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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Book

쓰기의 말들 - 은유

 

 

내 핸드폰 사진첩에는 ‘책’이라는 앨범이 따로 있다. 대개 읽고싶은 책의 표지를 찍어두거나 책의 좋은 문장들을 찍어두는 용도로 사용한다. 최대한 반듯이 찍으려고 하지만 사진기의 그림자라던지, 자꾸 엎어지려하는 책을 붙잡고 찍다보면 예쁘게보단 비뚤게 나오게 마련. 옮겨적기 번거로워 그 책 문장들을 사진채로 블로그에 옮기면, 가독성이란 안드로메다로, 나만 보는 서평이 되버린다 ㅋㅋㅋㅋ

이 책은 재작년에 재밌게 보았던 ‘쓰기의 말들’ 이다. 당시 사진으로 찍어두었던 문구들을 핸드폰으로 지우지도 못하고, 많아서 차마 블로그에 정리할 엄두도 나지 않았던 딜레마를 밀리가 해결해주었다 (오늘도 밀리 찬양)


이 책의 가장 좋았던 점은 역시 문장들이다. ‘문장수집가’라는 말을 나만 만들어 쓰는 줄 알았는데 이분도 쓰고 있어서 좀 놀랐다. 이말을 만들어 쓰게된 이유 역시 놀랍도록 똑같았다.

“나는 마르크스를 혁명가나 철학자이기 전에 세상과 인간에 대한 통찰이 담긴 지적인 말들을 생산하는 문장가로 흠모했다.

나는 책을 좋아하는 것 치고는 소설을 많이 읽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왜 소설을 안 보냐고 물으면 “분량 대비 건질 문장이 없다”라는 말을 뻔뻔스럽게 늘어놓곤 했다. 다독가라기보다 문장 수집가로, 서사보다 문장을 탐했다. 우표 수집가가 우표를 모으듯 책에서 네모난 문장을 떼어 내 노트에 차곡차곡 끼워 넣었다.”   - 작가의 글 중에서



어떻게 보면 내가 블로그에 올리고 있는 문장수집가 카테고리에 있는 토막 글들이 이 책의 모티브와 다르지 않지 싶다. 물론 이 책에서 ‘글쓰기’ 에 대한 문장만을 발췌하고 있는 것은 다르지만, 문장에 감동하고 흠모하며 따라 쓰기를 일삼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을 듯

또한, 글쓰기가 사람을 구원한다고 외치는 작가님의 한결같은 이야기도 매우 공감한다. 최근 여러 사람들의 고민에 '글쓰기'를 해법으로 내놓는 나를 보기 때문이다. 무얼 원하는 지 알고 싶어서, 인생에 뭐가 남는지 모르겠어서, 마음이 계속 불안하기만 해서, 어떻게 대화할 지 몰라서 나에게 질문했던 사람들에게 글(일기)쓰기를 권했다. 다음부터는 권하는 말 끝에 아래와 같은 위인들의 문장을 한 문장씩 읊어주며 그들의 권위에 편승해야겠다. ㅎㅎㅎ



# 글을 쓰지 않고도 살 수 있을 거라 믿는다면, 글을 쓰지 마라.

라이너 마리아 릴케




# 우리가 힘을 얻는 곳은 언제나 글 쓰는 행위 자체에 있다.

나탈리 골드버그




# 있어도 괜찮을 말을 두는 너그러움보다, 없어도 좋을 말을 기어이 찾아내어 없애는 신경질이 글쓰기에선 미덕이 된다.

이태준




# 글쓰기에는 어떤 것도 운 좋게 찾아오지 않는다. 글쓰기는 어떠한 속임수도 허용하지 않는다. …… 모든 문장은 기나긴 수련의 결과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 적절한 장소에 찍힌 마침표만큼 심장을 강하게 꿰뚫는 무기는 없다.

이사크 바벨




# 말이 몸에서 흘러나오고, 그 말들을 종이에 새겨 넣는 과정을 느끼는 것이다. 글쓰기는 촉각적인 면을 갖고 있다. 육체적인 경험이다.

폴 오스터




# 퇴고는 자신의 글로부터 유체 이탈하여 자신의 글에 대한 최초의 독자가 되어 보는 경험이다.

정여울




# 정말로 진지한 소설에서는 진정한 갈등이 여러 인물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독자와 작가 사이에서 벌어진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 기록한다는 것은 조수간만처럼 끊임없이 침식해 들어오는 인생의 무의미에 맞서는 일이기도 하죠.

