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둘째날
잘잤다. 새벽에 다섯시에 샤워실소리로 한번 깬 거 빼곤- 두시간정도 더 자다가 일곱시에 알람듣고 바로 깼다. 어제 무지 졸렸던 것 치곤 일어나는건 상대적으로 수월했다.유럽은 한국보다 시차가 느려 그런지 잘때는 미친듯이 졸리지만 일어날땐 눈이 잘 떠진다. 시차란 정말 신기한 것 같단 말이지.
방 바로 옆에 붙은 샤워실에서 후딱 사워를 하고 정비를 했다. 민박이라고 방안에 샤워실이 붙어있지 않지만, 이 방은 다행히 문열면 바로 코앞이 샤워실. 뭐 좀 멀다고 하여도 그리 불편할 건 없다. 도미토리는 아니어도 어렸을 적에는 시골에서 그런 생활도 잘만 했었는데 나이 좀 들었다고 못하겠다 까탈스럽게 구는 건 내 취향은 아니다. 영훈이는 친구들끼리가 아니라 나랑 같이가면서 민박을 잡는 것에 그부분을 유달리 신경쓰는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나는 의외로 괜찮았다. 뭐, 아주 장기간이 되면 또 모르겠지만. 사실은 숙소의 시설적 불편함보다 습도나 조도가 눅눅하거나 어둑한것만 아니면 된다. 하루의 짐 챙기는 것 역시 가진게 별로 없으니 챙길 거도 별로 없어 좋았다. 역시 미니말 라이프를 해야돼.
정확히 8시 3분에 방에 노크소리가 들리고 주인장이 문밖에서 식사가 준비되었다 전해준다. 밖에 나가보니, 아담한 로비겸 식당 한켠에 큰 접시로 담는 부페식 아침식사. 메뉴는 소세지 야채볶음, 계란스크램블, 김치, 야채볶음, 찜닭(겸 국) 등. 귀여운 음식들이 마치 ‘스페인하숙’이 생각나는 듯 했다. 줄지어 접시 하나씩 들고 음식을 담은 뒤 , 삼삼오오 테이블에 앉았다. 가족단위가 많고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식사를 하였다. 아.. 근데 시간이 갈수록 옆사람과 어색하다. 인사를 하려면 처음에 했어야 했는데 타이밍도 놓쳤고, 가족들을 제외하면 나머지 사람들 역시 그닥 친한분위기는 아니다. 오늘은 여기 한국 사람들 사이에도 능청스럽게 인사를 하고 등장하는 사람이 없고, 나 역시 그리 변해가는 기분이라고 해야하나.
뒤늦게 나온 여자 한명이 갑자기 정적을 깨고 인사를 하였는데, 미어캣처럼 서로 눈치를 살피던 어색함도 잠시 , 분위기 전환이 되는 듯 싶다가도 이미 타이밍은 지나갔다. 서둘러 밥그릇을 치우고 어색한 자리를 벗어난다.
아침산책을 좀 해보려고 채비를 했다. 현재시각 8시 반. 늦어도 10시반쯤에는 돌아와서 공항으로 출발해야 예정된 1시 비행기를 무사히 탈수 있을 듯 하여, 서둘러 나와 가까운 숙소 근처라도 좀 산책하기로 했다. 어제 가져온 가장 두꺼운 옷에, 머플러를 두르고 가볍게 밖으로 나섰다.
어제와는 다른 거리풍경이었다. 어제 저녁 보았던 동네는 어둡고 황량했지만, 아침의 거리는 또 달랐다. 다만 비가 좀 부슬부슬 내리고 있어서, 아주 맑은 하늘은 볼 수 없었다. 사거리 횡단보도를 걸어서 센강쪽으로 걷기로 했다. 블럭 몇개를 지나면, 뽕삐두가 나오고, 그 너머에 센강이 있다.
