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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Book

세상이 가둔 천재, 페렐만

# 천재 이야기
천재들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뭘까? 말도 안되는 통쾌한 결과 내지는 복수. 거기서 오는 대리만족. 현실에서 실현 불가능하기 때문에 더욱 열광하는 판타지.
픽션만큼 허구도 아니고 논픽션만큼 현실적이지도 않은, 적당히 짬뽕된 리얼판타지.

그 오래된 전형적인 욕구를 찾아서 책을 집어 들었다면, 이 책은 그걸 만족시켜주진 못했다고 봐야한다.



실제 페렐만을 만난 것도 아니다. (그레고리 페렐만은 1966년생. 그는 현재 멀쩡히 살아있지만 세상과 아무런 인터뷰도 하지 않는다. 이 책은 작가가 페렐만의 가까운 이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그 이야기를 엮어서 써놓은 일종의 위인전이다. )

작가의 시선이 페렐만의 족적을 남기는 것에 가까운 이 책은, 사실의 나열. 건조하다면 참으로 건조한 책이다.
어느순간 다 읽기위해 책장을 넘기는 날 발견했다. 도서실에 한도가 꽉차서. 어서 반납했어야 했기 때문에. 하기 싫은 걸 꾹참고 하는 것도 미덕이다만 현재 나에게 이런 시간은 결코 미덕은 아닐 터였다. 몇 장을 몇 챕터를 넘겨도 몇명의 이야기만 빠질 뿐 크게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물론 페렐만 성격의 일부분은 볼수 없었겠지만.

난 나열된 무미건조 부연을 굳이 읽으면서 그 페렐만의 특이한 성격들을 하나씩 건져내고 있었다.
작가가 발견한 페렐만의 특이한 성격1,2,3 을 써놓고 예시와 함께 공들여 배열했다면
나는 그 배열한 1,2,3을 역순으로 찾아내는 그런 느낌.



그런데 그렇게 꾸역꾸역 마지막 장을 넘기고, 리뷰하기 위해 다시한번 죽 훑어보며 몇개의 문장을 옮기는 과정에서 문득. 책속의 페렐만의 '진지하지만 재미없는 천재의 미덕'이 갑작스레 튀어나왔다. 

책의 상단에 PERFECT RIGOR 라는 말이 써 있다. 이걸 해석하자면 '완벽한 엄격함'정도 되겠다.
아주 뻔하고 아주 정직하고 아주 원칙적인 그는
일탈, 자유로움, 창의적 이라는 이시대의 트렌드적 가치는 하나도 갖고 있지 않았지만 
이른바 '천성적이고 압도적인 선함을 가진 자' 무게감을 주었다.



* 다른 아이들의 삶은 학교생활과 여가로 양분된 반면, 페렐만의 삶은 방해없이 몰입하여 문제를 푸는 시간과 나머지 시간으로 양분되었다.

* 상은 여기까지였지만, 여러 해동안 외곬으로 훈련에 매진한 페렐만에게 주어진 진짜 보상은 무시험 대학입학이었다. 그에게는 이것이 더 중요했다. 왜냐하면 대학 입학은 다시 5년동안 혼자 지낼 권리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 그런 아이가 매년 입학합니다. 특이하게도 그들은 예외적일 정도로 겸손했습니다. 자만심 따위는 전혀 없었지요. 나는 그것이 미래에 특별한 인물이 되기 위한 필요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골로바노프 같은 아이들도 봤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수학에서 탁월한 업적을 이뤘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어요. 그들은 대학교수의 수준에서 멈춥니다. 그 수준을 넘어서는 아이들은 성품이 달라요.

* 알렉산드로프는 페렐만과 마찬가지로 불신 유전자가 없는 인간이었다. 그는 거부하고 저항하고 심지어 증오하는 능력이 있었지만 불신하는 능력은 없었다.

* 이 일화에서 페렐만의 핵심적인 특징 두 가지가 드러난다. 첫째, 루크신의 말마따나 "그 아이는 심지어 시간을 아끼는 것이 중요한 상황에서도 미친 것처럼 정직했습니다"."미친 것처럼 정직했다"라는 표현은 훌륭하다. 그 표현은 체질적으로 거짓말을 못할 뿐더러 불완전한 참말도(아는 것을 말하지 않는것도 일종의 거짓말이라는 바) 못하는 인물을 떠올리게 만든다.
페렐만을 화제로 삼아 나와 대화한 모든 사람들은 그의 확실한 특징으로 다음을 꼽았다 그는 레몬(영어 lemon에는 불량품이라는 뜻이 있다)을 만드는 일이 없었다. 결코 없었다. 단 한번도... 그의 정신은 그 정도로 정확했다. 그는 거짓말을 할 능력이 없을 뿐더러, 정직한 실수를 할 능력마저 없었다.