김영하



# 지옥으로 가는 길은 수많은 부사들로 뒤덮여 있다.

스티븐 킹



# 간결함이란 말해야 할 것을 적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해야 할 것 이상을 말하지 않는 것이다.

마르쿠스 파비우스 퀸틸리아누스



# 결핍은 결점이 아니다. 가능성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세계는 불완전한 그대로, 불완전하기 때문에 풍요롭다고 여기게 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 자서전은 수치스러운 무언가를 드러낼 때에만 신뢰할 수 있다.

조지 오웰


# 예술에서 최악은 부정직하다는 것이다.

조지 오웰



# 창작이 곧 삶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때로는 창작이 삶을 되찾는 방법이다.

스티븐 킹


# 나쁜 글이란 무엇을 썼는지 알 수 없는 글, 알 수는 있어도 재미가 없는 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을 그대로만 쓴 글, 자기 생각은 없고 남의 생각이나 행동을 흉내 낸 글, 마음에도 없는 것을 쓴 글, 꼭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도록 쓴 글, 읽어서 얻을 만한 내용이 없는 글, 곧 가치가 없는 글, 재주 있게 멋지게 썼구나 싶은데 마음에 느껴지는 것이 없는 글이다.

이오덕


# 연민이 내 삶을 파괴하지 않을 정도로만 남을 걱정하는 기술이라면 공감은 내 삶을 던져 타인의 고통과 함께하는 삶의 태도다.

수전 손택


# 글을 잘 쓴다는 것은 자기 글을 믿고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이다. 위험을 감수하고, 남들과 달라지려 하고 스스로를 부단히 연마하는 것이다.

윌리엄 진서


# 한 가지를 이해하는 사람은 어떤 것이라도 이해한다. 만물에는 똑같은 법칙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오귀스트 로댕


# 아프게 하지도 가렵게 하지도 못하고, 구절마다 범범하고 우유부단하기만 하다면 이런 글을 대체 얻다 쓰겠는가?

박지원



# 인식에 이르는 길 위에서 그렇게 많은 부끄러움을 극복할 수 없다면 인식의 매력은 적을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 사랑에 빠진 남자는 자신이 읽는 모든 책에서 사랑하는 여인의 모습을 찾아보게 된다.

발터 벤야민

 

(애써 수집한 컬렉션을 아낌없이 내어주시는 작가님께 감사를!)



082
“시간이 지날수록 옛날 일이 생각이 나지 않아요. 이대로 가다간 제 인생에 아무것도 남을 것 같지 않아서 글을 쓰려고 왔습니다.” “직장을 그만두었어요. 제가 무얼 원하는지 알고 싶어서 글을 써 보려고요.”
글쓰기 수업 수강 동기에서 가장 자주 나오는 말이다.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그 뿌리칠 수 없는 물음의 답을 구하기 위해 글쓰기의 문을 두드린다. 혼자 할 수 있고 돈이 들지 않고 시간과 장소의 구애가 없다. 기억이라는 재료도 준비 완료. 자기 정리의 만만한 수단으로 글쓰기를 택하는 것 같다. 어느 학인은 젊은 시절 장사의 추억을 떠올렸다.
“많이 팔기 위해 속이고 속고 하면서 가면을 써야 했다. 이 년쯤 일을 하고 나니 새벽 퇴근길에 누군가에게 욕을 퍼붓고 속 시원하게 무언가 때려 부숴야 하겠다는 충동이 일었다. 이대로는 내가 미쳐 버리겠구


075
몇 년 전 철학 공부 모임에서 한 학인이 글을 발표했다. 탄탄한 논리 전개에 감탄하며 읽어 내려가는데 오자가 났다. ‘굳이’를 ‘구지’라고 쓴 것이다. 좌중 폭소. 들뢰즈의 개념을 논증하면서 글이 한껏 고조되는 와중에 엉뚱한 오자가 튀어나와 웃음을 일으켰다. 발표를 마치자 한마디씩 거들었다. 왜 굳이 없어도 되는 ‘구지’를 써서 오점을 남기냐고.
부사는 글쓰기에서 복병이 되기도 한다. 앞의 사례는 가벼운 에피소드다. 부사는 ‘굳이’ 안 써도 된다는 게 핵심. 오용보다 남용이 화근이다. 부사를 자제할 것. ‘이 원칙은 거의 모든 글쓰기 책에서 중요하게 다뤄진다.’ 이 문장은 이렇게 바꿀 수 있다.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부터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까지 부사를 자제하라고 당부한다.’ ‘거의’, ‘모든’, ‘중요하게’라는 부사를 책 제목으로 대체했다. ‘어제는 커피를 많이 마셔서 잠을 설쳤다.’ 이런 문장도 바꿀 수 있다.


