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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Book

살고 싶다는 농담 - 허지웅



허지웅님에 대한 편견이 있던 것이 사실이었다.

​행자언니가 전에 같은 책에 대해 리뷰를 했을 때 댓글을 달았었더랬다.

"허지웅씨의 글은 매력적인데 또 한편 질투나게끔 하는 양면성이 있는 거 같아 선뜻 안 집어들게 되더라. 왜 약간 넘사벽인 작가들의 글은 권위를 인정하고 그렇군요 끄덕끄덕 하는데 , 자칭 평론가들의 글은 권위를 스스로 부여한 것 같은 기분이라 “네가 왜?” 하는 기분이 먼저 든단 말이지. 근데 이번에 건강문제로 삶의 바닥까지 딛고 돌아온 걸 보니, 그에게 없던 권위가 생겼달까. 한마디한마디가 허투루 보이지 않더라고. 이렇게 생각하는 나 겸손치가 않은 것 같은데 그게 맞나요?"

그러나 이번 책을 읽으면서 무려 50개의 문구를 캡쳐한 나 , 뭔가요? ㅋㅋㅋㅋㅋ

 

​아마도 이번부터 내가 자의적으로 부여한 권위, 그 이전의 글들도 분명 이만큼 명료하고 설득적이었을 것이다.(확신이다) 특히 위로한답시고 이리 뭉개고 저리 뭉개며 이거저거 다 좋다. 그냥 내 마음이 최고다 라는 식의 에세이보다 백배 천배 좋았다. 이성을 놓지 않으면서도, 따뜻한 시선으로 이해하는 것이 나와 잘 맞는 방식인 것 같아 특히 좋았다.

 

니체와 오스카 와일드의 이야기도 좋았다. 고전을 재해석 하여 풀어 쓰는 능력이 탁월한 것 같다. 고전을 읽어봤지만 이렇게까지 현실적용하여 이해가 잘 되진 않았었는데, 작가 본인의 실제 경험과 결부시켜 그런지 어려운 철학을 이해하는데 꽤 도움이 되었다. 처음 들어본 그 둘의 인생 말로 역시 인상적이었다. 나는 평소 작가가 쓰는 글과 작가의 삶을 동일시 하지 않는 편이었는데 왜 함께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지 처음으로 와 닿았다고 할까. 모두가 니체나 오스카와일드의 유려한 말과 문장들에 주목하지만, 실제 삶과 함께 서술되니 훨씬 강력한 힘이 느껴졌다. 다자이 오사무와 미시마 유키오도 마찬가지고.

 

피해의식에 관한 닉슨의 이야기, 그리고 순백의 피해자에 관한 글 역시 흥미로웠다. 피해의식의 폐해에 대해서는 절박하게 느끼면서도 어떤 연유로 그런 의식이 생성되고 발전해 가는지에 대해서 깊게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 그것이 순백의 피해자 논리와 결합되는 부분 역시도. 인간관계와 사회에 대한 작가의 뛰어난 통찰에, 편견은 커녕 우러름이 생길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그의 책을 가끔씩 다시 읽어보고 힘을 얻고 싶은 글로 강추하기로! ( 그가 쓴 글들이 인터넷에서 함부로 재단되어 맥락없이 떠도는 것이 싫다하여, 길게 캡쳐하다보니 이렇게나 길어졌다.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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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하려면 아직 멀었다>

# 나는 언제나 뭐든 혼자 힘으로 고아처럼 살아남아 버텼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껴왔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누구에게도 도와달라는 말을 할 수 없는 멍청이가 되고 말았다. 그런 인간은 도무지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는 것이다. 그런 인간은 오래 버틸 수 없다. 오래 버티지 못한다면, 삶으로 증명해내고 싶은 것이 있어도 증명해낼 수 없다. 나는 행복이 뭔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매대 위에 보기 좋게 진열해놓은 근사한 사진과 말잔치가 행복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결론이 아니라 결심이다>

# 쾌활함과 불쾌함의 경계라는 게 있다면 그걸 애써 설명하려 드는 것보다 이 아저씨를 5분 동안 지켜보는 편이 빠를 것이다.

 

