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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Book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 박완서

내가 태어나던 해 발간된 소설을 읽었다. 평소의 나 같으면 고루하다고 읽지 않았을 소설이다. 6.25때 피난 난리통에 동생의 손목을 놓아버린 언니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다. 평소 한국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잘 안보던 나였는데, '한국사회는 죄책감으로 쌓아올렸다’는 문구에 끌려 책을 보기 시작했던 것 같다.

박완서. 이 분의 이름은 연남동 엄마의 책장에서 처음 보았다. 아마도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였을 것이다. 호기심을 자아내는 책 제목 이상으로 내용은 그다지 궁금하지 않았었다. 이미 누르스름 바래진 책표지여서 그랬을까. 그 시절의 이야기는 처절하거나 구질구질할 것 같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어서였을까.

그런데 요며칠 갑자기 왜 이분의 책이 궁금해졌을까, 별안간의 호기심에 그녀의 작품 몇 권을 골라 목차를 훑어본 후 이 책을 골랐다. " 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 뭔가 내용이 잘 연상되지 않는 제목이다. 마지막까지 읽었지만 마찬가지였다.

글에서 느껴지는 힘. 그게 이 책을 읽은 한마디의 소감이다. 간결하면서도 힘있는 필체가 온 마음을 사로잡았다. 40여년 전 소설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바로 어제 저녁 친구와 나눈 수다거리만큼 생생한 기분이었다. 시간을 잊을만큼 재미있었다.

오히려 이 책을 읽고 나니 최근 유행하는 소설들이 밍숭맹숭 해 보였다. 그저그런 편안한 단어들을 늘어놓으며 그저그런 감정을 묘사하는 것이 지루했다. 원래도 내가 좀 극적인 것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거침없는 대사들에 속이 시원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위선'에 대한 묘사가 특히 날카로웠다. 동생의 손을 놓아버리고 만 언니 수지가 스스로조차 속일듯 이뤄내는 자기합리화, 그것이 그녀의 죄의식과 불안감 사이에서 위선의 형태로 계속 나타나는 것이 인상 깊었다. 그 모습을 ‘위선의 우아함’ 으로 표현한 작가의 예리한 비난도 놀라웠다.

조만간 박완서님의 소설을 더 찾아 읽고 싶어졌다. 삶이 힘에 부칠 때마다 절로 힘이 나게끔 해줄만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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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관련>

- 어른들은 이런 수지를 칭찬하고 부추기는 것만 갖고는 미안했던지 오목이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착한 것을 괴롭히는 것을 미워하는 것으로 착한 것에 대한 거룩한 의리를 지킨 것처럼 자위하려는 것 같았다.

- 수지는 자연스럽게 오목이의 손목을 놓쳤다. 혼자가 된 수지는 허둥지둥 사람 사이에 휩싸여 오목이로부터 멀어졌다. 너무 서둘다가 하마터면 고꾸라져서 어른들의 발길에 짓밟힐 뻔하기도 했다.
동생의 손목을 놓치고 따로따로가 된 지 얼마 만인지 문득 수지는 동생을 부르기 시작했다.
“수인아, 수인아.”
이미 동생과는 멀어질 대로 멀어진 뒤였지만 동생이 가까이에 있대도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다. 수인은 동생의 본명이었지만 호적에만 그렇게 올랐을 뿐, 식구들 사이에서도 그 이름으로 동생을 부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수인아, 수인아.”
수지는 거의 울상이 되어 목멘 소리로 동생을 찾아 헤맸다. 오목이란 입에 오른 호칭 대신 호적상의 이름이 왜 하필 그때 떠올랐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 이름은 황망 중 생급스럽게 떠오른 이름 같기도 하고 미리미리 계획된 용의주도한 음모의 일환 같기도 했다.
뜨거운 피가 흐르는 심장에 차가운 비수가 꽂히듯이 무참하게 간교한 지혜가 자신을 관통하는 것을 수지는 어린 마음에도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수인아, 수인아.”
수지의 목멘 목소리는 슬픈 울음으로 바뀌었지만 끝내 수인을 오목으로 바꾸어 부르진 않았다.


