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곧 마흔 살, 청춘과는 이미 멀어진 나이이고 어차피 죽으면 썩어서 사라질 몸인데 난 참 쓸데없이 주저하는 일이 많구나, 회한이 밀려들었다. 그래서 발레를 배우기로 결심했다. 나이 마흔을 넘어서도 심리적 에너지 수준이 떨어지지 않으려면 어린 시절 꼭 하고 싶었던 일에 도전해보는 게 좋다는 조언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내게는 그게 발레였다.
- 미사여구나 조잡한 합리화로 눈가림을 할 수 있는 말이나 글과 달리 몸은 내가 연습한 딱 그만큼의 나를 거울처럼 그대로 보여주는데, 보기에 쉬워 보이는 것 중에 진짜로 쉬운 건 정말 많지 않은 법이다.
- 그래도 이렇게 배운 풀업을 매일 마음을 다스릴 때 써먹곤 한다. 내 존재가 아스팔트 위의 껌딱지처럼 하찮게 느껴질 때면 숨을 한 번 크게 쉬고, 어깨를 양옆으로 활짝 펴고, 아랫배를 집어넣고, 목을 위로 길게 끌어올린다. 그러면 어느 정도는 평정심이 돌아온다. 마음과 몸은 긴밀히 연결돼 있어서 몸을 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펴진다. 슬프고 화나는 날에도 꾸역꾸역 발레를 하러 가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한 시간 반 동안 풀업을 하며 몸의 중심을 바로 세우는 데 집중하다 보면 마음이 맑아진다. 마음의 감기에 걸렸을 때도 발레는 빼먹지 않았다. 덕분에 상태가 빨리 나아졌다. 물론 어떤 운동이든 꾸준하게 하면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겠지만 말이다.
- 발레에서 아름다움의 핵심은 어떤 동작이든 하나도 힘들지 않은 것처럼 해내는 것이다. 그건 우아함의 본질이도 하다. 격렬한 감정이나 견디기 힘든 고통을 꼭꼭 씹어서 소화한 뒤 한 단계 승화하는 것이다. 무대 위의 발레리나는 어떤 순간에도 배역이 아닌 무용수 자신의 불안이나 통증을 날것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 몸 안에 두 개의 힘이 팽팽한 긴장을 이루기에 발레리나들의 몸은 그저 기본자세로 서 있을 때에도 중요한 이야기가 막 시작되기 전의 ‘소란스러운 고요함’을 느끼게 하는 게 아닐까.
- “몸으로 창조하고 생산하는 활동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은 오히려 정신에 집중하다 못해 우울하게 자기 자신을 파먹지 않나요. 하지만 진짜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단순한 생의 원칙에 따라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지요. 몸이 진짜예요.”
발레를 배웠던 게 어언 10년이 다 되어가는 것 같다. 1년도 채 채우지 못하고 그만둔 발레 학원이었다만 그 기억만은 어느 운동보다도 강렬하게 남아있다. 이 책의 저자가 서두에 밝혔듯 성인 취미 발레에 도전하는자가 전혀 두렵지 않다면 그건 거짓말이지만, 그 용기로 인하여 얻게된 색다른 즐거움이 정말 매우매우 컸던 기억은 나와 똑같다. 발레를 해보지 않았어도 이 책이 그리 재미있었을까?
그시절 발레 이야기
아무튼, 발레
보고싶던 책이었는데 역시나 재미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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