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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Book

최소한의 이웃 - 허지웅

신작 소식에 기대하며 밀리에 오픈된 첫날 바로 읽기 시작했는데 정작 완독이 늦어진 건 책이 내겐 조금 아쉬웠기 때문이었다. 책의 상당부분은 작가의 SNS에 포스팅 된 글이 포함되었는데 모르고 읽기 시작한 터라 기시감에 좀 의아했고. 신작을 잘 안보는 내가 시의성 좋게 현실밀착형 산문을 두루 읽은 것은 좋았으나 워낙 짧은 글모음(글감 하나에 대개 1-2page) 이어서 더 깊은 생각의 전개를 엿보지 못한 것이 특히 아쉬웠다. 작가의 이전 작품 살고싶다는 농담이나 버티는 삶에 대하여 에 비한다면 거의 1/3 정도의 길이.

내 단점일 수도 있는데, 일단 보고싶은 책을 접하면 좀 진도를 쭉 빼고 싶은 마음에 스피드를 올리다보니 문장과 맥락을 빨리 지나가서 섬세하게 살피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게 짧은 글과 더해지니 더 심각함 ㅎㅎ 그래서 그런지 짧은 글들은 SNS매체에서 보기가 더 좋은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거기에선 꽤 긴 길이이고 하나씩 접하기 때문에 더 아껴서 읽는 느낌?

어쨌건 그러한 형식은 나의 취향이고 내용 면에서는 역시나 훌륭했다. 나를 포함 관심이 있는 누군가에게는 사회를 바라보는 견해와 철학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책에 나오는 글 중에 '작은 조직의 섬에 갇힌 사람들' 이야기가 나오는데, 5-6년 전 지점에서 썼던 내 일기에 나오는 내용과 너무 똑같아서 소름돋았다. 그때 난 섬에 갇혀서 바깥 사람들은 그 절망감을 절대 이해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런 똑같은 섬이 분야를 막론하고 밖에도 수두룩 했었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아야 할지 더 절망해야 할지 씁쓸했다.

작가는 현실을 바라보는 통찰은 매우 뛰어나다는 느낌을 받는데, 그 역시도 이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이렇다할 속시원한 대답을 보이지 못하고 생각해볼 문제다 라는 식으로 마무리되는 부분은 좀 슬프다. 문제인식과 문제분석까지는 할 수 있지만 해결은 독자 개인의 몫이 아닌 경우가 많기 때문이겠지.


그래도 마지막에 우리 모두가 강인한 평정과 균형을 지키며 불행에 잠식되지 않고 희망을 붙든 이웃으로서 연대하자는 메시지는 개인에게 남겨두었다. 그런 의미에서 '최소한의 이웃'이라는 책 제목은 무엇보다 명작이라고 본다. [이하 발췌]
혹시 아픈 친구가 있는데 어떻게 연락을 하거나 말을 걸어야할지 모르겠다는 분이 계시나요? 위로하려 애쓰지 마시고, 찾 아가서 손을 꼭 잡아주세요. 그리고 평소처럼 놀아주세요. 그냥 그거면 됩니다.
서로에게 맞는 사람이 되기 위해 가끔 우리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일에 친숙해져야 합니다. 그렇다고 내가 좋아하는 결 포기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두 가지가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 어리석은 거니까요. 사랑은 두 사람의 삶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두 사람의 삶만큼 넓어지는 일일 겁니다.

