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Review/Book

모든 공간에는 비밀이 있다 - 최경철


미스터리 궁금증 증폭하는 제목에 비해 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건축계의 인문서

최경철씨는 ‘유럽의 시간을 걷다’를 지으신 분이기도 한데, 그 때 그 책도 재미있을 것 같아 장바구니에 담아두었지(아직 읽지 못한건 비밀) 엉겹결에 다른 책으로 보게 되긴 했지만 역시는 역시. 적당히 친밀한 글쓰기와 중간중간 묻어나오는 건축학적 혜안이 마치 좋아하는 선배가 신입생에게 과방에서 전공 얘기를 흥미롭게 풀어주는 기분이었다.

그나저나 나의 건축으로의 흥미는 언제쯤 사그라들까. 흥미라기보다 동경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흥미만큼 본 책들만큼 베이스 지식이 쌓이지 않는 것은 더 미스테리. 그냥 동경하는 마음으로 책 독파 이력만 쌓는 건 아닌가.

(책 내용중)
# 건축을 한 문장으로 정의할 수는 없다. 개인의 주관적 사고가 폭넓게 확장해 가는 영역. 현실과 닿아 있지 않아서 허공을 떠돌 때도 많지만, 그래서 즐겁고 재미있는 분야.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연한 사고가 필요한 일. 건축은 사람을 생각하고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마을과 도시를 생각하고 역사와 사회를 생각하게 한다. 형태와 재료, 아름다움을 생각하게 한다. 합리적 비용과 가치를 생각하게 한다. 내가 생각한 건축의 본질이 나의 삶과 사고의 방식을 결정하고 구성한다. 내가 경험하고 기억하고 감각하고 상상하는 모든 공간과 장소가 나의 세계로 통합된다. 결국 내가 생각하는 세계, 클라이언트의 세계, 건축이 놓일 장소의 세계를 끊임없이 생각하는 행위가 곧 건축이다.


# 이사는 자신이 살던 공간을 옮기는 일이다. 물리적·사회적 환경을 옮겨 새로운 공간으로 간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이사 역시 여행이라는 큰 범주에 넣어 볼 수도 있겠다. 소설가 제임스 설터James Salter는 《소설을 쓰고 싶다면》에서 여행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여행은 나에게는 필수적인 거랍니다. 탁 트인 길 그리고 완전히 새로운 것을 보는 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상황이죠. 난 여행에 익숙해져 있어요. 여행은 특히 새로운 얼굴들을 보고 만나거나 새로운 이야기들을 듣는 문제가 아니라 인생을 다른 방식으로 보는 문제예요. 또 다른 막이 전개되는 커튼인 거죠.” 그는 여행이란 기존의 사고방식과는 다른 방식의 경험이라고 말했다.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낯선 공간으로 이동이라는 점에서 이사는 여행이 된다.


최근 이사를 하면서, 이분의 이사에 대한 이야기가 좀더 가까이 와닿았다. 서교동을 떠나는 걸 슬퍼했던 나에게는 새로운 집의 여러가지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뭔가 좀 불편함만 느껴졌었는데, 여기 나온 말처럼 '환경을 바꿈으로써 새로운 경험을 하는 여행의 과정' 이라고 생각하니 조금 괜찮아졌다. 서교동에 평생 살 것도 아닌데, 새로운 곳을 자꾸 찾아서 좋은점 안좋은점을 계속해서 경험하고 누려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일까? 그와 관련해 앞서 ‘분위기’를 설명하며 언급한 바 있는 발터 벤야민을 다시 한번 언급해야 하겠다. 그는 《기술복제시대의 예술 작품》에서 원본과 복제품의 차이는 작품에서 나오는 ‘아우라’에 있다고 말했다. 여기서 아우라는 ‘진품에 대한 인간의 열망과 감동’을 의미한다. 아우라는 예술 작품의 영역을 넘어 일상적 물건이나 인간관계, 사회 현상 전반에 걸쳐 적용 가능한 개념이다