# 처음에는 선물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항암을 하면서 머리카락이 빠진 환자들에게 주는 일종의 환자복 같은 건가 싶었다. 그러나 이내 그게 말이 안 된다는 걸 깨닫고 ‘아 선물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머릿속은 온통 죽음이라는 결론으로 가득했다. 털모자라니. 빠른 죽음이냐 느린 죽음이냐를 따지고 있는데, 머리카락 한 올 남지 않은 머리를 가리고 말고는 고심할 만한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준비한 마음이 얼마나 드물고 귀한 것인지에 관해 나는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죽음이라는 결론에만 몰두해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런 거대한 결론 앞에 다른 것들은 한없이 사소한 소음으로 전락하고 만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결론이 아니라 결심이다. ​결론에 사로잡혀 있으면 정말 중요한 것들이 사소해진다. 결론에 매달려 있으면 속과 결이 복잡한 현실을 억지로 단순하게 조작해서 자기 결론에 끼워 맞추게 된다. 세상은 원래 이러저러하다는 거창한 결론에 심취하면 전혀 그와 관계없는 상황들을 마음대로 조각내어 이러저러한 결론에 오려 붙인 뒤, 보아라 세상은 이렇게 이러저러하다는 선언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정작 소중한 것들을 하찮게 보게 만든다.

 

​거창한 결론이 삶을 망친다면 사소한 결심들은 동기가 된다. 그리고 그런 사소한 결심들을 잘 지켜내어 성과가 쌓이면 삶을 꾸려나가는 중요한 아이디어가 될 수도 있다. 사실 결론에 집착하는 건 가장 피폐하고 곤궁하고 끔찍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가장 훌륭한 안식처다. 나도 거기 있었기 때문에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죽음에만 몰두하고 있을 때는 다른 사소한 것들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다른 사소한 것들을 신경 쓰지 않고 있는 동안, 나는 죽음 이외에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에게 제발 거기 가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결론이 아니라 결심이다.

<다시 시작한다는 것>

# 지는 것에만 익숙해지면 뭐가 진짜 이기는 거고 지는 건지조차 구분이 어려워진다. 되는 놈만 늘 되는 이유가 그런 것이다. 이겨본 사람만이 다시 이길 수 있고, 지더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요컨대 끝까지 버틸 수 있는 몸을 만들자는 것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청년이었을 때를 생각하면 ‘지금의 나라면 그렇게 안 할 텐데 바보같이’라는 마음이 앞섰다. 마흔두 살의 나는 점점 ‘그때의 나라면 지금 이렇게 안 할 텐데 바보같이’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나이 든다는 것은 과거의 나에게 패배하는 일이 잦아지는 것과 같다.

 

서른 살 이후로 태어나서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걸 시도해본 기억이 없다. 대개 그렇다. 음악도 들었던 것만 듣고 운동도 했던 것만 하며 사람도 만나던 사람만 만난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것만 열심히 했다. 요가는 해보지 않았던 것이고 잘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내게 요가란 그런 것이다. 그래서 그만둘 수 없었고, 그래서 열심히 한다. 이길 때의 기분을 오랜만에 느끼면서 그동안 쌓아왔던 경험치가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걸 발견하게 된다. 다시 시작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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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과 바닥>

# 나는 살기로 결정했다. 병과 싸우는 게 거짓말처럼 수월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전처럼 절망적이지는 않았다. 내가 그날밤에 겪은 일 때문이 아니다. 살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불행에 대처하는 방법>

# 그렇게 여러 명의 상대를 떠나보내고 내가 떠나오기를 반복하며 삶을 살아내다 어느 순간 마침내 깨닫게 된다. 그것 때문에 헤어진 게 아니라는 걸 말이다. 시간을 돌려 특정한 행동을 고치거나 아예 벌어지지 않게 한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을 거라는 걸 말이다. 관계가 이어졌다가 끊어지기까지의 과정에서 명확한 건 오직 시작과 끝뿐이다. 나머지는 복잡하게 얽혀 있는 실타래다. 거기서 선명한 원인 한 가지를 찾아내겠다고 애쓰는 건 이미 먹고 있던 국수 그릇에서 처음 삼킨 면과 마지막에 삼킬 면의 시작과 끝을 찾아 이어보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요컨대 불행의 인과관계를 선명하게 규명해보겠다는 집착에는 아무런 요점도 의미도 없다는 것이다. 그건 그저 또 다른 고통에 불과하다. 아니 어쩌면 삶의 가장 큰 고통일 것이다. 그러한 집착은 애초 존재하지 않았던 인과관계를 창조한다. 끊임없이 과거를 소환하고 반추해서 기어이 자기 자신을 피해자로 만들어낸다. 내가 가해자일 가능성은 철저하게 제거한다. 나는 언제까지나 피해자여야만 한다는 생각은 기이하다. 개인사에서도 그렇고 국제정치에서도 그렇다. 스스로를 변치 않는 피해자로 설정하고 그러므로 옳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피해자 정치의 근성은 이 시대의 가장 비뚤어진 풍경 가운데 하나다. 당장 이기기 좋은 전략일지 모른다. 그러나 결국 사람을 망친다.