2013년 뽕삐두에서 핸드폰을 소매치기 당한 적이 있다. 내 최초의 아이폰 4s. 심지어 백업도 해놓지 않아서 여행사진과 메모가 몽땅 날아갔다. 악몽같은 그날의 기억!! 오늘 이곳은 그 이후에 처음 방문하는 사건현장이다. 추억팔이라고 하면 좀 뭐하지만 그때 당시를 상기하며 같은 길을 찾아보기로 했다. 길이 비슷하여 몇번 헷갈리기도 했지만, 그 특유의 비웃는(?) 제스처가 있는 벽화를 찾아내었다. 기억하는 것과 방향은 좀 반대였지만, 뽕삐두 근처인건 사실이었고, 벽화는 여전히 그대로 있었다. 그 이후의 나는 해외여행에서의 오만함을 조금 접을 수 있는 계기는 되었었지만 아직도 그 사진이 없어진 것은 너무도 아쉽고 아쉽다.
그 트라우마로 안좋은 기억이 있는, 사실 썩 좋아하지는 않는 이 도시에만 벌써 세번째 방문이라니 참 신기한 일이다. 국제도시 파리의 위력인가.
뽕삐두 근처 시청을 지나 센강을 향해 좀 흐린 거리를 걸었다. 시청 앞에는 ‘유로자전거나라’ 같은 한국인 단체 패키지 투어도 눈에 띄었는데, 날씨가 바람이 심하여 제대로 관광이 될런지? 여기까지 온 김에 우리는 노틀담쪽이나 한번 들를까 하여 센강으로 향했는데 다리를 건널때쯤 비가 좀 많이 내리기 시작했다.
일단 쏟아지는 비를 피할겸 마그네틱을 파는 가게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제 막 연 가게는 정리가 안되어 혼잡했지만 그 와중에도 신중히 자석을 골랐다.
바게트가 그려진 자석을 사보고 싶었는데, 우연히도 그 가게에 귀여운 바게트가 그려진 자석이 있어 심사숙고끝에 요놈으로 낙찰!! 마그네틱을 고를때마다 한도시에 딱 한개의 정수를 담은 걸 골라야한다는 부담(feat 결정장애) 이 있다 ㅋㅋㅋ
가게를 나설때쯤 비가 좀 그칠줄 알았는데 왠걸 비는 더욱 심해졌고 들러보려고 했던 노틀담은 몇달 전 났던 화재 때문인지 진입로 자체가 보수공사로 차단되어있었다. 하는 수 없이 돌아나와 쏟아지는 비를 피해 가까운 카페로 들어갔다.
어차피 카페에 들를 걸 예상했기 때문에, 산책 중 가장 적절한 타이밍에 가장 어여쁜 카페에 가려고 했는데!! 급히 고르고 싶진 않았지만 비 때문에 방법이 없었다. 아니, 눈에 보이는 멀쩡한 곳에 들어갈 수 있는게 다행일 지경이었다. 그래도 선택은 나쁘지 않았다. 바깥이 투명 비닐로 비춰보이는 것 같은, 그러나 건물 안은 아닌, 반쯤 데크 테라스 같은 공간에 들어가 적당히 내리는 비도 운치있게 감상하며 에스프레소 한잔과 카푸치노 한잔을 시켰다. 바깥으로는 센강쪽으로 난 횡단보도가 잘 보였다. 가만히 앉아 사람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한 곳이었다.
커피가 나왔는데 작은 테이블에 올려진 회색 컵받침과 에스프레소 컵의 두툼한 두께가 오랜만에 진짜 유럽풍이었다. 내 오른쪽 앞에 앉은 한 남자 여행객도 우리와 똑같이 에스프레소 한잔을 시켜놓고 공책에 뭔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나도 아마 혼자 있었다면 뭔가를 썼겠지만 둘이 있으면 아무래도 혼자보단 잘 되지 않아 조금 아쉽다.
기억자로 꺾인 카페에 뒤쪽으로도 나란히 의자가 많이 놓여있었는데, 처음에는 드문드문 했던 자리가 비가오는 탓인지 금세 다 차버렸다. 느낌이 좋은 공간이라서 사진을 몇장 찍고는 문득 가져온 스케치북에 이곳의 그림을 한장 그리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여행을 앞두고 이전의 여행과 다르게 특별히 준비한 것이 다름아닌 ‘어반드로잉’이었다.
신진작가 전시회에서 펜그림 미술작품 구매를 한 시점부터 몇번 끄적여본 게 은근히 재미나서, 이번에 야심차게 작은 스케치북과 펜을 가져와본 것이다. 거리풍경을 빠르고 느낌있게 담아보려 했던 의도였으나 과연 ..!
