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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국내여행

태교여행 2 - 경주

창문밖 호수가 희끄무레 밝아서 동이 터오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밤새 뒤척였다. 극적인 동틈은 없어도 호수 물안개 피어오르는데 붉은 빛이 예쁠 것 같았는데 왠걸. 붉은빛은 전혀없고 그냥 차츰 밝아지기. 여긴 서향인가보다.

8시가 되기전 눈을 떠서 핸드폰을 보며 좀 뒤척이다가 창밖 사진을 찍고 싶은 마음에 벌떡 일어났다. 얼굴에 대충 물칠을 하고 정신을 차리려고 차가운 스킨을 바른 뒤 겉옷까지 들춰입고 추울까 스카프도 하나 단디 하고 야심차게 창문을 열고 베란다에 앉았는데 사진 두세장 찍다가 푸드덕거리고 날아든 비둘기에 뒷걸음질로 도망치고 말았다. 아니 내가 새를 평소 무서워하는 건 아닌데 그 자그마한 베란다 네모칸 안에 비둘기가 서너마리씩 달려드니 퇴로도 없고 싸우기가 어렵네. 계속 푸드덕 거리는 공격적인 날개짓에 위생을 떠나서 제집마냥 날 방안으로 내쫒고 베란다에 들어붙어 앉아 난간은 물론이요, 밖에 내논 의자고 책까지 밟고 다니는 통에 만세. 하는 수 없이 방 창문을 열고 방충망까지 열고 안에 의자에 앉았다. 시야는 좀 좁아졌지만 그래도 고요한 분위기와 아침의 차가운 공기. 산책길의 두런두런 사람들 소리. 피아노 방송 소리.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까지 아침의 소리를 듣는다.

건너편 보문호수 서쪽편에는 봄철에 벚꽃이 만발한다는데, 90년만에 일찍 개화한 벚꽃 때문에 이번 여행엔 아쉽게 그 광경을 볼순 없을 듯하다. 원래 이 리조트의 벚꽃 성수기(이동네만 있는 특별난 성수기)가 지난주여서 조금 졌어도 아쉬운대로 감상할 수 있나 했더니. 리조트도 지난주 숙박객에게 돈받기 어려웠을듯?

마치 필터를 씌워놓은듯 약간 뿌옇게 그러나 곱게 건너편 산이 망막에 와 맺힌다. 산세가 수려한 그런 느낌은 아니지만 넓은 호수가 확실히 기분을 탁 풀어준다. 둥글고 귀여운 산은 거의 비슷한 높이로 연달아 솟아있는데 능이 많은 이곳 경주의 특성과 비슷한가. 둥근 산들 사이에 녹색들이 제각각 뽐내며 점점히 박혀있다. 원래 산의 짙푸른 녹색 사이 올봄 새로 돋은 선명한 녹색들이 눈에 띈다. 그리고 고요한 호수가 참 좋다. 바다는 시끄러운데 호수는 고요해서 좋다. 보문호수는 물도 청명해보이고, 어제 산책길은 데크 바로 근처 잔디까지 물이 찰랑대는 통에 마치 플리트비체를 걷는 기분마저 들었다. (이런종류의 호수의 최고봉은 플리트비체로 통일)

한편으론 이런 여행지의 아침마다 시간을 쪼개어 풍경을 감상하고 있노라면 어쩔 줄 몰라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핸드폰을 들어 연상되는 감정의 단어라도 메모를 해야하나 편안하게 발 걸치고 책을 읽어야 하나(허나 막상 집중도 잘 안된다) 사진을 찍어야 하나 동영상을 찍나 인스타를 하나 그저 감상에 집중해야하나. 다른 사람들은 이런 좋은 뷰를 보면서 무슨 생각들을 하나요? 궁금합니다.

책은 그저 지루함을 달래는 수단이다. 진짜 어떤 순간에는 보거나 듣거나 관찰하거나 찍거나 적거나 그런 것들만으로 시간이 부족하다. 책보지 않아도 죄책감은 버려. 행복감을 느끼는게 목적이 아니라 행복감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느꼈다는 경험과 사진을 남기는 것이 나의 목적이 아닌가 잠시 되돌아본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줄줄 핸드폰만 적고있겠어?

슬슬 9시가 넘어간다. 아침 먹으러 가야지.

뚝배기는 바다의 맛. 전복죽은 고소한 맛. 김싸먹는 오징어젓갈은 정갈한 맛. 적절한 보양식으로 태교여행 맛좀 내고.

일반 벚꽃이 지고 난 뒤에도, 경주에 남아있다는 겹벚꽃과 왕벚꽃

오늘 아침은 보문호수 산책길을 오른쪽 방향으로 걸어 라한셀렉트까지(구 현대호텔) 다녀오며 지난 경주 추억팔이를 했다. 2010년 9월, 2016년 4월에 각각 왔었구나.