 

사람의 능력으로 특정할 수 있는 몇 가지 원인을 고치거나 없앤다고 해서 그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리라 장담할 수 없다. 벌어질 일은 반드시 벌어진다. 운명 이야기가 아니다. 충분한 원인과 조건이 갖추어졌기 때문에 결국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일이라는 이야기다. 피할 수 없다.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결과를 감당하며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있는 힘껏 노력할 뿐이다.

 

오늘 밤도 똑같이 엄숙하고 비장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천장에 맞서 분투할 청년들에게 말하고 싶다. 네가 생각하고 있는 그것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다. 벌어질 일이 벌어진 거다. 그러니까 괜찮다.​

<만약에>

#〈라라랜드〉의 모든 갈등은 예상한 시점에서 찾아오고 쉽게 해결된다. 빤하게 흘러가는 이야기를 채우는 정서는 좋게 말해서 낭만적이고 정직하게 말해서 예측 가능한 지루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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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인생의 일곱가지 장면>

# 내 인생은 그저 하찮고 조금도 중요하지 않아서 일곱 개씩이나 되는 장면을 고를 수가 없다며 낙담하는 사람도 있고, 내 인생은 너무 화려하고 중요해서 고작 일곱 개의 장면으로는 요약하는 게 불가능하다며 화를 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낙담하는 자도 화를 내는 자도 결국에는 똑같이 겸허한 마음으로 과제를 마치리라 생각한다. 적막한 삶도 소란스러운 삶도 마지막 일곱 번째 장면은 똑같이 죽음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혼자 죽는다.

 

막상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는 작업이다. 눈을 감고 여태까지의 삶을 펼쳐본다. 내 삶의 가장 충만한 순간이 떠오른다. 또한 가장 비참한 순간이 떠오른다. 가장 평화로웠던 순간이 떠오르고, 가장 시끌벅적했던 순간이 떠오른다. 가장 고마웠던 순간이 떠오르고, 마지막으로 가장 억울했던 순간이 떠오른다. 수많은 얼굴들이 떠올랐다 사라지고 내가 들은 가장 기쁜 말들과 가장 아픈 말들이 뒤를 따른다. 마지막까지 남아 잘 지워지지 않는 얼굴과 이름들이 있다. 미련이 남지 않게 잘 눌러서 마저 지우고 고개를 들면, 그렇게 일곱 가지 장면을 모두 정한다.

 

# 부디 평안하기를. 우리의 삶은 남들만큼 비범하고, 남들의 삶은 우리만큼 초라하다.

<기억1. 존 허트, 나는 사람입니다>

# 나는 사람이라고 절규하며 스크린을 향해 질주하던 존 메릭의 모습이, 이 영화를 처음 본 지 꽤 오래된 지금까지도 결코 잊히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것으로부터 공포를 느낀다. 그리고 공포를 이기기 위해 그것을 혐오하고 욕하며 ‘괴물’로 분류해낸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과 함께 〈엘리펀트 맨〉은 이 분야에 있어 영원한 레퍼런스로 언급될 것이다. 많은 이들이 평균의 삶에 자신을 맞추어 살아가고 또 그런 가르침을 자식에게 전수하려 애쓰는 것은 세상이 자신과 다른 것에 얼마나 끔찍하고 폭력적으로 반응하는지에 관해 평생 동안 학습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 여기서 그토록 유명한 『1984』의 문구가 탄생했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며,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 정권을 잡고 있는 자들이 역사 교과서를 바꾸려 하는 건 과거에 집착하기 때문이 아니다. 다시 반복하자면,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며,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구조화하는 데 성공하는 정권은 영원히 권력을 누릴 수 있다.