고통은 창작의 어머니란 말도 있지만, 상실을 체험한다고 다 좋은 작품을 쓰는 건 아니다. 고통에 익사당해 세상에 빛을 보지 못한 작가는 얼마나 많을까 싶다. 그 차이는 뭘까. 오래 안고 가고 싶은 물음이다. 왜 어떤 상실이나 고통은 존재의 몰락을 초래하고, 어떤 결핍은 힘들의 과잉 상태를 낳는가. 개인마다 경제, 계급, 문화 자원 그리고 기질과 성향과 건강이 다르니까 일반화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삶을 살펴보면 책이 삶의 거친 파도를 피하는 방파제가 되어 주었다. 고통이 글을 낳았다. 어쩌면 내가 그런 작가에만 끌리는지도 모르겠다. 요즘 내가 머리맡에 두고 읽는 책 『멀고도 가까운』에서 리베카 솔닛은 고백한다.
“나는 평생 책을 타고 떠다녔고, 어린 시절에는 내게 친절하지 않은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책으로 만든 탑과 벽을 쌓아 올렸다.”

덕에 낮에도 쓰고 밤에도 쓰고 새벽에도 쓰면서 난 ‘생의 곤궁기’를 통과했다. 글을 써서 돈을 벌고 글을 써서 사랑을 받고 글을 써서 사는 이유를 묻고 그러는 동안 삶의 에너지를 되찾았다.
한 사람이 글 쓰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연습과 노력 외에)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 자기를 믿어 주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 그것이 단지 구직을 넘어 삶의 자리를 되찾아 주는 일임을 나는 선배와의 인연에서 실감했다. 나는 누구에게 황금 같은 말을 건네주는 ‘처음’이자 글 쓰는 삶을 찬미하는 증인이 되어 줄 수 있을까.



057
“네 책 읽고 내가 글 쓰는 삶을 사는 게 자랑스러웠어.” 어느 날 문자가 왔다. 대책 없이 우겨 온 글 쓰는 삶, 이쪽에 집도 절도 없는 나를 간신히 발을 들여놓게 해 준 서촌에 사는 귀인. 『글쓰기의 최전선』에도 등장하는 중요 인물인 선배가 내 책을 보고 안부를 전해 왔다.
‘처음’이 생각났다. 선배는 당시 사보 편집자로 일했다. 돌이켜 보면 부실하기 짝이 없는 내 포트폴리오를 보고 “글이 따뜻해서 미담을 잘 쓰겠다”며 일감을 주었다. 첫 취재를 나갔을 때, 나를 소개한 선배 이름에 누가 될까 싶어 조마조마했다. 난 최선을 다했고 노력이 신망을 얻어 자유 기고가로 안착할 수 있었다. 대기업에서 중요한 프로젝트라며 필진의 이력서를 요구할 때 선배는 글 쓰는 사람에게 학력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며 대신 글을 보내겠다고 하면서까지 내게 어떻게든 기회를 주었다. 글은 글을 낳았다. 그 선순환 덕에 낮에도 쓰고 밤에도 쓰고 새벽에도 쓰면서 난 ‘생의 곤궁기’를 통과했다. 글을 써서 돈을 벌고 글을 써서 사랑을 받고 글을 써서 사는 이유를 묻고 그러는 동안 삶의 에너지를 되찾았다.
한 사람이 글 쓰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연습과 노력 외에)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 자기를 믿어 주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 그것이 단지 구직을 넘어 삶의 자리를 되찾아 주는 일임을 나는 선배와의 인연에서 실감했다. 나는 누구에게 황금 같은 말을 건네주는 ‘처음’이자 글 쓰는 삶을 찬미하는 증인이 되어 줄 수 있을까.