- 수지가 오목이 손을 놓쳤는지 놓았는지 그 한계는 모호했고 그걸 알고 싶어하는 사람도 처음부터 없었다. 수지는 자기 자신만 속여먹을 수 있으면 속 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수지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바로 자신을 속이는 일이었다. 오목이를 일부러 놓았는지 북새통에 놓쳤는지 기억나지 않는 게 사실이더라도 엄마의 참사를 보고 천벌이다라고 생각한 것은 그녀의 의식에 찍힌 죽도록 지울 수 없는 낙인이었다.
그 나이에 그토록 말똥말똥한 의식으로 그런 참사를 직시하고 천벌로서 순종할 수 있었다면, 천벌받을 짓을 저질렀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고로 수지는 오목이를 놓친 게 아니라 놓은 거였고, 어린 마음에 선악의 의식 없이 놓은 게 아니라 충분한 죄의식을 가지고 저지른 것이었다. 그건 비록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변명할 여지 없이 확실한 죄악이었다. 수지가 자신의 일곱 살을 꼭꼭 움켜쥐고 그 누구에게도 펴보이지 않으려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 “오목이 고년 잘 없어졌지. 걸리기에도 업고 가기에도 반지빠른 나이거든.”
피난통에 다섯 살이란 나이는 걸릴 수도 업을 수도 없는 애매한 나이라는 의미밖에 지니지 못한다는 데 수지는 전율했다. 그러나 곧 속으로 미소하며 편안해졌다. 자기 역시 일곱 살이 된 지 며칠 안 됐고 걸음이 시원치 않아 지금 식구들을 뒤처지게 하고 있었다. 자기 역시 할머니가 마음 한번 먹기 따라서 얼마든지 내버려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수지를 두렵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편안하게 했다. 수지는 좀 전에 혼자서 감쪽같이 저지른 나쁜 짓의 유력한 공모자를 얻은 기분이었다. 난리통의 모든 사람들은 공모자였다. 인두겁을 쓴 짐승이었다.
좋은 세상 같으면 일곱 살 먹은 계집애의 상식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걸 수지는 순식간에 쉽게 받아들였다.



- 그걸로 나의 속죄는 끝났어. 속죄는 충분했으므로 다시는 상종이 계속되지 않도록 뒤끝도 깨끗해야 돼.
수지는 마음속으로나마 처음으로 속죄를 생각한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강렬하게 원하고 있는 게 뭔지를 깨달았다. 그건 참회였다. 그녀가 두려워한 것도 다름 아닌 참회의 기회였다. 속죄했으면 그만이야. 오목이에게 참회함으로써 오목이가 얻을 건 아무것도 없잖아.​



<통찰력 보소>

- 자연히 얼굴에 분 바르고 싶고 레이스 달린 속옷이 입어보고 싶은 나이에 그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주어졌을 때 그런 것들은 참으로 하찮다. 그러나 그 나이에 그게 안 주어졌을 때, 어느 순간 일생을 망치고라도 그걸 가져보고 싶을 만큼 대단한 게 될 수도 있다.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지만 그게 하찮은 사람이 그게 그렇게 대수로운 사람에 대해 감히 무엇을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 입시날이 며칠 안 남아 마지막 채찍질에 열을 올려야 할 때, 피할 수 없는 휴일이 끼어 있다는 건 백척간두에서 잠깐 조는 것처럼 아슬아슬하고도 감미로웠다.강사들은 제각기 사흘 동안에 다 이룰 수 없는 호사스러운 휴가 계획을 공표하고 흩어졌지만 아마 낮잠이나 실컷 자고 싶다는 소망이 가장 실현 가능성 있는 계획이라는 걸 곧 체험하게 될 것이다.


- 악이란 생각보다는 돌발적인 격정이 아니라 용의주도하고 점진적인 현상이었다. 그리고 악의 한결같은 꿈은 위선이었다​


- 용케 그걸 피해왔지만 수지는 알고 있었다. 후회가 얼마나 집요한 흡인력을 갖고 있나를. 인재와의 일을 한 번 후회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의리가 있지. 수지는 가장 통속적인 의미로 쓰여지는 의리라는 말을 떠올리고 실소했다. 그녀가 의리를 지켜야 할 대상은 이미 인재가 아니라 인재와의 사이에 있었다고 믿어온 사랑에 대해서였고, 그들의 사랑을 지켜본 수많은 관객에 대해서였다.