<미시마 유키오와 다자이 오사무의 전쟁>

# 미시마 유키오는 방패회 조직원들과 함께 ‘우수 자위대원 표창’을 명목으로 자위대 동부 총감과 면담하던 중 일본도를 꺼내 들어 위협하며 인질극을 벌였다. 그리고 총감의 방 발코니에서 천황을 지키기 위해 자위대가 당장 분연히 일어나 쿠데타를 실행해야 한다는 연설을 했다. 연설은 주변 소음 때문에 거의 들리지도 않았고 자위대원들은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이 자리에서 미시마 유키오는 계획한 대로 방패회 멤버와 함께 할복자살했다. 극심한 고통 때문에 할복의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명민하기 이를 데 없고 천재성으로는 따를 자가 없었던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의 괴상한 자살은 세계적인 가십이 되었다. 그는 소설 『우국』에서 천황을 위해 목숨을 희생하는 할복을 아름답기 짝이 없게 묘사한 바 있었고 자신의 할복 또한 그럴 것이라 예상했으나 현실의 그것은 소란스럽고 끔찍한 난장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다자이 오사무는 자기 안으로 후퇴하고 침식되다 죽음을 선택했다. 미시마 유키오는 대의에 매료되어 뜬구름 잡는 뜨거움을 주장하다가 허황된 죽음을 선택했다.

 

누군가는 다자이 오사무와 미시마 유키오를 서로 완전히 상반된 두 개의 이미지로 비교한다. 그러나 나는 저 둘이 서로 완전한 닮은꼴이었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한 사람은 자기 존재가 버거워 그것을 감싸 안으며 안으로 끝없이 파고들어 갔다. 다른 하나 역시 자신을 버거워했으나 안으로 파고드는 대신 천황과 일본의 무장을 핑계로 '극기'와 '남자다움' 따위에 한없이 매료되었다. 

 

# 미시마 유키오는 병역을 부정하게 면제받았던 일과 성적 정체성, 그리고 나약한 신체에 대해 매우 창피하게 생각했다. 피트니스 운동과 우익 활동에 병적으로 집착했던 맥락을 여기서 찾아볼 수 있다. 그가 운동으로 다져진 몸으로 일본도를 들고 우익 머리띠를 두른 채 찍은 화보를 보고 있으면, 그래서 조금 슬퍼진다. 그는 자신이 했던 말 그대로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연기”하고 있다.

 

# 내 안에 다자이와 미시마의 비율이 어느 정도일지 가늠해본 일이 있다. 아무래도 미시마 쪽이 더 많은 것 같았다. 나이를 먹을수록 저 두 가지 사이에서 근사한 비율을 찾아보려고 노력했지만, 사실 그게 세월에서 얻어지는 한줌의 지혜와는 별반 관계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오늘도 나는 나와 다투고, 또다시 친구가 되기를 반복한다. 지치는 노릇이지만 생을 마감할 때까지 계속될 일이다. 다른 사람들도 그럴 것이라 생각하면 거리 위를 바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이 슬퍼 보인다. 예민함은 더 많은 것에 공감할 수 있게 만들어주지만 꼭 그만큼 공연한 슬픔을 안겨주기도 한다.

 

"나는 다자이와는 더욱더 반대되는 방향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건 아마도 내 안의 어딘가에 다자이와 같은 부분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더욱 분발해서 그와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가려고 하는 것이겠지요" 미시마 유키오의 고백이다.

<선한 자들이 거짓말을 할 때> 

# 나는 이제 더 이상 그렇게 뜨겁게 살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갖게 된 건 오래되었고, 실제 그렇게 살게 된 것은 1년 정도 되었다. 병상에서 여러 번 생각했다. 뜨거움은 삶을 소란스럽게 만들 뿐 정작 단 한 번도 채워주지 못했다. 그렇게 한 번 살아봤으니, 더 살 수 있게 된다면 전혀 다르게 살아보자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운이 좋았다.

 

나는 남을 평가하는 일을 그만두었다. 평가받는 일이 얼마나 고되고 영혼을 파괴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관해 이야기하는 일도 그만두었다. 최근 몇 년 사이 사안에 대해 함께 고민하는 독자보다 그래서 너는 누구 편이냐고 묻거나 마음대로 단정 짓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아졌다. 더 이상 삶을 소음으로 채우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내가 정말 바꿀 수 있는 작은 걸 떠올려보자는 생각이었다. 이제 나는 다음 책을 비롯한 사사로운 작업들과, 가난한 청년들이 나와 같은 이십 대를 보내지 않도록 만드는 일에만 집중한다. 다른 일에는 큰 관심이 없다.