억울함을 호소하며 극단적 선택에 이르는 사람만큼 생명의 무게를 무겁게 바라보는 자는 없습니다. 그들이 생명을 내어주 는 건 자신이 가진 것 가운데 그게 가장 무겁고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학교, 군대, 직장, 그리고 결국 가정으로 수렴하는 닫힌 세계들이 있습니다. 이 세계들은 일종의 섬과 같습니다. 어떤 섬은 잘 굴러가고 또 어떤 섬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서로 고립되어 있다는 점에서 모두가 섬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어느 섬의 누군가가고통을 호소할 때 그 절박함을 언뜻 이해 하기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섬이 내가 아는 세계의 전부인 이들에게 어떤 고통은 죽음과도 같습니다. 섬 밖을 상상 할 수 있는 여유와 평정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섬을 관 리하는 자들은 이미 오래전에 그런 고통을 겪었거나 목격했습니다. 다만 그걸 그리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부조리가 아니라 필요악이고 그걸 삼켜서 극복했기 때문에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다 믿기 때문입니다. 극복한 게 아니라 폭력에 순응하고 방관했던 순간 섬의 일부가 된 것뿐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살면서 우리는 갇힌 세계를 자주 목격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갑니다. 가정이 내가 아는 세상 의 전부인 자녀가, 학교가 전부인 학생이, 직장이 전부인 직장인이, 혹은 운동이 세상의 전부인 선수가 있습니다. 그들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작은 권력을 가지고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구는 자들의 알량한 폭력에 쉽게 굴복하고 절망하는 이유는 그곳 이 갇힌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갇힌 세계에서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도무지 품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지금 고통을 겪고 있는 거기가 세상의 전부가 아니며 반드시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허락하는 것. 누군가는 성공을 하고 또 누군가는 실패하겠지만 적어도 누구도 고립되지 않게 하는 것. 그런 것이 가정폭력, 학교폭력, 직장 내 따돌림에 대처하는 첫걸음이 아닐까요. 베네딕트 16세 교항이 "교회가 세속과 결혼하면 다음 시대에 는 과부가 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자꾸 교회의 원칙을 어기 고 세상의 변화를 수용하면 언젠가 교회 자체가 버림받을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훗날의 프란치스코 교황인 대주교는 "나는 타협한 게 아니라 변화한 겁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릇된 현실과 억지로 타협한 게 아니라, 책임 있는 자세로 현실을 직시 하고 생각을 정리해 입장이 변한 것이라는 의미일 겁니다. 모든 변화는 대화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변화가 쉽지 않은 건 생각과 견해가 다른 사람들이 서로 대화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화 자체를 배신이라 생각하는 시선도, 대화를 통해 합의를 도출하는 과정도 괴롭고 힘이 듭니다. 여러분이 지금 남편과 아내와 부모와 자녀와 친구와 상사와 연인과 대화의 고단함에 빠져 있다면, 애초 서로가 공유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이었는지 되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서로에게 제안할 수 있는 말의 폭이 늘어나지 않을까요.
편견이 없는 사회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오랜 시간을 들여 여러 가지 종류의 편견과 싸워왔습니다.
싸움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옳고 그름이라 는 원칙 아래 물러서지 않고 편을 나누어 싸우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게 상대방의 삶과 건강, 가치관을 위협하고자 하는 것이 아님을 설득해내는 것입니다. 나와 생각이 전혀 다른 사람들 앞에 의견을 제시하는 일은 고됩니다. 조롱과 비아냥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특히 집단을 향한 혐오와 편견을 바꾸는 일은 더욱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집단을 위해 항변하고 싶다면 두 가지 방법 가운데 보다 실질적이고 효과적인 쪽을 택해야 하겠지요
