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에 서점에서 슬쩍 들춰봤다가 재밌어서 리스트에 올려두었는데 신작 나온 김에 찾아보니 마침 밀리에 제공되고 있어서 신작과 함께 읽어보았다. 좋았던 건 역시 본인이 겪은 귀여운 에피소드를 유쾌하게 풀어내는 그 능력. 아쉬웠던 건 내용 중 개인적 소재보다 결혼생활 일반에 대한 견해가 많이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무엇보다 이 책의 최대 장점은 나도 따라 쓰고 싶다는 마음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인데, 내게 조만간 그런 이야기가 등장한다면 이분 때문일 것이다. 물론 정성스레 다듬어도 누가 읽어줄지 의문이지만 (그리고 그녀 말대로 결혼에 대한 이야기는 차고 넘쳐서 그저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무진 애를 써야 할 것이지만) 그런 마음이 몽글몽글 생겨서 상상만으로 즐거워하는 것과 서너 개만 구체적으로 적는다 할지라도 꽤 즐거운 시간이 될 것 같다.
최근에 읽은 '빅토리 노트' 김하나 작가 어머니의 육아일기도 그렇고, 이 평범한 결혼생활도 그렇고 나중에 우리 집 아가가 보게 된다면 최소 그녀만큼은 즐겁지 않을까. 만약 우리 엄마가 그런 노트를 내게 남겨줬다면 평생 보물이 될 것 같으니 아마 나의 아이도 많이 다른 성격은 아니리라.
[이하 발췌]
작가이자 정신과 전문의인 하지현 선생님이 한 번은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 신 적이 있다.
"그 사람의 작은 단점 열 가지에도 내가 그 사람을 견디고 여전히 그의 곁에 머무르고 있다면, 아마도 그 사람은 내가 평 소에 잘 의식하지 못하는 아주 커다란 장점 한 가지를 가지고 있을 거예요."
대개의 평범한 인간은 다른 점' 을 '단점' 으로 생각하는 이 기적인 존재이므로, 다른 점과 단점을 공정하게 구별하는 노력 이 선행되어야 하겠지만.
이제는 돌아가신 시부모님께 개인적으로 가장 고마운 부분은, 당신의 아들을 넘치게 사랑해줬다는 점이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 남편은 완전한 형태의 사랑을 받고 자란 남자다. 경제적으로 유복하게 누린 것은 아니지만 그에겐 자라면서 한 번도 부 정당해본 적 없는 밝음' 이 있다. 그래서인지 뿌리가 깊게 받은 나무처럼 안정적이고 우월감이나 열등감, 타인의 시선 같은 것 들에 흔들리지 않는다. 혼자 시간을 보내거나 식사를 하는 것에 어색함이나 외로움을 느끼지도 않았다. 영어로 말하자면 그냥
'just being himself 인 것이다.
그에 비해 나는 인정 욕구와 애정 결핍, 질투와 불안에 여전 히 사로잡혀 있다. 그것들이 내가 하는 일에 동기를 부여하고 연료가 되어주는 측면도 있지만, 지난 인생을 돌이켜보면 단 한 번도 '꾸준히' 평온했던 시간이 없었다. 평온은 열정과 불안 사 이, 고통과 공허함 사이사이 잠시 반짝 모습을 보여주고 이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보통 이런 경우 상황이 원래대로 돌아오면 대개 자신의 내밀 한 이야기를 밖으로 말한 것을 후회하며 고해성사를 했던 상대들을 은근슬쩍 피하기 마련인데, 그런 면에서 지인은 참 솔직하 고 대담하고 뻔뻔했다. 그 넘치는 에너지를 따라가기 힘들어 내 쪽에서 추후 연락을 피했는데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당시의 나는 그녀에게 깊이 질투를 했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질투했던 것은 그녀의 무모함이었다. 이혼을 감행하기 위해 배우자에게 털어놓고 그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 남자의 아이를 갖겠다고 결심하게 만든 그 열정 말이다. 무모함이 란 실은 용기와 자신감을 가진 이들에게만 허락되는 것. 잃을 것이 많은 사람들인데 나는 잃을 게 없다, 오로지 그 사람 하나 만을 보고 갈 거라고 선언하게 만드는 어떤 미친 열정. 나는 그게 부러웠던 것 같다.
