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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Book

커피우유와 소보로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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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수준에 적절하다. 손에서 놓을 수 없을만큼 흥미진진하고, 화해로 넘어가는 감동에 엄마미소를 짓고, 남아있는 책장이 아깝다면 그건 나와 싱크로가  맞다는 거 아닌가.

곧 책을 읽을만한 나이의 아이를 안다면 기꺼이 사다가 선물해주고 싶을만큼,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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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사실 난 이런 이야기를 좋아했다. 정의롭고, 의연한 주인공들이 나오는 이야기.
그래서 티비는 많이 안 보면서도 그렇게 '청소년드라마'들은 꼭 챙겨본 것 같다. 
영웅같은 '멋진' 녀석들은 나에게 싸움을 잘하거나, 멋있게 잘 생겼거나, 운동을 잘 하거나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희생'적이면서 '어른'스런 녀석이 나에게는 주인공이었다. 

 '선善'을 향한 약간은 비현실적일 수 있는 이상적 전개가 나의 꿈의 스토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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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와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

[하지만 그 순간 샘은 자기도 모르게 귀를 틀어막고 말았다. 꽝 하고 폭죽이 터지는 소리아 쉬익 하면서 날아가는 소리가 좀체 그치지를 않았다. 주변이 온통 빨간색과 초록색, 파란색으로 번쩍거리자 무언지 모르게 불안감이 일었다. 마치 폭죽이 자기를 향해 똑바로 날아오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샘은 집 안으로 날아든 돌멩이와 불에 타 버린 곰 인형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다가, 엄마가 지금 불꽃놀이에 대해 묻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곧 입을 다물어버렸다. 엄마는 왜 그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못하게 할까? 지금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잠을 자라고 하는 거지?

...샘은 엄마와 아빠를 깨우려고 했다. 그런데 입을 열어 불이 났나고 외치려 할 때마다, 누군가가 커다란 집게손가락을 샘의 입에 갖다 대며 말을 막았다. ... 그 아저씨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더니 집게손가락을 입에 갖다대고는 다시 제 갈길을 갔다. 경찰 역시 귀찮다는 듯 고개를 흔들다가 집게손가락을 입에 갖다 댔다...

샘은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엄마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샘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샘이 꿈 이야기를 하려고 하자, 엄마가 고개를 흔들며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댔다. "샘, 내일 아침에 이야기하자꾸나.지금은 잠을 좀 자도록 해봐." ]

여기 나온 '손가락을 입에 갖다대는 꿈'은 내게 굉장히 뚜렷한 인상을 남겼다. '왜 버젓히 다들 알고 있는 일을 마치 없는 것처럼 하는가?' 라는 질문은 의례히 넘겨왔던 사안에 대한 아이들의 습격과 같은 질문이다. 

흔히 창조성을 이야기할 때도 아이의 눈으로 왜라는 질문을 던져보라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적당히 굳어지는 모든 것들을 뿌리채 뒤흔들 말랑말랑한 관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상처를 받는 현실은 적당히 굳지 않으면 매번 너무 아플 것이기 때문에 트라우마가 생겨버린 아이는 적당히 역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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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

[나중에 샘은 이 장난이 예전부터 내려오던 놀이라는 것과, 그들이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샘의 마음이 아무렇지 않다는 것은 아니었다.
보리스의 편을 드는 아이들은 정작 절반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은 그냥 멀뚱멀뚱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그 놀이가 시작되면 피트는 뭔가 급하게 찾을 게 있다는 듯이 체육복을 뒤지기 시작하고, 클라우스는 사샤와 아주 중요한 문제를 지금 당장 토론해야한다는 듯이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늘 그런 식이었다.
피트나 다른 아이들은 모두 좋은 친구들이었다. 하지만 샘은 아이들이 보리스가 나가고 난 뒤에야 그런 말을 하지말고, 단 한번, 정말이지 단 한번만이라도 보리스가 자신 앞에 있을 때 그 말을 해 주기를 바랐다. ]