 

<악마는 당신을 망치기 위해 피해의식을 발명했다>

# 자기 삶이 애틋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누구나 자신이 오해받는다고 생각한다. 사실이다. 누군가에 관한 평가는 정확한 기준과 기록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평가하는 사람의 기분에 따라 결정된다. 맞다. 정말 불공평하다. 하지만 그게 현실이다. 이와 같은 현실을 두고 누군가는 자신을 향한 평가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킨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죽을힘을 다해 그걸 해낸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한다. 반면 누군가는 끝내 평가로부터 헤어나지 못하고 자신과 주변을 파괴한다.

 

# 그는 끝까지 억울했다. 피해자라는 지위에 더없이 만족하고 자족했다. 요컨대 ‘나는 피해자니까 옳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 없는 억울함을 기반으로 어떤 부정을 저지르더라도 ‘나는 피해자니까 나의 부정은 너희들의 부정과는 달리 국가 안보와 같은 더 큰 선을 위한 것이며 여기에는 매우 선명하게 다른 결이 있다’는 괴상한 자신감을 가졌다. 이와 같은 자신감은 결국, 미합중국 37대 대통령 리처드 닉슨을 망쳤다.

 

정치 보복에 있어서 리처드 닉슨보다 과감한 자는 없었다. 자신에게 반대하는 정적은 단지 정적이 아니라 슈퍼 빌런이었다. 자신과 같은 진정한 선인이자 자수성가한 피해자에게 반대한다는 건 엄청난 악당일 수밖에 없다는 망상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그런 슈퍼 빌런을 부숴버리는 데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릴 필요가 없다. 수많은 사실관계 가운데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취사해서 선택하는 방식으로 현실을 뒤틀고 조작했으며 그렇게 조작된 현실을 사실이라고 믿었다.

 

# 역사 속의 숱한 성공과 화려한 유산보다 닉슨의 실패와 몰락은 더 강력한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대부분의 성공에는 운이 따른다. 반면 실패는 악운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실패는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 내가 직면한 실패가 자연스런 결과로서의 실패인지, 혹은 의도에 의한 음모와 배신인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이다. 중요한 건 다음이다. 나라는 인간의 형태는 눈앞의 문제에 대처하는 방식을 선택하는 순간 결정되는 것이다.

 

억울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살다 보면 크고 작은 배신과 실패를 직면하게 될 일이 반드시 생긴다. 이에 대처하기란 쉽지 않다. 비슷한 일이 한두 번 반복되다 보면 평상시에도 자연스레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게 된다. 결국 삶을 살아가는 동안 겪게 되는 다양한 양태의 문제들에 있어서 단 한 가지 방식의 대응만을 선택하기에 이른다. 자신이 잘한 일이든 잘못한 일이든 억울한 일이든 그렇지 않은 일이든 관계없다. 그저 무조건 매사에 방어적으로만 대처하게 되는 것이다.

 

피폐한 마음을 가진 자들의 가장 편안한 안식처는 늘 자조와 비관이기 마련이다. 어느덧 나는 완전무결한 피해자라는 생각 안에 안도하며 머물게 되는 것이다. 그런 자신을 구하기 위한 자력구제의 수단으로 무엇을 선택하든 늘 옳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그렇게 타락한다. 니체가 말한 심연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피해의식이 느껴지고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마다 나는 닉슨을 떠올린다. 닉슨의 노력과 선량함을 떠올린다. 그런 훌륭한 가능성을 가졌던 사람을 완전히 망쳐버린 피해의식에 대해 마지막으로 떠올린다. 그리고 경계한다. 피해의식은 사람의 영혼을 그 기초부터 파괴한다. 악마는 당신을 망치기 위해 피해의식을 발명했다. 결코 잊어선 안 된다.

<스스로 구제할 방법을 찾는 사람들에게>

# 기댈 수 있는 신적 존재도, 제도적 안전장치도 없이 혼자 싸워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우리는 피폐해진다. 싸우기 위해 거칠어진다. 불신만 남는다.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을 법한 사람들끼리도 상대를 증오한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나의 모습을 상대에게서 발견했을 때, 우리는 공감과 이해보다 질타와 선 긋기를 우선하기 마련이다. ​​버티어 살아남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끝내 우리가 싸웠던 어둠 안에 갇히고 만다. 너무 오랫동안 혼자 힘으로 살아남은 탓에, 타인의 도움을 받는 방법을 잊은 것이다.

