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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Book

동양기행

동양의 느낌이란게 원래 음울한 느낌인지. 세상의 바닥을 치는 느낌인지. 그저 컨셉을 그리 잡았을 뿐인건지 그것에 대해서 확실히 해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작자가 이렇게 굳이 불편하고 그로테스크한 시선으로 사진을 찍고 글을 쓰는 이유는 대상이 '동양'이기 때문일까 '일본인 특유의 변태적 취향'때문일까.


궁극의 문장이라는게 있다면, 여행서적은 분명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지나치게 무거우면 오히려 흠이 되는게 이 분야의 책이니 말이다. 그렇지만 그런 흠에 반응하는 사람들은, 고운 표지에 홀려 선뜻 집어든 이 책을 다만 30초만 훑어보아도 다시 곱게 내려놓을 것이 분명하다. 꽤나 사람 불편하게 하는 사진이 그득하기 때문이다.


불편하긴 하지만, 이 사람의 글은 분명 어떤 부분에서의 고점을 찍고 있다. '성찰'이라고 하기엔 조금 표면적이고 '자극적'이라고 하기에는 진중하다. '인생에 대한 관조적 자세'정도라면 그나마 가장 가까울까.  출판사에서는 이 책을 두고 '삶과 죽음, 성聖과 속俗이 격렬히 교차하는 402일간의 여행기'란 제목을 붙였다. 매우 적절하다.


여정에서의 세부적인 묘사는 굉장히 훌륭했다. 사실 (여행기에 온갖 공을 들이는) 나의 요즘 글쓰기의 초점이 '묘사'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흥미롭게 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흐르는 감상을 잡아채는 능력이 대단했다. 표현력이 과하면 독자는 불편하지만, 연구자는 신이 난다.



▲ 집시 무리 사진중에 있던 한 분. 꽤나 전형적인 '집시'의 모양을 하고 있는 게 인상적이어서 찍었으나, 볼수록 그의 눈빛이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 같아서 더 좋았다.




흑해가 보고 싶었다. 여행초부터 늘 그렇게 생각했다....
흑해로 불리는 대륙의 내해가 그 이름처럼 검은 빛깔을 띠고 있을지에 대해 구애받기 시작했다. 만일 그 바다가 다른 바다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색을 보여준다면 흑해항로를 선택한 나의 수고가 무의미하게 끝나버릴 것만 같았다. 그런 초조함 때문인지 보스포루스 해협을 빠져나온 배가 하루라도 빨리 흑해에 들어서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이 기다림은 나 혼자 내기를 하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었다. 어둑어둑한 선실의 침대에 누워 단조로운 엔진소리를 들으면서 흑해의 물이 과연 검게 빛날 것인지 어떨지를 알아맞히는 퀴즈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퀴즈에 불과했던 이 궁금증이 차차 도박으로 변질되었고, 이 도박의 결과에 따라 나의 기나긴 여행의 길흉이 정해지는 것으로 여기기에 이르렀다. .... 꽤 오랫동안 잠에 취했던 것 같다. 이미 배는 흑해를 항해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코트를 입고 선실문을 열고 철계단을 올라간다. 그리고 외벽의 두터운 철문을 열었다. 얼어붙은 바닷바람이 분다. 바다의 소리와 파도냄새가 몰려왔다. 바닷바람 너머 바다를 바라보았다. 수평선이 천천히 뒹굴고 있다. 눈은 멈춘뒤였다. 검은 수평선이 보였다. 검은 바다가 보였다. ....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닌데 그 바다를 내려다보면서 기쁨을 주체할 수 없는 어린아이가 되었다. 몸이 점점 뜨거워졌다. 이 온기가 식어버리기 전에 '흑해의 물은 검다'라고 누군가에게 전보라도 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어느 먼 곳에서 이런 내용이 적힌 전보를 받아본 사람은 이 쓸데없는 전문을 통해 비밀스런 분위기를 감지하고 뭔가 색다른 탐험을 그리워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 다음달 터키여행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 이스탄불과 앙카라 등에 꽤 많은 부분을 할애한 이 책을 고른 이유이기도 했다. 위 글은 왜 꼭 그 나라를 여행지로 골랐냐는 질문에 (난 이 질문에 굉장히 민감하다. 모든 행동에 원인을 대야 할것만 같은 강박이 있다.) 대답할 수 있는 글이라고 생각했다. 한낱 작은 생각이 도박같이 변질되는 게 나뿐만이 아닌 걸 알게 된 지금, 더 많은 곳을 이유없이 다닐 수 있는 무기를 얻은 것 같다.



이스탄불, 캘거타, 싱가포르, 홍콩,혹은 도쿄나 로스엔젤레스라고 해도 오렌지껍질과 돼지머리가 버려지는 것은 동일하다. 단지 어떤 곳에서는 거리 안 쪽에 뿌려져 격리되고, 다른 곳에서는 거리를 지나가는 행인들 앞에 멋대로 내던져지는 것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동양인들의 삶은 개인적인 생활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의 삶은 길가에 버려져 있다. 집집마다 대문이 열려 있다. 개인적이어야 할 공간이 사람들 면전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8년전 캘거타를 방문했을 때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어느 가정집을 지나가다가 출산장면을 목격한 적도 있다.
웃음이 터질 것만 같다. 나는 그래서 동양을 사랑한다. 몇 년 전부터 나와 똑같은 혈액이 물결치는 동양의 자태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분명하게 바라보고 싶다는 열망에 휩싸였다. 좋아하는 부분만 선택하는 게 아니라 모든 장면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바라볼 것. 선악과 아름다움과 추함이 뒤섞여 있는 그 거리에 세계가 있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바라볼 뿐이었다.





동양기행의 답은 이것이었다. 굳이 오렌지껍질과 돼지머리를 들추던 그의 행동도 이것 때문이었다. 아름다움과 추함이 뒤섞인 세상은 알면 알수록 성스럽고 속스럽다. 이건 출판사에서 그의 기행문에 붙여준 소개와도 같다. 그 聖과 俗 사이에서 소소한 행복을 찾는 것이 결국은 인생이 아닐까 하고, 20대의 10년을 보낸 지금 조심스레 생각한다.


동양기행.1
카테고리 여행/기행 > 기행(나라별)
지은이 후지와라 신야 (청어람미디어,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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