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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Book

고미숙님 두 권의 책

 

 

1.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재밌게 글을 쓰시는 분이다.

그러나 뭔가 모르게 글이 살짝 오래된 느낌이 드는건 (유행이 지난 느낌이랄까) 철지난 유머의 수사가 많기 때문인 듯 하다. 주절주절하며 끝없이 이어지는 느낌의 수사. 그녀는 연암에게 유머가 있다고 극찬하는데, 아직은 연암의 유머보다는 고미숙씨의 유머시도가 더 눈에 띈다. 개인적으로 역시 유머는 피터드러커같이 진중한 가운데 촌철살인으로 웃기는게 내 취향인듯.

그런 가운데 역시나 오랜만에 보는 좔좔 흘러넘치는 지식들, 엄선한 단어들과 비유와 유희들이 훨씬 더 반갑다. 몇달전에 “우리몸이 세계라면”을 쓴 김승섭 작가의 글을 읽으며 정중하고 잘 퇴고된 젠틀한 문장에 감탄했다면, 뿜어져나오는 그녀의 단어들은 발라당 까진 느낌이지만 에너지가 콸콸 넘치는 문장 같다. 그녀가 계속 기대하라는 연암의 유머 역시 나에게도 기대감이 잘 전달되는 걸 보면 , 느낌이 좋은듯! 

 

 

2. 읽고 쓴다는 것 ,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

글쓰기 책은 늘 흥미롭지만 생각보다 잘 집어드는 편이 아닌데 이 책은 추천자도 있었고 소제목이 흥미로워 골랐다.

읽기도 읽기지만 글을 왜 쓰는가에 대한 내용은 내가 늘 생각하는 주제이기 때문에, 그녀의 글쓰기 수업 중 왜 써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 가장 궁금했다.

문체가 여전히 정수를 잘 갈아낸 느낌의 글은 아니었지만, 어수선한 가운데서도 마음에 와닿는 이유들이 눈에 띄어서 내 마음(폰)속에 저장- ㅋㅋㅋ

무엇보다 쓰는 이유에 대해서 아주 속시원한 답변이 좋았다.


"읽기가 생명의 활동이 되려면 써야 한다. 아, 여기 또 지독한 오해가 있다. 쓰기를 읽기 다음에 두는 것이다. 읽은 다음, 아주 많이 읽은 다음에야 쓰기가 가능하다는 오해 말이다. 천만의 말씀이다. 읽기와 쓰기는 동시적이다. 읽은 다음에 쓰는 것이 아니라 쓰기 위해 읽는 것이다. 아니, 그래야 한다. 쓰기가 전제되지 않고 읽기만 한다면, 그것은 읽기조차 소외시키는 행위다. 그런 읽기는 반쪽이다. 책을 덮는 순간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린다. 그저 몇개의 구절만이 맴돌 뿐이다. 그래서 어차피 잊어버릴 거 뭣하거 읽지? 많이 읽어 봤다 다 헛거야, 라는 '북-니힐리즘'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쓰기를 전제하고 읽으면 아주 달라진다. 부디 해보시라. 쓰기는 읽기의 방향과 강/밀도를 전면적으로 바꿔 준다. 결코 니힐리즘 따위에 걸려들지 않는다. 비유하자면, 구경하는 것과 창조하는 것 사이의 차이라 할 수 있다. 구경꾼은 영원히 구경만 할 뿐이다. 창작자도 구경을 한다. 하지만 그 구경 역시 창조의 일환이다. 마찬가지로 쓰기를 염두에 두면 읽기의 과정이 절실해진다. 읽기 또한 쓰기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스승이면서 벗이고, 벗이면서 또 스승일 수 있는 관계, 배움과 가르침이 동시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관계에는 인간성의 극치가 있다고 말한다. 이 거룩한 관계의 가장 일차적이면서 근간이 되는 것은 읽기다. 저자는 책을 읽으면서 동시에 사람을 읽고 계절을 읽고 사물을 읽으면서 거룩한 기쁨에 동참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내가 읽는 책이 곧 '나' 자신임을 아는 것, 그렇게 나아가다 보면 내가 곧 세계가 되고 별이 되고 우주가 된다고 전한다.



저자는 우리 시대 교육이 읽기와 쓰기의 동시성이라는 이치를 외면하고, 쓰기를 베제한 채 읽기만 하기 때문에 말하는 자와 듣는 자가 분할되는 장벽이 심화되고 있다고 말한다. 글쓰기는 감상적 토로나 자기위안이 아니라 존재와 세계, 몸과 우주, 사랑과 우정 등, 삶의 지도에 관한 모든 것에 해당한다는 저자의 글은 글쓰기가 배움의 핵심이자 정점이라는 사실을 전한다. 쓰기를 향해 방향을 돌릴 때 우리는 삶의 창작자가 되어 자신과 더 나은 세상을 향한 혁명을 시작할 수 있다. 타자의 언어를 접속하는 읽기를 지나 자신의 마음을 뚫고 나가 변형되는 글쓰기라는 창작이 이루어질 때만이 진정한 나의 세계를 만나고 좋은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겨난다.



"글쓰기는 나처럼 제도권에서 추방당한 이들의 불가피한 선택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수행해야 할 근원적 실천이라는 것을. 인식을 바꾸고 사유를 전환하는 활동을 매일, 매순간 수행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역시 써야 한다. 쓰기를 향해 방향을 돌리면 그때 비로소 구경꾼이 아닌 생산자가 된다. 들으면 전하고, 말하면 듣고, 읽으면 쓴다! 이것은 한 사람에게 온전히 구비되어야 할 활동들이다."





"나에게는 이것이 바로 글쓰기다. 생명의 자율성과 능동성에 가장 적합한 행위다. 나한테도 좋지만 세상 모두에게 권하고 싶다. 누구든 자신의 삶을 기록하고 싶어 한다. 나아가 지혜를 원하지 않는 이는 없다. 세상의 이치를 터득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이는 더더욱 없다. 그럼 그것을 가장 잘 훈련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일가. 글쓰기다. 글쓰기는 노동이면서 활동이고 놀이이면서 사색이다.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는 담대함이 요구되지만 동시에 세상 속으로 깊이 들어가야만, 타자와 깊이 뒤섞여야만 가능하다. 원초적 본능이면서 동시에 고도의 지성을 요구한다. 이보다 더 좋은 활동이 있을까?"

 

- 존재의 변환 요구에, 나는 동의하는가? 어떻게 응할 것인가?

 

 

 

 

- 근본이 무질서인 세상, 수렴과 집중이 필요하다( 카오스에 차서를 부여하는 방법)

 

 

 

- 공부하지 않는 삶은 불가능합니다. 자기 삶의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데 어떻게 자존감이 생깁니까?

 

 

 

- 강사는 영원히 강사고, 청중은 영원히 청중이다.
쓰기를 향해 방향을 돌리면 그때 비로소 구경꾼이 아닌 생산자가 된다.

 

 

 
조지오웰의 WHY I WRITE를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다.

 

 

그나저나 옮겨쓰기 이리 귀찮아해서야 ㅋㅋㅋㅋ
(사진이나 좀 예쁘게 찍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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