“응, 자기완결의 나라에서 온 자기완결 왕자야. 받들어 모시도록 해.”
그녀는 김빠진 얼굴로 귤을 와구와구 먹었다.

#
중요한 건 운이다.
힘차게 뽑든 힘없이 뽑든 숫자가 변하는 일은 없다.
내가 뽑은 카드는…….
“몇이야?”
“……6.”
이런 때 거짓말을 못할 만큼 나는 착실하고 서툴다. 장기판을 뒤엎을 수 있는 인간이라면 이래저래 편할 텐데 나는 그렇게 되고 싶지도 않고 될 수도 없었다.

#
좋아, 진실이냐 도전이냐? 진실이라면 나의 예쁘다고 생각되는 점 세 가지를 말해봐. 도전이라면 나를 저기 침대로 옮겨줘.”
그녀가 말을 끝내자마자 나는 생각보다 먼저 몸을 움직였다. 이 경우, 어차피 이제 곧 그녀를 이동시켜줘야 할 터라서 이참에 도전을 빙자해 그 일을 처리해버리는 쪽을 선택하는 것에 망설임의 여지는 없었다. 게다가 진실 쪽의 질문이 너무도 극악했다.

#
“너 진짜 못됐다, 부모님의 안타까운 심정을 짓밟다니.”
“그렇게 말하는 너는? 부모님께 뭐라고 변명할 생각이야?”
“나는 부모님께 걱정 끼치지 않으려고 친한 친구가 있다고 항상 거짓말을 해왔어. 그 친구네 집에서 자고 왔다고 할 거야.”
“못된 데다 쓸쓸한 변명이네.”
“아무도 상처 입히지 않는 변명이라고 말해줄래?”

#
맛있다는 듯 포크로 초콜릿 케이크를 입 안 가득 떠넣는 그녀는 역시 이제 곧 죽을 사람 따위로는 보이지 않았다.
깨달았다.
모든 인간이 언젠가 죽을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 나도, 범인에게 살해된 피해자도, 그녀도, 어제는 살아 있었다. 죽을 것 같은 모습 따위, 내보이지 않은 채 살아 있었다. 아, 그렇구나, 그게 바로 어떤 사람이든 오늘 하루의 가치는 모두 다 똑같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에 잠겨 있자 그녀는 넌지시 타이르듯이 말했다.
“그렇게 심각한 표정 하지 마. 어차피 너도 죽을 거야. 나중에 천국에서 만나자.”
“응, 그건 틀림없지.”
그녀의 삶에 대해 감상적이 되는 것은 단순한 우월감일 뿐이다. 그녀보다 내가 먼저 죽는 일은 절대로 없다고 확신하는 오만함일 뿐이다.

#
어머, 그런 사람이 다 있어? 그러면 초콜릿 케이크 먹어. 진짜 맛있다니까. 그리고 여기 단것뿐만 아니라 파스타, 카레, 핏짜도 있어.”
“그건 대단히 기쁜 소식이지만, 피자를 그런 식으로 발음하지 말아줄래? 느글거려.”
“치즈가?”
보란 듯이 농담을 던지는 그녀의 콧등에 찬물이라도 끼얹어줄까 했지만, 나는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건 그리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탁자를 치워야 하는 점원의 수고를 생각해서 관뒀다. 그렇다고 길가였으면 끼얹었다, 라는 것도 아니지만.

#
“미안합니다. 얘가 죽을 날이 머지않아서 머리가 좀 이상해졌어요.”
내가 날려준 도움 멘트에 점원은 이해한 것인지 아니면 어이가 없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무튼 우리를 남겨두고 자신의 업무로 돌아갔다.
“어렵사리 점원에게 상품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는데, 방해하지 마. 혹시 나하고 점원이 친하게 얘기하는 것에 질투가 났어?”
“그런 걸 친하다고 치면 아무도 오렌지를 튀김으로 해먹을 생각은 안 할 거야.”
“무슨 소리?”
“의미 없이 한 말이니까 따지지 말아줄래?”
그녀를 화나게 하려고 한 말이었는데 한 박자 늦게 그녀는 우와하하핫 하고 평소보다 더 크게 웃었다.



 

728x90

'Review > Book'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플립  (0) 2020.07.17
일단 오늘은 나한테 잘합시다  (2) 2020.07.16
공무도하  (0) 2020.07.08
그날밤의 거짓말  (0) 2020.07.08
구해줘  (0) 2020.07.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