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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Book

나의 아름다운 정원 - 심윤경

일전에 추천을 받아 작가의 다른 작품을 본 적이 있었는데 완전히 다른 사람인 것 같은 필체가 매우 놀랍다. 이 소설은 마치 박완서의 소설이나 천명관의 고래와 비슷한 느낌을 주었다. 이 작가를 추천했던 친구들의 안목에 다시금 감탄한다.

우리의 7-80년대 삶은 왜 이토록 처절하고 힘들어야 하는 것인지 볼 때마다 함께 무겁게 가라앉는다. 늘 어린 누군가가 안타깝게 죽고 누군가는 죽지 않을만큼만 고생을 한다. 그 안에서도 아름답게 피어오르는 인간의 순수함과 인내와 희생의 가치. 착한 심성으로 무엇이든 도움이 되어보려고 해결하려고 하지만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단 무기력한 소년의 성장소설. 어린 시절 정말 좋아했던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나 자기앞의 생도 생각이 난다.  

어려움을 겪어야 진짜 어른으로 거듭나는 건지 이렇게나 힘듦을 겪지 않고 평안하게 자라는 것이 좋은 것인지 돌아보게 된다. 온실 속 화초같이 심약한 것도 안될말이지만 이런 고통속에서 자라난 이 소년이 예전처럼 순박함을 유지하며 자랄 것인지는 모를 일이다.

 

 





[이하 발췌]
나는 엄마의 얼굴도 보기 전에, 문이 반쯤 열려 엄마의 몸을 싸고 있는 얼룩덜룩한 병원복이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이미 울고 있었다. 엄마는 내 머리를 숨이 막히도록 꽉 끌어안았다.
"엄마가 미안해, 동구야, 엄마가 정말 미안해." 엄마는 따뜻하고 향기로운 엄마 그대로였다. 조 금도 미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며칠 전에 할머니 에게 고추장독을 안기던 날에는 틀림없이 미친 사람 같았지만, 정상적인 사람이라도 하루쯤은 갑자 기 미쳐버리는 수가 있을 것이다. 단 하루 미쳤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남은 인생 전체를 미친 상태로 살게 된다는 법은 없다. 더구나 그동안, 그리고 그날, 엄마가 겪은 일들을 생각하면 하루가 아니라 사흘쯤 미치더라도 뭐라고 탓할 수 없을 것이다

차라리 엄마에게 봄날 약수터에서 처음 만난 노 랑나비처럼 가볍던 영주의 발걸음을, 숲 속 어느 나 무 아래선가 들려오는 뻐꾸기 소리같이 청량하던 웃음을, 비가 많이 온 여름날 인왕산의 물소리같이 풍성하던 그 아이의 재능을 이야기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랬더라면 엄마는 울었을 것이고, 그 아이가 있어서 우리가 얼마나 행복하고 자랑스러웠는지 떠 올렸을 것이고, 그 아이가 엄마와 아버지 인생에 가 장 멋진 성공작이었음을 이야기했을 것이고, 그러 다가 엄마는 문득 아버지의 얼굴에서 영주의 모습 을 발견하고 자기도 모르게 아버지를 끌어안았을 텐데. 그러면 아버지는 엄마에게 엄마와 아버지가 만들어낸 성공이 오로지 영주 하나만은 아니었고, 앞으로도 많은 것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고, 무엇보다도 영주는 우리 식구들이 이렇게 서로 의 얼굴도 쳐다보지 않고 입안의 모래알처럼 서로 를 못 견뎌하는 것을 절대 원치 않을 것이라고 그때 이야기해도 늦지 않았을 텐데.

언제였던가. 엄마와 영주가 학교로 찾아왔던 그 날. 선생님은 칠판에 예쁜 글씨를 쓰셨고 지저귀는 어린 새 같은 영주는 배에 힘을 주며 큰 소리로 그 글씨들을 읽었다. 아이들은 신나게 박수를 쳤고 엄 마는 교실 문 앞에서 발가게 달아오른 볼을 누르며 겸손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 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던 행복한 날이었다. 그 러나 그때는 훗날 박 선생님이 나에게 그렇게 큰 은 혜만을 베풀고 자취 없이 떠나가실 줄도 몰랐고, 사 랑하는 나의 동생이 그렇게 덧없이 어린 숨결을 거 둘 줄도 몰랐고, 엄마가 광인이 되도록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될 줄도 몰랐다. 나는 아무것 도 모른 채, 그 순간이 나의 인생에서 가장 의미 깊 고 소중한 찰나라는 사실도 까맣게 모른 채 그저 신 명 나게 손바닥이 부풀도록 박수만 치고 있었다. 지 금 단 한 번만이라도, 단 한 번만이라도 그 순간으 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럴 리가. 나는 박 선생님께 반발했다. 할머니가 우리보 다 특히 더 불행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슬픈 일을 겪기는 했지만 그건 우리 모두 겪은 일이지 할머니 혼자 겪은 일이 아니었다. 할머니 혼자서 저렇게 심통을 부릴 이유는 하나 도 없었다.
그래. 그건 네 말이 맞아. 하지만 할머니는 다른 식구들 과 달라. 할머니는 아무런 희망이 없거든.?
갑자기 주위에 정적이 찾아들었다. 눈을 번쩍 뜨니 은종 같은 때죽나무 꽃이 한줄기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었지만 나 는 그 맑은 종소리도, 청아한 향기도 느끼지 못했다. 텅 빈 두개골 속에 선생님의 목소리만이 메아리쳤다. 할머니에게 는 희망이 없거든.
아버지와 엄마는 돈을 많이 벌고 나를 잘 키우자는 희망 이 있다. 나는 나중에 박 선생님을 꼭 다시 만나자는 희망이 있다. 하지만 할머니의 몫으로 남은 희망은 무엇일까. 할머 니에게 손을 내밀고, 노래를 불러주고, 말벗이 되어주고, 나 들이를 함께 나가던 영주가 떠난 후 할머니에게는 어떤 희 망이 남았을까.


할머니처럼 세상을 단순하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편할까. 나는 마음 한편으로 할머니가 부러워졌다. 하지만 세상 을 편하게 사는 사람이 있다면 한편 그 사람에 맞춰서 좀 더 불편하게 살아야 하는 다른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작가의 말]
어린 나이에, 스스로가 제일 약자에 해당하는 상황이면서도 촉촉한 인내와 헌신으로 주변을 끌어안는 그들의 모습은 나에게 충격에 가까운 감동을 주었다. 한쪽 성의 전유물로서 칭송되는 많은 미덕들이 실제로는 거짓이나 허상에 불과하며, 가치 있는 것은 오로지 '인간의 미덕'임을, 소년들은 담담하게 보여주었다. 나와 다른 쪽의 성을 가진 사람 들을 오로지 적으로만 여기고 어떻게 싸워 이길까만을 연구 했던 나 자신의 태도가 참으로 옹졸했음을 느끼게 하는, 그 들은 나의 어린 스승들이었다.

이 세상에는 많고 많은 소년들이 살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 다만 내 삶의 폭이 좁다 보니 그들을 만나지 못했고, 만 나도 옹졸한 눈으로는 알아보지 못하였으리라 믿는다. 우리 주변에는 많은 소년들이 있어, 내가 차마 약함을 드러내지 조차 못하고 힘들어 하는 순간에 진심으로 가득 찬 옹호의 손길을 내밀어주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세상에 한 점 살맛을 보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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