원본과 복제품의 차이는 진품에 대한 인간의 열망과 감동이라니. 이렇게 한마디로 발라버리기 있나 ㅋㅋㅋㅋㅋ발터 벤야민 책을 한번 찾아봐야지 


# 상실감이 증폭되기 시작했다. 핸드폰이 어느 시점에 어디서 사라졌는지 전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한 달여의 시간 동안 나의 여행기가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열대 우림이 순식간에 사막이 되는 것처럼 베를린과 런던, 베네치아, 피렌체, 시에나, 피사, 로마의 기억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사진과 함께 동기화된 시간과 공간의 기억이 흐려졌다. 자책과 괴로움이 동시에 찾아왔다. 나는 왜 잘 참았던 술을 마신 것인가. 왜 나는 파스타를 먹으러 나간 것인가. 전날에도 보았던 광장의 밤을 왜 또 보아야만 했는가. 나는 왜 충분히 맥주를 마셨음에도 마트에 들러 굳이 한 병을 더 샀는가. 이렇게 스스로 여행을 망쳐 버릴 수가 있단 말인가. 나의 모든 행동과 행적 하나하나를 아프게 꼬집었다. 그렇게 밤늦도록 자책의 시간이 이어졌다.

파리에서 핸드폰 쓰리당한 기억이 너무 새록새록하여 보면서 피식 웃었다 ㅎㅎㅎ

# 누군가는 도시를 읽는다는 표현은 반쪽짜리 이야기가 아니냐고 말할 수 있다. 도시의 구조와 흔적을 찾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곳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읽어 낼 수는 없다는 이유다. 물론 그런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 도시는 그 어느 시설보다도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겉모습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이 묻어난 결과물이기에 분명 가치 있다. 도로 체계와 건물의 형식, 각종 장식들은 피상적으로 보이지만 실상 시민들의 삶을 드러낸다. 왜 영국의 우체통은 빨간색인지, 왜 선술집에는 꽃바구니가 걸려 있는지, 왜 런던에 공원과 시계탑이 많은지, 왜 런던 사람들은 검은 옷을 많이 입는지, 시내를 걸으며 바라보는 도시의 면면들을 통해 그 존재 이유를 묻는 것이다. 그리고 궁금증을 하나씩 풀어 가다 보면 어느새 도시의 겉모습만이 아니라 그 안쪽의 삶까지도 열심히 읽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 여행은 내가 살던 도시와 지역을 둘러싼 문화적, 사회적 환경을 벗어나 다른 세계로 가는 일이다. 모든 것이 달라지는 와중에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나 자신이다. 개인 여행자의 취향, 성격, 생각, 관심사 등이 여행의 내용을 결정하는 것이다. 여행을 통한 사고의 확장이나 감동도 개인마다 차이가 있어서, 누군가의 여행 방식을 보면 그의 사고를 읽을 수 있다. 새로운 마을에 갔을 때 집 대문의 모양이나 문손잡이, 난간의 모양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만족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 반면 현지의 음식을 맛보며 문화를 이해하려는 사람도 있다. 쇼핑을 통해 그 지역 사람들의 유행이나 생활 패턴을 가늠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건축가 천경환의 《나는 바닥에 탐닉한다》는 각 도시의 바닥 관찰기다. 바닥의 재료는 무엇인지, 맨홀 디자인은 어떻게 변했는지 등 바닥이라는 미시 세계를 연결하다 보면 도시 전체에 대한 이해에 다다르게 된다. 자신의 관심사를 퍼즐 맞추기처럼 연결해 여행을 완성하는 것이다.
나에게도 새로운 도시를 여행할 때 적용하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 나는 그 원칙들을 도시에 가기 전과 도착하고 하루나 이틀 안에 실행하는데, 첫 번째는 지도를 보고 미리 도시의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도시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나 높은 지대에 올라가는 것이며, 세 번째는 도심지를 무작정 돌아다니면서 눈과 발에 익숙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와 같은 원칙을 갖게 된 것은 건축을 공부했기 때문도 있지만, 도시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싶은 욕심 때문이다. 도시의 구조를 파악하는 데서 이해의 첫발을 내딛는 것이다. 그 모든 작업이 끝난 후에 도시의 일상을 경험하려 한다.