지금 당장은 스케치북이 없으니 나중에 찍은 사진으로 한번 옮겨봐야지(라고 생각하고 비행기에서 그림그리기를 시도하다가 차마 10%도 다 그리지 못해 폭망임을 깨닫고, 그 이후로 스케치북은 한번도 꺼내지 못했다는 😭 )
야구 마지막 시즌즈음이라서, 야구중계를 실시간으로 틀어놓고 9회말을 보았다. 엘지와 두산의 경기. 여행기간중에 페넌트레이스 기간 종료일이 있고, 마지막까지 1위가 결정되지 않은 때라서, 한경기 한경기가 소중하다. 오늘도 엘지는 졌고(..!) 결과를 보고 기분좋게 카페를 나섰다.
숙소로 복귀하는 길. 비가 점점 많이 와서, 뛰는듯 걷는듯 하면서 아까 걸어온 몇블럭을 거슬러 올라갔다. 아까와 조금 떨어진 다른 골목으로 걸어 올라가다가 , 사람들이 가득한 빵집이 하나 나와서 충동적으로 입성. 작은 골목에 있는 간판도 없는 가게였지만 사람들이 줄서서 빵을 사는것을 보니 맛집이 틀림없다. 우리도 얼결에 줄을 서서 에클레어 하나와 초코빵 하나를 샀는데, 계산 직전에 크로아상이 구워진 걸 목격하고 크로아상도 추가하였다. 이런 빠리에서 크로아상도 못 먹고 갈 뻔 했잖아!
소중한 빵봉지가 젖지 않게 품에 안고 숙소로 돌아왔다. 어느새 하늘은 맑은 하늘색을 빼꼼히 보여주고 있었지만 이미 우리는 떠날 시간. 숙소에서 짐을 찾아 나왔다. 숙소 앞에 있던 한 노숙자는 어제 밤부터 몇번째 만나는 건지. 짧기도 짧은 파리에서의 1박이다. (왕복 rer값만 일인당 20유로이다 여러모로 비싼 일박 ㅋㅋㅋㅋ)
이제 다시 리스본으로 향할 시간. 샤를드골 공항 터미널 2쪽으로 나와서 비행기를 기다리는데 익숙한 기시감이 든다. 여기는, 7년전 오빠와 부모님과 프랑스여행을 와서 니스로 비행기를 갈아탈때 대기하던 곳이다. 이 구역의 사진이 남아있어 내 기억도 생생하게 보존되어있다. 롱샴 가방가게도, 그 가방가게의 진열방식도, 초콜릿 가게와 마카롱 가게와, 한칸 내려가 자리잡은 샌드위치가게까지도 그대로이다.나만 갑자기 흥분하여 추억돋는 순간. 비행기가 뜨기전에 가족들 채팅창에 추억팔이 여행중이라고 사진을 전송했다.(하지만 별다른 반응은 없다 ㅋㅋㅋ)
리스본 공항에 도착했다. 리스본 공항은 마치 우리나라 예전의 김포공항처럼 아담하기도 하고 나오는 길에 모든 이들이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치고 가까운 거리에서 확인할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요새 이렇게 면대면으로 살가운 곳을 가본적이 오랜만인듯~ 그들이 나를 알아 보지 못하여 다행이지, 만약 혹시라도 아는 얼굴을 만나야 하는 곳이었다면 그 얼굴간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어색하다 못해 민망할 것만 같은 곳이랄까. 각자의 지인들을 배웅나온 많은 눈동자들을 피해서 좌측으로 빠져나온뒤 속히 숙소를 찾을 준비를 했다. 이곳은 물가도 싸고, 우버가 특히 잘 되어있다고 하여, 비행기에서 내리기 전에 우버를 타기로 결정했었다.