지혜로운 사람이 강을 건널 방법을 생각하는 동안 미친 사람은 이미 강을 건너가 있다. 미쳐 있는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에 게는 민폐일지 몰라도 본인들만큼은 사무치게 행복하다. 훗날 그 어떤 대가를 치른다 하더라도.
우리의 싸움은 물건을 던지거나 소리를 버럭 지르거나 몸싸움을 하기보단 부엌 테이블에 마주 앉아 꼬장꼬장 질겅질징 서로의 말꼬리를 붙잡는 양상을 띠었다. 답이 없는(부부싸움은 대개가 답이 없다) 300분 토론이 끝이 나면 옆의 재떨이는 신경질적으로 비 끈 담배꽁초들로 수북했다. 담배를 끊으면서 부부 싸움도 줄 어들었지만 나는 그 시절 그와 얼굴을 마주하며 불건전하게 자 신의 몸을 해치고, 니코틴과 피로물질로 만들어진 독을 다시 한 번 상대에게 내뿜는 일에 약간의 쾌감을 느꼈던 것 같다.
'왜 결혼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럼 왜 결혼을 하느냐? 라는 반문이 나오는 시대다. 이 질문을 숙고해보았다. 나는 왜 그때 결혼을 했던 것일까? 사실 당시엔 이런 질문 자체가 내게 없었다. 상대가 가정을 꾸릴 경제적 능력을 갖췄는지 알아보지도 않았고, 결혼 후 겪을 가부장제와 양성 불평등을 미리 우려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그런 문제들이 걱정되지만 우리의 사랑으로 다 이겨낼 수 있어 같은 정신 승리나 자기 합리화도 필요하지 않았다. 결혼에 이르는 과정 중의 모든 번잡스러움은 한낱 곁다 리에 불과했고 관심도 없었다. 나는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과 하 루라도 빨리 손가락 깍지 끼듯 뿌리 끝까지 엮이고 싶었다. 낭만주의자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아예 생각' 자체가 없었던 한심함이기도 했다.
아무 생각조차 나지 않을 만큼 결혼이 나를 압도한 이유는, 그것이 내가 누군가로부터 격하게 사랑받고 있다는 증명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한 순간의 착각이라 해도, 나중에 오판으로 결 론 난다 해도 말이다. 100가지 합리적인 이유를 들어서 결혼의 불리함과 비합리성을 설득시킨다 해도, 망할 줄 알면서도 뛰어 드는 어떤 맹목적인 마음에, 나는 인생에서 누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귀한 찰나를 본다.
매일 일상으로 해야 하는 일들이기에 가급적 어깨 힘을 빼고 해버리는 것, 그것은 가사 일에 있어서 과히 나쁘지 않은 태도라고 생각한다. 누가 무엇을 얼마나 할 것인가 신경전을 벌이기 전에 가사 일의 크기 자체를 먼저 줄이는 것도 괜찮다. 특정 가사 일을 일부러 즐겨 하는 것이 아니라면 식기세척기나 로봇청소기, 반찬 배달이나 다림질 스프레이 등 활용할 수 있는 부분은 십분 활용하면 가사일의 크기를 줄일 수 있다.
가사 분담이 어느 수준까지 몸에 배게 되면 누가 얼마만큼 더 맡았는지 예민해지거나 저울질하는 게 조금 무의미해진다. 균형이란 부담의 비중이 시소처럼 그때그때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더라도 그에 대해 부당하다는 감각을 느끼지 않는 상태이다.
한 여자와 한 남자에겐 두 개의 심장과 두 개의 몸이 다 따로 있다. 고로 일심동체'는 어디까지나 다다를 수 없는 이상이다.
두 개의 심장과 두 개의 몸이 한집에서 매일 서로를 마주하다 보면 자주 누군가는 참거나, 외면하거나, 거짓말을 한다. 어떤 사랑이든 사랑하기 때문에, 또는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무언가를 지켜내기 위해, 어떤 종류의 불행들에 대해서는 '익숙해지도록' 스스로를 길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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