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우리는 연설을 자주 한다. 누군가에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을 때 머리속에서 충분히 연습한 후 상대를 불러내서 하는 그런 연설 말이다.. 당신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선명하고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훌륭한 연설을 할 것이고, 상대는 당연히 말문이 꽉 막힐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쏟아내는 것은 모두 진리이고, 진리는 언제나 승리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절대적 진리라는 것이 원래 그렇지 않은가?
당신이 상대에게 전달하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진실'
상대가 얼마나 편협하게 자신의 주장만을 내세우고 있는지, 그 진실을 알려주고 싶은 것이다. ... 생각만해도 가슴이 뻥 뚫린다. 상대가 얄미운 시누이든, 사사건건 훼방만 놓는 직장동료이든,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고집불통 배우자이든간에, 그들의 무례함과 무지에 따른 횡포에 맞서기 위해 부드럽고 지적이고 합리적인 내가 나서야만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렇게나 길게 서두를 따온 것은,
책을 펴자마자 맨 첫 서두에 써 있던 저 글을 읽고 내가 너무 찔렸기 때문이다.
특히 저 문장 "당신이 상대에게 전달하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진실' "
아 이건 나에게 '그만좀 따져'라고 얘기하던 사람들에게 내가 늘 주장하던 이야기 아니던가.
난 따지는 게 아니라, 진실을 탐구하는 것 뿐이라고! OTL
딱 나같은 사람을 위해서, 이 책이 필요한 것이라고.
나는 정말 정독으로 이 책을 읽어줘야 했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우리는 한쪽 눈을 감고 있다. '불안'때문이다. 한번 눈 밖에 난 사람은 다시는 내 곁으로 돌아올 수 없을 것이라는 불안, 내 생각과 다른 사람들의 생각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더 큰 하나의 합일로 묶어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상대의 생각을 계속 받아주다 보면 언제나 손해는 내 몫일 것이라는 불안. 그래서 우리는 상대가 아니라 내 생각과 내 입장만 바라보는 '외눈박이'관계를 선택한다. 감고있는 한 쪽 눈을 뜨기 위해선 고통에 가까운 노력이 따른다. 그래서 우리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이라는 편안한 길을 선택한다.
모든 인간에겐 단점이 있지만 그와 동시에 장점도 있다. 우리 스스로는 선과 악이 공존하는 존재라는 것을 당연시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이중성은 용납하지 못한다. 마치 우리의 뇌는 다른 사람에게도 장점과 단점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능력이 없는 듯하다. 때로는 99개의 결점이 한개의 매력을 덮어버리기도 한다. 탁월한 인간관계는 모두 이 단 하나의 매력을 찾는데 에너지를 집중한다. 그렇게 찾아낸 매력을 상대에게 알려줌으로써, 내가 가진 단 하나의 매력을 상대가 찾을 수 있도록 돕는다. 이를 위해 99개의 결점을 모두 껴안으라는 것이 아니다. 99개의 결점을 100개로 착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한쪽 눈이 99개의 결점을 바라보고 있다면, 다른 한쪽 눈은 단 하나의 매력을 반드시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선과 악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스스로나 타인에게 뭔가를 증명하는 따위의 일은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의 에너지를 공격하거나 방어하는 데 쓰지 않고 다른 곳에 사용하기로 결심하는 순간이 바로 인류를 위해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데 한걸음 더 다가가는 그 순간이다.
한쪽 눈을 감은 인간이라는 제목은 바로 여기서 따 왔다.
우리모두 우리의 내적 평함을 위하여 상대방의 한쪽 면만을 보고, 나머지 한쪽을 애써 무시한다는 것이다.
방법을 꽤나 구체적으로 설명해주는 건 맘에 든다.
절망적인 비관주의나 허황된 낙관주의 중 어느 한 쪽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한 기업 내에는 대략 두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 중 한 부류는 현실 앞에서 쉽게 좌절하며 이렇게 말한다.