[보리스가 다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보리스가 길게 이야기하도록 그냥 내버려두었다. 그러더니 창문 쪽으로 가서 몸을 바깥으로 숙였다. 선생님이 몸을 다시 일으켰을 때는, 손에 커다란 돌멩이 하나가 들려 있었다. 선생님은 보리스에게 다가가서 손바닥에 돌멩이를 쥐어 주었다.
"지금 일자리나 집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야. 유치원 자리를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고. 네 아빠나 이모의 입장은 나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지금 우리는 돌멩이 이야기를 하고 있어. 사람을 향해 던진 돌멩이 이야기를. ]

거창한 것이 아니라, 묻어가지 않는 것. 방관자가 되지 않는 것이 용기다. (조용히 묵언하던 사람이 의견을 드러내는) 시작은 미약하지만, 결과는 창대한 것이 바로 중간자의 미덕. 아무리 많은 수의 무리 속에서라도 자신의 역할이 분명히 있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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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지사지

[보리스는 어색하고 당황스런 마음에 비스킷을 자꾸 집에 먹으면서도 호기심이 일어서 집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거실은 자기네 집과 거의 비슷했다.... 보리스가 집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는 것을 못마땅하게 지켜보던 샘이 갑자기 말을 걸었다.

"뭐 특별히 찾는 거라도 있어? 옷장속에 뭐가 들어 있나 한번 볼래?"
이미 발개져 있던 보리스의 얼굴이 이 말에 한층 더 새빨갛게 물들었다.

"우리집이랑 비슷하네. 그러니까 내 말은.."
"그럼 우리집이 어떨 거라고 상상했는데?
글쎄, 정말 무슨 상상을 했던가? 아프리카인들의 원시적인 모습을 담은 가면이 있을 거라고. 이상한 약초 냄새가 풍길 거라고. 샘 엄마가 독일어를 할 줄 모를 거라고? 보리스는 그동안 자기가 무슨 상상을 해 왔는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



[샘이 악보를 내밀었다. 하지만 보리스는 유리창 앞에 서서 비닐을 보느라고 이 소리를 듣지 못했다.
"너 그날 여기 서 있었어?
보리스가 조용히 물었다. 샘이 고개를 끄덕였다. " 응 창문 바로 앞에"
"그 때 무슨 일이 벌어졌어?"
샘은 그 사건에 대해 하필이면 보리스와 이야기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지난 며칠동안 누군가가 그 일을 물어주길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모두들 다친 손을 걱정하면서 아주 친절하게 대하기는 했지만, 아무도 그 사건 자체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묻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그래서 뭐?"
"내 말은, 네가 날 봤을 때 무슨 생각을 했냐고"
"아무 생각도 안 했어. 다른 사람들도 모두 너처럼 서서 보고 있었잖아. "
"하지만 내가 그 때 뭔가 했어야 하지 않을까? 아무거라도.... 여기서 보니까 모든 게 무척 다르게 느껴져"
샘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


이런 문제에 접근하는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 그것은 반대 이의 입장에 서보는 것이다. 작가는 티가 날 정도로 뻔한 구도로 역지사지의 모양새를 만들어 이야기를 풀어낸다. 하지만 아이의 시선에서 쓰여진 이야기므로 상황은 인위적이지 않다. 세련되지 않은 방법으로 이야기한다 하더라도 독자는 너그럽다.

어른이 되어서 (다 알것 같지만, 여전히 알지 못하는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른이니까 민망해서 물어보지 못하는 어른 말이다) 이제는 물어볼 수도 없고, 겪어볼 수도 없는 적나라한 상대편 입장 되보기. 
'어른을 위한 동화'라는 말 흔히들 쓰지만 한번도 딱히 공감 못했었던 내게 이 책이야 말로 그런 말을 쓰는 이유를 알 것 같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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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난 감상을 쓰면서 발췌만 많은 것만큼 재미없는 것도 없는데, 읽다가 맘에 드는 부분을 발견할때면 한장너머 한장씩 접고 있는 날 어쩔 수가 없다. 첫술의 오롯한 감동은 원문 그대로에서만 느껴지니까. 내가 나중에 이 책을 다시 보지 못한다고 해도 한두번씩 이 글을 다시 읽어볼 때마다 그 감동이 살아나기에는 또 발췌만한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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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보니 또 독일이네.

커피우유와소보로빵
카테고리 소설 > 독일소설
지은이 카롤린 필립스 (푸른숲,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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