단조로울만큼 깨끗하게 비우고 온전히 채우는 시간을 가진 사람.
방해없이 몰입하는 시간과, 조금 방해받는 시간으로 양분되는 시간개념이란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자기가 규정한 기준 중 제1원칙이 정직이었고, 미친 것처럼 정직하여, 불신할 능력마저 없는 사람.


더 보자.


* 어느 제자는 알렉산드로프의 사무실로 들어가자마자 이런 대화를 나눴다고 회고했다.
"그래 증명했나?" 알렉산드로프가 물었다.
"예? 뭘요?"
"아무 거나 말일세"


* 그들(페렐만의 제자들)의 대단한 성취와 수학 캠프에 참석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증명되는 배움의 욕구에도 불구하고, 페렐만은 그들이 게으름을 피운다고 의심했을까? 그랬을 가능성이 있다. " 그 친구는 학생들이 충분히 진지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 분명합니다"라고 골로바노프는 말했다. "또는 그 친구가 워낙 고귀한 신분이다 보니까 학생들이 충분히 똑똑하지 않다는 점을 헤아리지 못한 것일수도 있지요. 아무튼 그 학생들이 나중에 크게 성공한 걸 보면, 그들은 충분히 똑똑했습니다."


* 그(페렐만)가 여기에 있을 때 쓴 어느 논문은 매우 짧았습니다. 힘과 거만함이 뒤섞인 논문이었는데, 매우 인상적이었지요. 나는 그 논문을 읽고 크게 감탄했습니다. 하지만 논문이 너무 간결하달까, 통찰들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다는 느낌이 약간 들었습니다.

천재성은 뚜렷했다. 
해결능력이 매우 뛰어나 본인의 머릿속으로 너무나 간결하게 정리가 되었기 때문에, 지저분한 설명따위는 필요없었다. 자신의 생각의 흐름만큼이나 남들도 머릿속으로 사고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했고, 남에게도 엄격한 기준을 적용했다. 게다가 책 말미에 나오지만 페렐만은 아스퍼거 증후군이라는 일종의 자폐증을 앓고 있었는데 '타인의 생각과 감각과 경험이 자신의 것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상상할 능력이 없는' 병이었다.말하자면, 자신이 이해하는 바 설명하는 바를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데, 도대체 왜 이해하지 못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병을 앓아도 이정도 자폐증은 되어야 그렇게 고고한 수학자에 걸맞는 풍모가 나온다 하면 지나친 비약인가. 웃길지 모르겠지만 그 성격에 너무 어울리는 병이 아닐 수 없다.



# 그 외

* 100만달러가 걸린 세계 7대 난제 중 하나를 풀어낸 수학자, 상금을 받지 않고 잠적한 이유는?
이 부분이 독자의 구미를 당기는 메인 문구였는데, 사실 책의 거의 막바지가 되서는 그런 문제를 있었는지 기억도 하지 못할 정도로, 중요한 일이 아니게 되었다. 거듭되는 이야기를 통해 그의 성격을 알아갈수록 상금은 그의 기준에 전혀 아무런 어필도 하지 못하는 허식 이상이하도 아니라는 걸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 러시아 수학자 페렐만은 유대인이었다. 작가는 유대인과 러시아 학계의 관계에 대해서도 여러모로 분석적인 이야기를 했지만 배경지식이 짧은 나로서는 그저 넘기는 수밖에. 더불어 푸앵카레 추측을 정말이지 쉽~게 풀어서 설명해줬는데도 (아마 3세 유아용 정도로 설명해놓은 것 같다) 하지만 난 문제조차도 이해하지 못했다. 조금의 배경지식이 책에 대한 몰입도를 얼마나 높였을 지 생각하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 그리고 좋았던 문장들

* 그는 나에게 총애하는 학생을 갖는 것, 또는 총애를 받는 학생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했다. 인간관계가 늘 그렇듯이 사랑은 몰입을 낳고, 몰입은 투자를 낳고, 투자는 다시 몰입을 강화하고 때로는 사랑까지 강화한다.

* 페렐만과 푸엥카레 추측 사이의 관계는 절정에 도달해 있었다. 만약에 푸앵카레 추측이 사람이라면, 이 시기는 페렐만이 푸앵카레 추측과 결혼하기로 결심한 때였다고 할 수 있다.




세상이가둔천재페렐만
카테고리 과학 > 교양과학
지은이 마샤 게센 (세종서적,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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