# 여행을 하는 각자의 방식이 있겠지만 유명한 도시는 여행자만의 취향이 드러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도시의 상징인 역사적 장소나 박물관, 미술관과 같은 보편적인 관광지뿐만 아니라 각종 ‘To Do List’나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장소’를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가령 뉴욕에서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전망대에 올라 자유의 여신상을 관람하고 센트럴 파크를 산책한 뒤 구겐하임 미술관에 갔다가 저녁에는 뮤지컬을 관람하는 등의 일정 말이다. 매디슨스퀘어 파크에서 쇼핑을 하고 유명한 햄버거 가게를 들르는 일정도 빼놓을 수 없다. 하이 라인을 따라 산책하다가 유명한 마켓에 들러 사진으로만 보던 킹크랩 수프 한 그릇을 먹기도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유명 도시의 여행자들 대부분은 유사한 경험을 공유한다. 뉴욕을 다녀왔다고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SNS에 유명한 핫 플레이스 방문기를 꼭 올려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듯하다. 이와 같은 현상은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아비투스Habitus’, 즉 사회와 대중 매체가 만들어 낸 관습에 따른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 관습적인 여행은 새로운 영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물론 같은 것을 보더라도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하는지는 개인에게 달린 문제이기에 같은 것을 보는 행위는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개별적 해석을 할 시간적 여유도, 새로운 경험을 지향할 심리적 여유도 없다는 데 있다.
우리는 타인이 만들어 낸 여행의 관습에서 벗어나 어떻게 나의 이야기를 만들 것인가 고민할 필요가 있다. 제한된 일정 속에서 어떻게 나만의 리스트를 만들 것인가. 우선 여행 계획에 대한 고정된 시각을 버려야 한다. 아무리 유명한 곳이라도 나의 취향과 맞지 않는 리스트는 과감히 삭제하는 것이다. 그렇게 일정을 비운 하루 정도는 우연히 벌어지는 상황들에 나를 넣어 보면 어떨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것이다. 나는 어떤 사람이며, 어떤 취향을 가지며, 무엇을 할 때 행복한지에 대해. 반 고흐Vincent Van Gogh의 그림을 진짜로 좋아하는지에 대해. 여행을 좋아하는지에 대해. 스스로 지향하는 바를 구조화할 때 자신만의 여행기가 쓰인다.

아니 이분은 건축가인지, 여행가인지 혼란이 올만큼 너무 맞는말만 하시네 

# 많은 사람이 동서양의 건축을 비교한다. 가장 흔한 질문 중 하나는 왜 우리나라에는 유럽 중세 도시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천 년을 훌쩍 넘어서는 건물이 없느냐는 것이다. 대답을 하기 전에 한 가지 언급하고 싶은 점은 동서양의 건축을 단순히 석재나 목재로 나눠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 석재 건축은 우리 전통에서 한걸음 비켜서 있었을까? 유럽에 흔한 석조 건물과 셀 수 없이 널려 있는 조각품들을 왜 찾을 수 없을까? 동서양의 과학 기술은 산업 혁명 이전까지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동양이 더 우수했다는 기록도 있는데 말이다. 그 차이는 기술이나 조각가의 역량 문제가 아니라 석재가 가진 고유의 특성에서 생겨났다. 유럽에서 주로 사용한 돌은 조각과 세공을 하는 데 유리한 대리석이었다. 대리석은 강도가 높지 않아서 비교적 짧은 시간에 세밀하게 조형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우리가 주로 사용한 화강암은 강도가 너무 높아 세공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같은 인물의 흉상을 동일한 크기로 제작한다고 할 때 대리석과 화강암은 제작 기간이 다르다. 이처럼 암석의 강도가 석재 문화의 전반을 좌우했다.
우리는 목재를 견고하게 짜 맞추는 방식으로 발전했고, 유럽은 석재를 기반으로 단단하면서 화려한 건축으로 발전했다. 지역적 특수성이 건축의 지속성을 좌우한 것이다. 천년의 사찰이 하루아침에 화마에 휩싸여 흔적을 지워 버린 것처럼 나무는 지난한 역사 속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태생적 한계가 있었다. 석재 건물의 강건함은 그 시대의 역사적 주체가 누가 되었든 활용할 가치가 충분했기 때문에 오랜 시간 남아 있을 수 있었다. 돌과 나무의 시간은 그렇게 각각 다르게 흘러 지금에 이르렀다.

나 역시 이것이 늘 궁금했는데, '돌과 나무의 시간이 각각 다르게 흐른다'고 친절하고도 문학적으로 설명해주셔서 좋았다. 