 

끝까지 버티고 싸우되 피폐하고 곤궁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끼리 선의를 가지고 선한 행동을 하며 서로를 도울 것. 〈쓰리 빌보드〉는 자력구제를 위해 일어선 사람들 사이의 선한 의도와 행동 그리고 연대만이 〈디어 헌터〉나 〈쳐다보지 마라〉와 같은 비관적 결말을 극복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가진 가장 멋지고 빼어난 것들 덕분이 아니라 언제 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오래된 선행들 때문에 구원받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삶의 바닥에서 괜찮다는 말이 필요할 때>

# 누군가 내게 질문을 해왔다. 지금이 밑바닥이라는 걸 어떻게 알 수 있나요. 나는 대답했다. 더 이상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 때가 밑바닥인 것 같습니다. 거기 이르고 나면 여기서 더 망해봤자 크게 달라질 것도 없으니 생존을 위해 어떤 노력이라도 할 수 있는 몸 상태가 됩니다. 배고픈 건 주워 먹으면 되고, 기분 나쁜 건 내가 못났으니까 하고 넘기면 됩니다. 어떻게든 살아야 하니까 뭐든 할 수 있고 또 뭐든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할 수 있습니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등장하는 영원회귀는 ‘동일한 것의 영원한 반복’이다. 우리가 죽으면 똑같은 인생이 다시 반복된다는 이야기다. 시간 여행이 아니다. 평행 우주도 아니다. 완전히 토시 하나 바뀌지 않은 그대로가 반복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 구절을 여러 번 읽고 이해한 뒤 토할 뻔했다. 우리가 과거의 인생을 반복하고 있고 그것을 다시 영원히 반복한다는 아이디어는 끔찍한 생각이다. 니체는 정확히 바로 그 공포에 맞서라고 이야기한다. 모든 것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운명론적 공포를 극복하고, 반복되더라도 좋을 만큼 모든 순간에 주체적으로 최선을 다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상관없다고, 이토록 끔찍한 삶이라도 내 것이라고 외치라는 것이다. 나아가 그런 삶을 사랑하라 주문하는 것이다. 니체의 영원회귀는 바로 그 순간 네 삶의 고통과 즐거움 모두를 주인의 자세로 껴안고 긍정하라는 아모르파티와 결합한다.

<바꿀 수 있는 용기와 바꿀 수 없는 것에 대한 평정>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은혜와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를 허락하소서

- 라인홀드 니부어 

# 정말 바꿀 수 없는 건 이미 벌어진 일들이다. 내가 한 말과 행동, 선택으로 인해 이미 벌어진 일들 말이다. 이미 벌어진 일에 마음이 묶여 신음하는 소리를 들어보라. 얼마나 참담한가. 벌어진 일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게 쉬운 일이라면 그토록 많은 시간 여행 이야기들은 결코 사랑받지 못했을 것이다. 바꿀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는 건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끝내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너무 늦게 인정하면 삶이 파국으로 빠지는 걸 막을 수 없다.

 

# ​이 기간 동안 알프레드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심연으로부터』를 보면 불과 몇 년 전까지 지구 위에서 가장 반짝거리는 인간이었던 오스카 와일드가 어떻게 말라 죽어가고 있는지 생생하게 드러난다. 거대한 자의식은 곧 거대한 피해의식으로 변모했다. 그는 원망과 후회, 피해의식에 몸부림치며 과거의 일들을 하나씩 전부 복기하기 시작한다. 네가 내게 한 이 끔찍한 짓을 좀 보라고 비명을 지르며 연인이 자기 삶에 끼친 폐해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한다.

 

출소가 임박해서야 겨우 벌어진 일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영혼을 구할 수 있는 시점을 오래전에 지나쳤다. 너무 늦었다. 그는 완전히 망가졌다. 뒤늦게 삶 앞에 겸허해졌지만, 이미 삶 자체가 사라지고 없었던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는 3년 후 죽었다. 죽기 전 왜 더 이상 글을 쓰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삶이 뭔지 모를 때 글을 썼습니다. 이제는 그 의미를 알기 때문에 더 이상 쓸 게 없습니다. 삶은 글로 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저 살아내는 것입니다. 나는 삶을 살아냈습니다.”