지혜가 부족하고 경험도 충분하지 않지만 여태 부딪혀본 결과에 근거해서 조심스럽게 말씀드리자면, 첫 번째의 경우는 대개 그걸 주장하는 사람을 중심으로 전선만 뚜렷해질 뿐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실제 무언가를 바꾸는 힘은 언제나 두번째 태도에서 나왔던 것 같습니다. 원칙만으로 모든 걸 선명하게 다룰 수 있고 해답에 닿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불행히도 삶은 옳고 그름이라는, 사람이 만든 틀 안에 꼭 들어맞지 않습니다. 나와 내 집단의 원칙이 다른 사람들의 원칙과 같지 않고 거기에 충분한 이유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선택이 부끄럽고 형편없을 때 사람은 반성을 하고 행동을 고치려 노력합니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목소리가 커지고 과격해집니다. 부끄럽고 형편없는 사람이 되는 걸 받아 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흠결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서 수많은 이에게 누명을 씌우고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자신의 내적 갈등 때문에 무고한 주변 세계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는 이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무언가에 과몰입하여 지나치게 과격해져 있을지도 모릅니다. 늘 스스로를 살피고 다스려야 하겠습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크고 거대한 문제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걸 앞에 두고 과몰입하거나 압도되는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조금 다른 시야가 생겼을 때는 그게 사실 그리 크고 위중한 일이 아니었다는 걸 깨닫습니다. 거기 그렇게 까지 휘둘릴만한 게 아니었다는 실감 또한 자주 합니다. 가깝게는 인간관계부터 그래서 너는 누구 편이냐는 질문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맞닥뜨린 크고 심란한 문제도 사실 본질을 따지고 보면 그리 대단한일이 아닐지 모릅니다. 여러분이 소음 앞에 무너지지않기를. 휘둘리거나 잡아먹히지 말기를. 조용하고 강인한 평정안에서 무엇보다 자유로운 사람이길 바랍니다.
육체의 한계를 극복하는 경험으로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느냐에 관한 문제가 있습니다. 한계를 극복하는 경험은 그게 육체에 관련된 것이든 정신에 관련된 것이든 훌륭한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할수 없다고 여겼던 것들이 단지 관념일 뿐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 순간, 흐릿했던 것들이 또렷해지고 나를 둘러싼 세계가 조금씩 확장되는 기분이 듭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의문이 듭니다. 우리 주변에는 그런 가혹한 경험을 토대로 성숙한 삶을 꾸려나가는 사람도 있지만, 스스 로 증명해냈다는 승리의 경험에 심취하여 자신이 남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며 내 세계를 제외한 다른 세계의 무게는 하찮게 여기는 오만한 이들 또한 많기 때문입니다. 나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그치지 않고, 너는 할 수 없다는 이상한 결론에 이른 것이지요.
왜 같은 경험을 하고도 누군가는 귀감이 되고 또 다른 누군가 는 오만한 인간이 될까요. 그건 아마도 이러한 극복의 경험이 더 나은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는 훌륭한 재료일 뿐, 경험 그자체만으로 이루거나 증명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유가 더해지지않은 극복의 경험은 그저 고생일 뿐입니다.
규칙이 삶을 담아내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봅니다. 현실에서 벌 어지는 일은 예상치 못할 정도로 입체적인데 오래전에 쓰여진 규칙은 그런 다양한 삶의 양태를 예상하지 못합니다. 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규칙만을 고수하거나 주장 하다 보면 양손으로 움켜쥔 모래처럼 손바닥 사이로 줄줄 흘러 내리는 현실을 목격하게 됩니다
가장 최신 발명품은, 정치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인윤리에 기대지 않고도 사회적 차원에서 최소한의 공공선이 실현 될 수 있도록 큰 틀의 규칙을 만드는 것. 잘 안 되면 고치고 정비해서 시스템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정치입니다.
부동산 문제가 되었든 특권의 문제가 되었든, 시대와 정권과 정당을 가리지 않고 늘 되풀이되는 특정한 문제들을 보고 있으 면 그래서 답답합니다. 개인윤리 없이도 굴러갈 수 있는 규칙을 만들어 시스템을 선순환시켜야 할 사람들이 규칙을 만들지는 않고 매번 소모적으로 서로의 개인윤리를 따져 나는 능력이고 너는 꼼수라며 내로남불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이 있으면 거기 반드시 희망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희망이 잘 보이지 않는 이유는 평정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평정을 찾아 희망에 닿기 위해선 이미 별어진 일에 속박되지 않고 감당할 줄 아는 담대함, 그리고 타인을 염려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마음입니다. 찾을 수 없어도 괜찮습니다. 사라진 게 아니라 다만 잠시 희미해졌을 뿐 입니다. 나의 일을 감당하고 남의 일을 염려하다 보면 반드시 평정에 이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땅 위에 나뒹굴어 혀끝에서 흙 맛이 느껴지더라도, 불행에 사로잡혀 잠식당하지 않는 사람만이 회 복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희망을 부정하지 않는 사람만이 희망을 준비하고 발견할 수 있습니다. 혼자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이 막시밀리양에게 그러했듯. 우리가 서로에 게 최소한의 이웃일 때 서로 돕고 함께 기다리며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이웃입니다. 여러분이 제 이웃이라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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