일단 핸드폰에 우버등록을 하고, 우리의 숙소 ‘사나호텔’을 도착지로 예약을 잡았더니 9분 후 도착한다고 알림이 왔다. 우버 기사가 만나기로 약속하는 장소대로 영어를 해석하고 길을 찾아가며 공항을 이리저리 쏘다녔다. 그나저나 이 공항은, 포르투갈에서 자랑하는 최신식 현대식의 공항이라고 소개된 책자 내용을 읽었는데, 음.. 이들은 이정도가 아주 현대식인 정도인건가. 그저 층고가 좀 높고 에스컬레이가 좀 있다 싶은 정도였는데, ㅎㅎ 이들이 한국, 중국이나 싱가폴 공항쯤 가면 난리날듯? ㅎㅎ
우버기사가 안내한 곳은 누가 봐도, 로컬들이 이용하는 공간이었다. 이층 출발쪽 출구로 나와서 바깥으로 향해있고, 차들이 유턴으로 끊임없이 돌고 있는곳. 우리는 그 수많은 차의 행렬 중에서도 용케 우리의 우버차량을 발견했다. 우버 기사님은 또 우리를 어떻게 알아챘는지 그분이 보낸 눈빛을 받은 우리는 한쪽으로 차를 대라 손짓한 뒤 열린 트렁크에 짐 두개를 실었다. 쪼그만 차였는데, 거구의 대머리 아저씨가 내려서 깜짝 놀랐고, 그 기사는 자연스러운 듯 우리에게 포르투갈은 처음이냐며 첫 대사를 건넸다.
그동안 어떤 나라에서 처음 방문시에 처음 말을 나눠본 사람을 기억하는 일은 드문데, 과연 이사람이 처음으로 만난 포르투칼 현지인이 아니었다면 이곳도 그랬을것인가. 잘 모르겠다. 그게 아마 우버여서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과묵한 사람도 많은데 말이지. 이사람은 마치 누가 연기자로 꽂아놓은 사람인 마냥, 마치 섭외된 가이드처럼 입을 열기 시작하더니 도착하는 순간까지 정말 쉴새없이 떠들었다.
포르투갈식 영어가 섞여서 (된소리와 R발음이 굉장이 스페인어스럽게 굴러가는 느낌으로) 잘 알아듣기 힘든 와중에 , 듣다보니 그의 영어가 생각보다 매우 능수능란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대단한 건 막힘없는 말의 향연!!!
벨렝은 물론, 아줄레주 박물관의 볼것, 성당, 28번 트램, 휴관일정, 가격, 교통편, 신트라나 헤갈레이아 별장 등등 언급한 관광지만 해도 몇십개가 되었는데 심지어는 운전중에 본인의 핸드폰으로 구글링하여 사진을 보여주고, 그걸 우리 폰으로 찍으라고 들이미는 것까지 너무나 적극적이라서 일단 좀 놀랐다. 나는 그저 운전이나 좀 잘 하시면 좋겠고, 이 도시의 첫 인상을 좀 차분히 즐기고 싶었는데 과하게 방해받는 것이 막판에는 좀 힘들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포르투갈에서 많은 돈을 쓰고 가라 라는 말을 후렴구처럼 내뱉는 것이었다. "Spent money a lot a lot. "
포르투갈이 유럽국가중 경제적으로 어려운 편이라는건 듣고 왔지만, 이렇게까지 우버기사가 우리에게 대놓고 이야기할 줄은 몰랐다. 우리에게 관광지를 설명한 이유도 이곳에서 이거저거 빠짐없이 부지런히 보고(=돈도 많이쓰고) 가라는 뜻이었을까. 무엇보다 이 마음가짐이 나라를 위한 것이라는 것은 좀 인상적이었는데, 보통 경제상황이 어려운 국가의 나라의 택시 기사들은 그런 쓸데 없는 말을 하느니 택시값을 바가지를 씌워버리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그가 우리에게 일깨워준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신트라를 비롯, 많은 관광지들이 월요일에 닫으니(도착한 날은 일요일 오후 4시쯤이었다), 볼거리 많은 신트라는 휴관일을 피해 화요일에 가는 것이 좋겠고 그러니 오늘오후(일)와 내일(월) 리스본을 구경하는 것이 좋겠다는 점이었다.
보고싶던 아줄레주 박물관이 월요일에 휴관이구나 하고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에서 나아가, 벨렝의 제로니무스, 벨렝 탑 등 모든 볼거리가 단 한시간 뒤(5시)에 모두 닫는다는 걸 그제서야 알게되었다는 것이다. 호텔에 도착하여 짐을 풀기가 무섭게 벨렝으로 어서 출발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시간을 최대한 줄이기 위하여 두번째 우버를 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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