 

# 이전에 니체의 삶과 후기 철학에 관해 언급한 바 있다. 네가 아무리 추악한 결론에 이르러 있더라도 아직 그것은 삶의 결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너는 아직 할 수 있는 것이 많고 그것을 이루러면 피해의식으로부터 결별하여 마침내 ‘그것이 삶이었던가? 좋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니체의 영원회귀와 아모르파티)을 외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앞서 소개했듯 니체 또한 앞선 오스카 와일드의 사연처럼 시련을 겪고 피해의식에 파묻혀 숱한 편지를 썼다. 그러나 주저앉지 않고 불굴의 의지로 일어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완성했다.

 

바꿀 수 있는 걸 바꿀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인간을 니체의 언어로 바꾸어 말하자면, 그것은 위버멘쉬일 것이다. 한때 초인으로 번역되었으나 이제는 극복하는 인간, 혹은 그냥 위버멘쉬라고 이야기한다.

 

위버멘쉬는 전지전능한 슈퍼맨이 아니다. 말 그대로 스스로를 극복해나가는 인간이다. 영원회귀와 아모르파티는 이 삶이 영원히 똑같이 반복된다 할지라도 주체적으로 끌어안고 긍정하며 살아내겠다는 자기 선언이었다. 위버멘쉬는 이를 실천하는 인간이다. 나아가 내 삶이 영원히 반복되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영원히 반복되어도 좋을 만큼 제대로 바꾸고 극복하며 살아내겠다는 이야기다. 즉,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란 자기 삶을 향한 주체적인 긍정으로부터 나온다.

 

처음 읽을 때는 위버멘쉬를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다음 단계 정도로 이해했다. 오랜 세월 몇 번 되풀이해 읽다 보니 위버멘쉬란 단계가 아닌 태도에 붙여지는 이름이 아닐까 싶어졌다. 고통마저 긍정하고 사랑하며 운명을 바꾸어나가는 삶이란 단 한 번의 각성이 아닌 끊임없는 다짐과 실천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광장에서 마부에게 학대당하고 있던 말을 부둥켜안고 울부짖다 쓰러진 뒤 완전히 미쳐버린 니체의 마지막을 떠올릴 때마다 그래서 더욱 눈물이 난다. 아마도 평생 동안 마부에게 채찍으로 맞아왔을 말을 보고 그는 무엇을 떠올렸을까. 그런 삶조차 긍정하고 주체적으로 살아내야 한다는 게 얼마나 슬픈 일인지에 관해 생각하며 그는 대신 맞아주기 위해 말을 감싸 안았던 것이다. 울다가 혼절하고 미쳐버린 것이다. 영원회귀고 아모르파티고 위버멘쉬고 그냥 아무 말이나 떠들어댔던 게 아니라 그 길에 이르는 처연함에 관해 누구보다 예민하게 공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니체가 이때 미치지 않았다면 분명히 개인들이 서로의 구원을 위해 필요할 때 대신 맞아주며 연대하여 위버멘쉬에 이르는 길을 제시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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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을 벗어야 하냐는 질문>

# 가면을 쓰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가면 쓰고 살아가는 다른 이들이 부조리하고 부패해서 그렇게 사는 게 아니다. 더 오래 버티기 위해 그러는 거다.

 

# 한국만큼 청년의 치기 어림이 쉽게 공격당하는 나라는 없다. 한국만큼 청년의 시행착오가 용서받지 못하는 나라는 없다. 한국만큼 청년이라는 말이 염가로 거래되는 나라는 없다. 밥벌이를 하며 살아남아 세상을 바꿀 주체가 되려면 끝까지 버텨야 한다. 그러니까 가면을 써라. 다만 가면을 쓴 채로 계속 살아갈 수는 없다. 그러다가는 미칠지도 모른다. 가면을 쓰고 있지 않아도 좋은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런 친구는 많을 필요가 없다. 사실 많을 수도 없다.

 

#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가면 안의 내가 탄탄하지 못하다면 가면을 쓰든 안 쓰든 아무 차이가 없다. 비빌 구석이 필요하다. 생각의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등대 노릇을 해줄 어른을 만나 지혜를 빼먹어라. 물론 어려운 일이다. 나는 그런 어른을 갈망했다. 하지만 그런 어른을 식별할 밝은 눈이 없었는지 아니면 단지 운이 없었는지 평생에 인연이 없었다. 그럴 때는 이미 죽은 어른의 글에 기대도 좋다. 나는 그렇게 했다. 여의치 않으면 결코 닮고 싶지 않은 최악의 어른을 찾아내 그의 인생과 나의 선택들을 비교하며 늘 경계하는 것도 훌륭한 선택지다. 부디 청년들이 버거운 원칙이나 위악으로 스스로를 궁지에 몰지 않기를 바라며 이 글을 쓴다.