'절망적이야' 다 틀렸어'
반면에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똑같은 상황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괜찮아 좀 있으면 좋아질거야'
오래지 않아 비관주의자들은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 낙관주의자들에게 지치기 시작한다. 동시에 낙관주의자들도 비관주의자들을 '모든 사람의 진을 배놓는 투덜이 스머프 집단'이라고 비난하며 짜증을 내기 시작한다.
비관주의와 낙관주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잘못된 행동이다. 우리가 우선적으로 엮어내야 하는 이중성은 '현실'과 '희망'이다. 현실이란 고달플수록 더욱 직시해야 하는 대상일 수도 있다. 지금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서는 문제를 해결하거나 더 나은 삶을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어려운 상황일수록 정확히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언젠가는 해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스스로와 주변사람들에게 상기시켜줘야 한다.
낙관은 주로 '상황'과 연계되어 있다. 이런저런 일이 곧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 혹은 바람이다. 하지만 희망은 좀더 큰 무엇인가와 연계되어 있다. 특정한 시간에 이런저런 방식으로 일이 진행될 거라는 구애 없이, 그저 모든 것이 결과적으로는 다 잘 될 거라는 소중한 믿음이다. 혹자는 이를 신앙이라고 부르고 또 다른 사람은 보편적 믿음이라고 부른다. 가족이나 회사에 대한 믿음일 수도 있고, 과정이 오래걸리더라도 세상은 결국 더 나아지는 방향으로 진보한다는 일반적인 생각일 수도 있다.
지나치게 낙관적인 시각을 가지면 현실을 외면하게 되고, 당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상황이 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너무 간절하면 일이 그렇게 되지 않았을 때 느끼는 좌절감도 필연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특정한 결과에 대한 집착 없이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이 잘 될거라는 뿌리깊은 믿음을 가질 수 있다면 불확실성을 받아들이고 극한 상황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이 더욱 커질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맘에 들었던 부분.
무조건적인 낙관주의와 희망을 구별해준 바로 이 부분이었다. (신나서 너무 많이 옮겨썼나)
'긍정'의 다른 표현 정도로 '낙관'은 언제나 나에게 '비관'보다는 좀 더 나은 삶의 태도라고 생각해왔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다란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책에 소개된 이야기에서 전쟁포로로 잡힌 사람들 중 '낙관파'와 '비관파' 중 생존률을 살펴보니 '낙관파'가 더 낮았다는 에피소드 역시 충격적이었다. 이유는 어쩌면 당연했다. 줄곧 어떤 나은 상황을 기대하는 낙관파가 바뀌지 않는 현실에 대해 어느순간엔 받아들이지 못하고 삶을 포기해버린다는 것.
그래서 저 위에 책에서도 저렇게 상세히 설명해주고 있는 거겠지, 신앙이나 보편적 믿음이나 선한 방향으로의 의지같은, '흔들리지 않고 오랜동안 사람을 지탱해줄 수 있는 희망'에 대해서.
야구장에 가면 한 9회 초에 13대 2 (나 응원팀이 2점) 정도의 점수차에서
홈런이 아니라 안타를 외치라고 말하는 응원단장을 보는 그런 마음.
도대체 저 점수차를 극복한다는 걸 실제로 기대하는 거냐. 말이나 되는 소리를 해라. 라고 말하는 내 마음 말이다.
물론 야구는 야구일 뿐이고, 어떤 생존이나 나의 삶의 이익에 직결된 문제는 아니라서 그만큼 절박하지 않아서 그럴다 할지 몰라도 그래도 지나치게 희망적인 것은 흔히들 말하는 '희망고문'의 결과로 빠지는 게 더 일반적이지 않은가. 라는 생각.
나는 비교적 낙관적이라고 생각해왔지만, 그래도 포기는 빠른 편이어서.
나이가 들수록 염세적인 시선이 자라는 것도 분명 맞는 것 같다.
'이 일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는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모든 것이 잘 될 터이니, 지금의 현실을 똑바로 바라볼 의향이 있다'
어쨌든 요 태도, 참으로 의연하다. 본받고 싶네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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