053
이오덕. 이름부터 덕이 넘치는 그는 교사이자 어린이문학가다. 아이들을 정직하고 진실한 사람으로 키우기 위해 노력했고 특히 글쓰기 교육을 중시했던 분이다. 나 역시 어린이가 되어 그의 책으로 글쓰기를 배웠다. 소탈한 농부 같은 인상의 그가 말글살이에 관해서라면 엄한 훈장으로 변해 구절구절 죽비처럼 꾸짖는다. 철학 공부 한답시고 한자투와 번역투가 익숙해지려할 때, 아는 걸 써먹고 싶어 근질근질할 때



049
좋은 칼럼이나 좋은 책을 가끔 만난다. 내가 느낀 불편과 분노의 구조적 원인을 정확히 짚어 주는 글. 밥 먹고 그 일만 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연륜과 통찰의 글. 자기 에너지로 쭉쭉 뻗어 가는 거침 없는 글. 착란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한 세계를 보여 주는 감각적인 글.
일점일획도 빼낼 수 없도록 정교하게 쌓아 올린 언어의 성채를 음미하고 나면 행복한데, 어쩐지 ‘차고 슬픈 것’이 뒤끝에 번진다.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이 많은데 나까지 뭘, 왜, 또……’라는 생각에 기가 죽는다. 내 생각의 밑천은 한없이 초라하다. 얼마나 더 읽고 더 쓰고 더 뒤척여야 저런 인식과 표현이 가능할까. 고개가 떨궈진다. 그럴 때 지지와 덕담을 건네줄 벗을 불러낸다.


모델하우스 너른 거실 정도의 아담한 책방, 품에 꼭 안기는 이 요망스러운 책들.
보랏빛 융단에 반원으로 펼쳐진 타로 카드에서 한 장을 고르는 놀이 같다. 마음은 이 꽃에서 저 꽃으로 옮겨 다니는 꿀벌처럼 바쁘다. 너무 망설이면 ‘이성의 사고’가 작동할 것 같아 왼손의 직관으로 한 권 집었다. 어쩐지 내 취향과 반음계 정도 어긋나 여기서 책을 산 적 없었다. 첫 책이다. 삶의 심부름에 나선 책들. 안 보던 책을 보는 일은 안 쓰던 글을 쓰게 할 테니, 세상에 아무 책은 없다.




036
홍대 땡스북스. 이십 분쯤 미리 가서 커피를 시키고 소파 빈자리에 앉았다. 습관처럼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책을 뒤적이는 사람들이 앞에서 서성이고 창밖에는 책방을 흘끗거리는 사람들이 지나간다. 사람과 책과 간간이 들리는 커피 머신의 소음에 몸이 나태로 빠져든다. 무릎에 쿠션을 괴고 느리게 책장을 넘겼다.
늦어서 미안하다는 말이 들려 고개를 드니 그 사람이 서 있다. 약속한 시간에서 이십 분이 흐른 걸, 늦겠다는 문자가 온 걸 모르고 있었다. 밥을 먹기 위해 장소를 옮기려고 일어났는데 책 한 권 고르라고 한다. 선물해 주겠다고. 전부터 책 한 권 선물하고 싶었다고.
저 자비로운 충동의 말, 여기 있는 것 중에 마음대로 고르라는 말. 드라마 남자 주인공의 대사 같았다. 한 번쯤 처하고 싶은 뜻밖의 상황이었을까. 딴청 피우듯 접수한다.


029
한동안 연락이 뜸한 선배를 만났더니 요즘 글쓰기를 배운다고 한다. 오래도록 기업과 파트너로 일한 그다. ‘갑’의 비위를 맞추는 작업만 했더니 자기 감각이나 느낌을 잃어버렸다며 글을 써 보기로 했단다. 그런데 뜻대로 써지지 않는다며 ‘글 쓰는 사람 대단하다’를 연발했다. 중단 없는 말들이 쏟아졌다. 숙제하느라 수업 전날 밤을 새웠다, 책을 옆에다 쌓아 놓고 쓰게 되더라, 국어사전이 큰 도움이 됐다, 한번 글을 붙잡으면 끝낼 수가 없다 등등.
그 표정이 흡사 사랑에 빠진 스무 살이다. 사로잡힌 자에게 나오는 달뜬 눈빛. 달아나는 감정을 붙드느라 빨라지는 말투. 일상에 침투한 낯선 사건을 낱낱이 풀어내려는 의지가 흘러넘쳤다. 나까지 덩달아 열정에 도취되는 찰나 선배가 한다는 말. “나 성욕도 싹 사라졌다.”