 

# 원과 구체는 어떤 기하학 형태보다도 자기 완결성이 강하다. 중심점으로부터의 거리가 같다는 특징, 각도의 변화 없이 무한하게 연결된 매끈한 표면을 갖는다는 특징은 본질적인 공간이 될 가능성이 높다.

# 영국 작가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는 작가가 되려면 500파운드의 고정 수입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비록 ‘여성 작가가 되기 위해서’라는 전제가 붙긴 했지만 생활을 유지할 돈과 작품을 구상할 공간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여기서 방은 작가의 작품 세계를 구상하는 지극히 내밀한 공간이 된다.
당신에게 가장 내밀하고 개인적인 공간이 어딘지 묻는다면 각자 떠오르는 장소가 있을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처럼 자기만의 방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소박한 정원이나 텃밭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요리를 좋아하는 사람에겐 자신의 손때가 묻은 부엌이 그런 공간일 수도 있다.

# 하나의 공간은 어느 누구의 절대적인 생각대로 구현되지 않는다. 클라이언트의 이데아와 디자이너의 이데아가 충돌하며 상호작용할 뿐이다.

# 내 방이라는 주제와 가장 부합할 만한 건축은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가 말년을 보낸 4평짜리 오두막집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그곳을 작은 궁전Cabanon de Le Corbusier이라고 불렀을 만큼 작지만 풍요로운 공간을 건축했다. 그는 한 사람의 삶에서 가장 적절한 공간 규모는 4평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물론 집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4평의 공간은 삶을 꾸리는 데 충분해 보이지 않는다. 부엌과 식당이 없는데, 문만 열면 식당과 연결되는 근접성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르 코르뷔지에의 담론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는 평생에 걸쳐 다양한 규모의 집을 설계한 경험이 있고 충분한 방과 넉넉한 크기의 거실이 있는 집에서 살았다. 그런 그가 인생의 마지막 지점에서 작은 방으로 돌아간 이유는 무엇일까.

삶의 마지막에 살고 싶은 공간, 그러니까 최종적인 집의 구조에 대해 가끔 생각한다. 좁은 서울에 살면서 여느 누구처럼 당장은 '확장'만이 목표이지만 , 그런 '최종공간'에 대해 늘 열망하고 고민하는 내가 '전환'을 이루게 되는 시기는 예상보다 빨리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 건축 분야에서 분위기를 가장 높은 위계로 올려 이야기한 사람이 있다. 스위스 건축가 페터 춤토르Peter Zumthor다. 그는 저서 《분위기Atmosphere》를 통해 공간의 분위기에 관한 몇 가지 담론을 제시한다. 가령 공간의 질을 결정하는 요소는 감동인데, 이 감동이라는 것은 공간의 분위기를 통해서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분위기를 사람과 사람의 첫인상에 비유하며, 공간의 분위기를 결정하는 12가지 요소를 제시한다. 건축을 인간의 몸에 비유해 다양한 장기를 피부가 덮고 있는 것처럼 바라보는 관점, 물질(재료)의 조합, 공간의 소리, 온도, 주변 사물, 빛, 일관성, 아름다운 형태 등의 주제로 이야기했다. 원래 그 자리에 있음직하게 편안하고, 대체할 만한 건물을 상상하지 못할 만큼 자연스러운 건축을 통해 분위기가 형성된다고 했다.