< 표현보소 >

- 그러고 나면 마치 불이 나서 아우성치는 집 구경을 하면서 ‘우린 불탈 집이 없으니 복도 많지’ 하고 자축한 거지 떼 같은 쓸쓸한 허탈감에 빠졌다.​

- 목이는 무조건 거기 심취했다가도 느닷없이 적개심을 곤두세우곤 했다. 목이가 수지에게서 가장 싫은 게 거의 천성처럼 몸에 밴 위선의 우아함이라면 가장 먼저 빼앗아 가지고 싶은 거 역시 그것이었다

- 천장에 달린 형광등은 주인 여자가 스위치를 누르고 나서도 한참 동안이나 죽을 둥 살 둥 푸드덕대다가 간신히 켜졌다.​

- “벌써 두 번째예요. 이 얘기에 대학원은 왜 자꾸 쳐들죠?”
“그걸 몰라서 묻나요? 여자가 자신에게 불필요한 나이와 불필요한 학벌을 함께 더했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아실 텐데.”
“몰라요, 난 그런 거 몰라요.”
그걸 모른다고 해도 결코 순진해지진 않습니다.

- 졸업이란 어차피 그런 게 아닐까? 코딱지만 한 지식을 밑천으로 적당한 직장에 눌러앉아 밥벌이를 하며 그럭저럭 안락하게 살 수 있는 출발을 지나치게 영광스러워하는 거야말로 촌스러운 일이었다.

- 인재는 궁상맞고, 수지는 화려했다. 수지는 매사에 자신만만했고, 인재는 열등감이 몸에 배 있어서 무슨 일이고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인재는 값싸고 분량이 많은 음식집을 좋아했고, 수지는 비싸고 분위기 있는 집을 밝혔다. 인재는 달라는 것 없이도 불쌍해 보일 때가 있는 반면, 수지는 주는 것 없이도 남의 기를 죽일 때가 있었다.

- 그러나 특별한 인간의 출세치곤 너무도 범속했다. 특별한 인간답지 않게 그 범속한 출세에 안주할 모양이었다.

- 수지는 이렇게 자신이 주동한 일이 남의 호응을 얻고 그녀의 리더십이 인정을 받을수록 그 일의 헛됨에 문득문득 소스라치곤 했다. 때로는 자신이 벌여놓고 이룩한 성과가 마치 옆구리로 삐져나온 내장처럼 징그럽고 넌더리가 나기도 했다.

- 다녀왔습니다는 한마디로 거실을 지나치면서 수지는 수철이가 원정으로서 무엇을 지키고자 했던가를 알 것 같았다. 정절이야말로 가정의 복이요 터줏대감이었다. 그 스산한 하숙방에서 치한에게 함부로 몸을 더럽히는 오목이 따위가 도저히 끼어들 수 없을 만큼 그들의 행복은 완전했고 배타적이었다.​

- 그러나 그게 좋은 걸 어쩌란 말인가? 잘못 맛들인 쾌락처럼 도저히 그만둘 수 없는 걸 어쩌란 말인가?
따뜻한 물 속에서 그녀의 의식도 풀어진 미역 줄기처럼 제멋대로 흐느적댔다.

- 목이는 그녀를 둘러싼 곳의 완전한 무색무취에 공포와 멀미를 느꼈다. 멀미를 자각하기가 잘못이었다.

- 그녀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의 어머니가 그랬듯이 그녀 역시 자기 자식을 고아원에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피는 못 속이거든, 더군다나 더러운 피는.
그녀는 이렇게 자신에게 악랄한 냉소를 퍼부었다. 그러나 실은 자신은 쑥 빠지고 그 자신의 핏속에서 느닷없이 되살아난 어머니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시킬 속셈이었다.

- 시간을 놓칠까 봐 걱정했다.
며칠이나 더 살겠느냐고 물었더니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게 이상할 지경이라는 주치의의 대답까지 변두리 병원 의사의 말과 일치했다. 그런 환자가 겨우 쏘시개 탄 헤프게 쓸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사람이 미물보다 더 보잘것없어 보였다.


< 평론>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는 1970년대, 아니 현재의 한국사회를 떠받치는 정신적 트라우마로서의 한국전쟁의 성격을 짚고 있으며, 밝고 안정적인 이후의 삶이 죄의식의 담합 위에 세워진 것임을, 한순간 무너져내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에 의해 간신히 유지되는 것임을 잘 보여준다.
한국전쟁의 상흔을 철저한 망각의 세계에 봉인함으로써 한국사회가 참회조차 불가능한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음을 차갑게 포착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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