<순백의 피해자는 없다>

# 순백의 피해자라는 환상’이라는 글을 기고한 일이 있다. 애초 세월호 유가족에 대한 비난 여론을 보며 만든 개념이었다. 사람들은 ‘순백의 피해자’라는 판타지를 가지고 있으며, 이 순결 판타지에 의하면 어떤 종류의 흠결도 없는 착하고 옳은 사람이어야만 피해자의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생각에 균열이 오는 경우 ‘감싸주고 지지해줘야 할 피해자’가 ‘그런 일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피해자’로 돌변한다.

 

# 피해자들이 금전적 이익을 바라고 접근했다가 걸려든 것이기 때문에 자업자득이라는 이야기다. 혹은 아주 순전한 형태의 피해자는 아니라는 말이다. 얼마나 순수한 피해자인지 측정해보았더니 기준에 미달한다는 것이다. 그런 걸 측정할 수 있는 권능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 청년들은 조심해야 한다. 자신이 누군가의 속내를 쉽게 측정할 수 있다거나 특히 순수성과 양심을 평가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주의해라. 자신이 속한 진영의 이익을 위해 멋대로 누군가를 천사로, 악마로 단정하고 몰려다니며 소란을 피우는 자들. 우리는 정의롭다며 아무런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자들. 그런 자들을 피하는 것만으로도 삶이 충분히 입체적이고 풍요로워질 수 있다. 피해자는 그냥 피해자다. 착한 피해자도 나쁜 피해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말은 불필요하다. 그런 말을 하는 자에게는 자기 이익에 부합하는 숨은 의도가 반드시 있다.​

 

# ​착한 피해자라는 말을 들여다보자. 피해자에 특정한 이미지와 표정을 덮어씌우려는 것은 한국 사회의 순결 콤플렉스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피해자에 성녀, 처녀, 가난한, 약한, 순결한 따위의 수사를 가져다 붙인다. 이건 운동권의 오래된 방식이다. 타인의 불행에 무감각한 대중의 동정과 관심을 사려는 이유였다. 이해는 하지만 이제는 바꿔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더욱 큰 해악이다. 나쁜 피해자를 이야기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착한 피해자를 이야기하는 사람도 진짜 피해자를 궁지에 몬다는 점에서 전혀 다를 게 없다.

 

착한 피해자라는 이미지에 천착하는 이들이 정말 해로운 이유는 피해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행동하기 때문이다. 피해자를 지켜야 하고 위해야 한다고 말을 하지만 이건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다. 정치적 대의명분과 피해자의 입장이 충돌할 때 피해자는 수단으로 전락한다.

 

# 다시 말하지만, 순백의 피해자란 실현 불가능한 허구다. 흠결이 없는 삶이란 존재할 수 없다. 순백의 피해자라는 요건을 충족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 걸 측정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사람들 또한 언젠가 피해자가 되었을 때 순백이 아니라는 이유로 구제받지 못할 것이다. 그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불행을 동기로 바꾼다는 것>

# 도처에 불행이 있다. 불행은 발견되는 것이고 행복은 주장되는 것처럼 보인다.​

 

# 행복해서 거만해졌으면 좋겠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태도로는 어렵다. 그건 삶에 관한 해석이라기보다 스스로에게 거는 저주에 가깝다. 과거는 변수일 뿐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저주 같은 것이 아니다. 앞으로의 삶을 결정짓는 것도 아니다. 자기 객관화를 통해 불행을 다스린다면, 그리고 그걸 가능한 오래 유지할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이 얼마든지 불행을 동기로 바꿀 수 있다고 확신한다. 보다 단단하고 건강한 사람이 될 수 있는 발판이 되리라 생각한다. 희망이 없다, 운이 없다, 는 식의 말로 희망과 운을 하루하루 점치지 말라. 희망은 불행에 대한 반사작용과 같은 것이다. 불행이 있다면, 거기 반드시 희망도 함께 있다. 부디 나보다 훨씬 따뜻하고 성숙한 방식으로 타인의 불행에 공감하며 함께 내일을 모색해나갈 수 있는 어른이 되길. 그리고 행복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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