019
“그는 성인이라기보다는 방치된 어린아이 같았다. 나는 이런 사람들이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경우가 아주 흔한 것은 책임질 일이 없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런 문장을 만나는 재미에 빠져 조지 오웰을 읽는다. 빼어난 미문이어서라기보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예리한 관찰, 정확한 분석에 놀라곤 한다. 옆에 있다면 물어보고 싶다. 당신은 언제부터 이런 게 보이는 기술자가 되었느냐고.
조지 오웰의 오 년을 생각한다. 그는 젊어서 인도 제국 경찰에서 일했다. 제국주의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는 가책에 괴로워하며 스스로 벌을 내린다. 파리와 런던에서 오 년 동안 접시 닦이, 노숙인을 자처한다. 이 시기의 체험을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이라는 책으로 펴내며 ‘작가’로 주목받는다. 조지 오웰이라는 필명도 이때부터 사용했다는데, 본문에서 불지옥이 따로 없다고 묘사한 주방 상황은 읽기만 해도 땀이 날 정도로 생생하고 이미 ‘조지 오웰답다.’
왜 오 년이었을까. 삼 년만 해도 누가 뭐라지 않을 것 아닌가. 좀 길다 싶다가도, 다른 세계를 받아들이려면, 이전 세계에서 육체가 풀려나려면 그 정도는 걸리겠지 싶기도 하다.
사람의 빛깔이 달라지는 시간. 한 사람에게 작가의 소양이 형성될 즈음, 무엇을 읽었느냐보다 어디에 누구와 있었는지가 중요한 것 같다. 조지 오웰의 불지옥 오 년, 아니 작가 수업 오 년을 상상하니 그렇다.



017
어느 밤 자정에 홀로 파리의 골목길을 헤매던 이에게 구식 자동차 한 대가 다가오고 차 안에 있는 이들은 함께 어울리자고 말한다. 그들을 따라간 길 펜더는 늘 꿈꾸던 1920년대의 파리로 들어가 헤밍웨이와 문학을 토론하고 피츠제럴드 부부와 대화하며 거트루드 스타인에게 조언을 듣는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줄거리다.
주인공 길 펜더는 작가다. 할리우드에서 상업적인 시나리오를 쓰다가 소설에 도전한다. 우연히 세계적 문호들에게 자기 원고를 보여 줄 기회를 얻고 꿈인가 생시인가 떨면서 자기 글을 소개한다. 소재가 너무 유치하지 않은지 물으니 ‘대가’는 이렇게 답한다. 소재는 무어라도 좋다고. 그 말에 길은 표정이 밝아지고 용기를 얻는다.

어수선한 글은 매력 없다. 빤한 얘기로 채워진 글은 지루하다. 정보만 많은 글은 눈이 뻑뻑해진다. 그걸 알기 전까지 연애 초보처럼 굴었다. 이젠 점검한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주례사 같은 글을 쓰고 있지는 않는지. 적절한 자리에 마침표가 딱 찍힌 글인지.
끝나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아는 낙화 같은 글을 쓰는 연애 고수가 되고 싶어서, 자주 되뇐다. 독자는 연인이다. 독자를 지루하게 하지 말자.



016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형기의 시 「낙화」 첫 문장이다. 열여덟의 나이에 연애 한번 못해 본 나는 이 시가 좋았다. 통째로 외웠다. 잘 사랑하고 잘 헤어지는 사랑의 판타지를 시에서 대리 체험했다. 애정이 식으면 끝. 가는 사람 잡지 말고, 사랑의 감정만 순수 기억으로 간직하는 관계의 단정함을 동경했다. 그 후 십 년쯤 흐르고서야 알았다. 사랑이 하도 구차하고 비루하여 저런 담담하고 매끄러운 시가 나왔구나.
글을 쓰다 보면 꼭 사랑에 매달리는 사람처럼 구질구질하고 구차해질 때가 많다. 내가 아는 걸 다 설명하고 싶고 감정을 다 드러내고 싶고 내 생각을 더 헤아려 달라고 조르고 싶다. 읽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픈 욕심이 넘치니, 글이 안 끝난다.
그런데 읽는 사람 입장이 되면, 끝나지 않는 글이 고역이다. 중언부언 반복되고 추상적이고 장황하고..