# 나는 일상에서 매일 지나치는 건물이나 무심코 한 공간에 들어갔을 때 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진다. 이 공간의 본질은 무엇일까? 누구를 위한 공간이고 그것을 어떻게 구현했는가? 건축가의 의도와, 실현된 공간과, 그 공간을 경험하는 사람의 시각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곱씹어 본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건축가가 건네는 이야기에 설득당하거나 반박하며 공간과 감응한다. 그것이 내가 도시 속 건축과 대화를 하는 방식이다.
한편 이 역시 어떤 이에게는 불편으로 다가가기도 한다. 사고의 전개와 결말이 정반대로 작동하는 경우도 있어서, 새로움과 낯섦의 즐거움을 불균형과 부조화로 인식하기도 한다. 그 공간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 죽음에도 공간이 필요하다. 우린 그동안 그것을 잊고 살았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집과 죽음의 공간이 분리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집에서 장례를 치르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집에서 치르는 장례를 딱 한 번 경험해 보았는데, 죽음에 관한 최초의 기억이기도 한 외할아버지의 죽음을 통해서다. 그때의 경험만큼 죽음과 가족, 집과 장례 의식이 선명한 기억으로 남았던 적이 없다. 오랜 시간 집에 머물며 떠나간 사람의 빈자리와 남은 사람들의 애달픔을 눈앞에서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우리는 죽음을 더 이상 망자의 집과 함께 추억하지 않는다. 거의 모든 이가 병원의 장례식장에서 이별을 맞는다. 한국의 장례 문화는 편의와 경제성을 따라 고착화되었고, 시설이 좋고 비싼 곳에서 장례를 치러 주는 것이 망자와 가족의 명예와 위신을 세우는 시대가 됐다. 떠난 이와 마지막 추억을 만들 기회가 사라졌다. 떠난 이의 공간에서 그의 흔적을 그리워할 순 없을까? 죽음에도 집이 필요하다. 천천히 속삭이듯 이 세계를 떠나는 사람의 이야기를 담아낼 집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 요즘 공공 건축의 화두는 복합 시설이다. 말 그대로 다양한 기능과 이용자의 행위가 상존하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고 공공 도서관 로비에 공연 시설을 만드는 식으로 공간별 이해가 상충하는 계획을 하는 것은 아니다. 복합화가 가장 용이한 것은 문화 시설로 다양한 규모의 공연장과 전시, 판매 공간, 카페, 레스토랑, 바 등의 상업 공간을 함께 계획한다. 공연을 즐기러 온 사람이 아니어도 다양한 공간을 경험할 수 있는, 말 그대로 공공의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공공 건축, 그러니까 사람이 잘 모이는 장소의 요건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공공성을 추구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입지다.
그렇다면 거의 모든 땅에 건물이 들어서 있는 도시에 어떻게 빈틈을 만들어야 할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땅이란 곧 돈이다. 19세기 초반 미국의 맨해튼 도시 계획 당시, 지금의 센트럴 파크는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도시 곳곳에 공공의 필지로 조성된 공원도 없었다. 공원이나 공공을 위한 공간은 도시 계획에서 배려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현재 맨해튼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옛 인디언이 다녔다는 길도 존재하지 않았다. 건물을 세울 수 없는 공원은 경제적 가치가 없다. 

# 오늘날 과거의 기억을 담는 기록 매체는 신문 기사, 논문, 책, 사진, 영상, 웹 데이터, SNS, e-mail 등 종류가 다양해졌지만, 공간만큼 직관적이고 상징적인 매체는 드물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도시에서 역사를 기억할 만한 공간을 쉽게 찾을 수 없다. 빠른 시간에 고도성장을 일궈 내느라 과거의 상처를 보듬을 여유가 없었음을 생각하더라도 아쉬움이 남는다. 지금 이 도시는 어제 일어났던 비극을 오늘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화장하기에만 급급한 자기기만의 도시처럼 보인다. 좋은 면만 포장하는 삶은 얼마나 고달픈가. 슬픔과 고통을 숨기지 않는 것처럼, 비극을 인정할 때 역사는 진정한 역사로 거듭나게 된다.

삼풍백화점과는 달리 정치·외교의 문제가 테러로 이어져 발생한 사건이었지만 공통점이라면 무고한 시민의 죽음이었다. 무역센터가 무너진 자리를 수습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들은 그곳을 ‘그라운드 제로’라고 부르며 추모를 위한 공간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현상 공모를 통해 건축가 마이클 아라드Michael Arad의 부재의 반추Reflecting Absence가 당선되었다. 그는 그곳에 ‘의도가 있는 침묵과 목적이 있는 공백’을 계획했다. 물소리에 이끌려 지하로 걸어가면 건물 두 채가 있었던 흔적을 만나게 된다. 쉼 없이 떨어지는 물소리는 마치 그곳에 있었던 비극과 슬픔에 공감하는 사람들의 눈물 같다. 벽을 따라 흘러내린 물이 바닥에 모여 하늘을 비추고, 거대한 두 개의 사각형은 철판에 새겨진 희생자의 이름으로 둘러싸여 있다. 물소리를 따라 사각형에 접근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희생자의 이름을 바라보며 어두운 땅속으로 떨어지는 물줄기를 응시하게 된다. 비극의 공간, 공간의 비극은 그렇게 말없이 떨어지는 물소리로 추모와 치유의 공간이 된다.

쉽게 설명하여 부담스럽지 않으면서도, 뭔가가 조금 묵직하게 남는 느낌의 건축 인문서. 추천합니다 : )  

728x90

'Review > Book'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래 준비해온 대답 - 김영하  (0) 2020.10.11
그리스인 조르바 - 니코스 카잔자키스  (0) 2020.10.06
모든 순간의 물리학 - 카를로 로벨리  (0) 2020.09.21
룬샷 - 사피 바칼  (0) 2020.09.11
표백 - 장강명  (0) 2020.0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