013
“스카프는 피붓결처럼 고왔다. 두려움이 엄습했다. 흐르는 듯 부드러운 마름모꼴 스카프를 보고 나는 수치심에 휩싸였다. 황폐한 나에 비해, 스카프는 예전처럼 나긋나긋했다. 광택과 무광택이 섞여 있는 바둑판 무늬 그대로였다. 스카프는 수용소에서 변하지 않았다. 바둑판 무늬 속에서 조용히 자기 원칙을 지켰다. 스카프는 이제 내게 어울리는 물건이 아니었다.”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 중 일부다. 책 한 권 문장들이 죄다 ‘밑줄 (긋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키지만 이 부분이 특히 곱다. 짧게 치고 가는 문장들. 가쁘게 진실을 묘파한다. 장황한 묘사나 수사 없이도 수려하다. 수용소와 스카프라는 사물 자체가 일으키는 긴장. 바둑판 무늬 자체가 상황의 완고함을, 나긋나긋한 재질이 좌절한 심리를 나타낸다. 고운 스카프 한 장으로 수용소의 비극을 전하는 것이다.
단문 쓰기는 언제나 도래하는 고민이다. 글쓰기 책에서 대부분 단문 쓰기를 강조하고 나도 학인들에게 ..



007
종일 긴 글을 썼다. 제1부는 아침 열 시부터 오후 네 시까지 집필. 인터뷰인데 실용서에 들어갈 원고라서 정보와 사실 위주로 본문을 구성해야 한다. 200자 원고지 50매 분량을 중복 없이 읽을 만하게 주제를 살려 다듬는다. 빼곡한 글자를 만지는 일은 콩나물 한 시루 머리 따는 일처럼 따분하다. 허리가 아프고 눈이 시리고 손끝이 저릿하다. 이 잔혹한 육체 노동! 엉덩이 붙이고 앉아 두뇌에서 정보를 거르고 오감을 작동하여 손끝으로 뽑아내려면 신체 기관이 긴밀하게 가동된다. 진이 쏙 빠진다.
밤 아홉 시에 제2부. 짧은 글 십여 편을 읽고 리뷰를 썼다. 삶의 기록을 존중하며 글의 허물을 찾아내고 같은 단어의 반복을 피하고 정확한 단어를 고심하다 보니 새벽 한 시다. 제2부는 힘들지 않았다. 왠지 기운이 솟았다. 마라톤에서 계속 달리면 고통이 사라지고 쾌감이 오는 러너스 하이 같은 상태인가, 아니면 만물의 질서를 통합하는 밤의 마법인가.
아마 그건, 계속 썼기 때문인 거 같다. 전에도 그랬다. 힘들면 도망가고 싶다. 쓰는 삶에서, 쓰는 상황에서. 술을 마시거나 하염없이 걷지만, 일시적인 기분 전환일 뿐 마음이 홀가분하지도 걸음이 자유롭지도 않다. 글 쓰는 에너지를 회복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글 쓰는 것. 몸의 감각이 쓰기 모드로 활성화되고 도움닫기를 할 수 있는 밑 원고가 다져진다. 모터가 돌아가고 원고가 불어나 있으면 그 불어난 힘이 글의 소용돌이로 나를 데려간다.



003
해사한 얼굴의 선남선녀들이 글 공부하겠다고 형광등 불빛 아래 모여 있는 풍경은 늘 애잔하다. 저 청춘들이 연애, 학업, 생계가 다 순조롭다면 여기에 왜 와 있겠는가 하는 생각. 과한 오지랖인 걸 알면서도 어쩌지 못하고 말한다. 여러분이 행복해지거들랑 잡지 않을 테니 수업에 오지 말라고. 장난처럼 말하지만 진심이다.
나를 본다. 비교적 생활이 안정된 시기의 글쓰기 욕망은 순했다. 영화나 책 읽기 같은 문화 생활 향유의 후기였다. 쓰면 좋지만 안 써도 무방한 글. 향유의 글쓰기. 내가 글을 부렸다. 생활의 기반이 흔들리고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면서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릴케의 표현을 빌리자면, “글을 쓰지 않으면 내가 소멸될 게 분명했다.” 생존의 글쓰기. 글이 나를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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