사실 이번 숙소를 보문호수쪽으로 잡은 가장 큰 이유가 이 산책로였다. 아침에 산책하기가 목표였는데 그것은 충분히 이룬 듯? 돌아보니 어제 밤이 더 낭만지고 좋았는데, 이미 시간이 조용한 새벽 산책이 아니어 그런가 좀 이미 볕이 플랫해졌다.

방에 들어와 정비를 좀 한뒤 다시 나가기로 했다. 아침산책으로 이미 2키로쯤 걸었나. 벌써 나른해진다. 초코쿠키를 좀 까먹고 기력을 회복한뒤 차를 타고 나갔다. 첫 목적지는 양동마을

양동마을은 지난번 뚜벅이로 왔을 때는 멀어서 못 들렀던 곳이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이라지만 뭔가 민속촌 같고 내키지 않았었던 기억. 도착했는데 너무 외진데다 사람도 차도 너무 없고, 입구도 멀찌감치 인적이 드물어 보인다. 이거 잘못 왔나 싶은 쎄한 예감. 매표하고 들어가니 지도를 한장 주는데 마을을 둘러보는 가장 긴 코스는 두시간 코스란다. 와 이거 본격적이네.

일단 안에가 한눈에 봐도 널찍하니 커보였다. 곧이어 깨달은 것은 이곳이 진짜 마을 이라는 것. 현재 진행형인.

민속촌이나 촬영장 같은 곳은 아무리 그럴싸해도 전부 세트장인데. 여긴 다 오래전부터 실제로 있었다는 것이 가장 놀라웠고 마을이 정말 잘 보존되어 있어 두번 놀랐다. 마을 입구가 외져서 그런지 전시에도 큰 타격이 없었던 것 같다. 생각해보니 세계 유산이라는데 이정도 마을 규모는 되어야 마을의 형태를 짐작가능하고 그래야 역사적 유산으로 의미가 있을듯 싶기도 했다. 큰게 당연할듯.

임진왜란 이전 시기에 지은 고택도 네채나 있다는데 오랜 역사도 역사지만 마을길. 배수 시설. 하촌. 내촌 집을 둘러싼 길. 집 대문 앞으로 난 현관격의 길. 고저 등 마을의 구성이 아기자기를 넘어서 짜임새가 있었다. 마치 프로도의 고향 샤이어처럼. 이런 곳을 보고 가면 절로 영감이 생겨 새로운 마을을 짓고 싶은 기분이 들 것 같았다. (심시티 심팜 마을 버전) 평지가 아니라 산자락과 계곡마다 집들이 들어차 있어 더 특이함.

손씨종가 앞마당

고택들은 다 마을 끝자락 언덕 위에 위치하여 마을을 내려다보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이 마을의 끝판왕인 손씨종가에는 향나무 포스가 어마어마했다.

꽤 오래 둘러보았다. 중간에 덥고 다리 아파 지름길로 질러 돌아오려고 몇번 했지만 조군 독려하에 결국 크게 다 돌았음. ㅋㅋㅋ 첨에 두시간코스 보고 질겁했는데 우리 나올때 쉬지도 않고 걸어서 한시간 반 넘었다. 그래도 보고나니 뿌듯하긴 하군. 역시 난 독려자가 필요해.

따뜻한 콩국 1번 : 검은깨, 검은콩, 꿀, 찹쌀도너츠;

뿌듯함을 이끌고 점심 먹으러 맛집'옛날원조콩국'으로. 따뜻한 콩국을 시키고 콩국수도 하나 나눠먹었다. 콩국은 처음 맛보는 맛. 아침에 먹으면 든든하겠다. 중국에서 먹는 음식 같기도 하고, 근데 이거 간단하지만 맛있고 괜찮은데?

디저트로 카페에서 첨성대 말차라떼를 하나 뽀개고 인증샷도 남기고

미추왕릉

대릉원과 첨성대도 둘러보았다. 두군데는 워낙 유명하고 몇번 간곳이라 설렘은 없었지만 그래도 귀여움은 여전하다. 나이가 들수록 귀여운게 좋아져... 대릉원은 여전히 산뜻하고 첨성대는 귀여웁다.

그냥 길거리에도 이렇게 사랑스러운 풍경들이 많으니 경주라는 도시를 아니 사랑할 수가 없음 ❤️

해 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이대로 아쉬우니 한군데만 더 들러볼까 주변을 탐색했다. 역시 전에 못 봤던 분황사 석탑을 보려고 분황사 주차장까지 왔는데 정작 이곳의 포인트는 석탑이 아니라 청보리밭이라는데? (분황사는 심지어 닫았음)

지는 해의 멱살을 붙잡고 수많은 셀카와 인물사진을 남겼다. 푸른보리밭 사랑합니다. 억새나 핑크뮬리 유채꽃보다 훨씬 예쁨. 하얗게 불태웠다. ㅋㅋㅋㅋ

내친김에 월정교까지 진격. 해가 막 넘어가는 때라서 품격있는 건물과 장엄한 하늘이 잘 어우러진다. 광각과 밝은 심도의 인물사진을 갖춘 아이폰12가 드디어 가격값을 한다.

월정교를 마지막으로 오늘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태교여행이라 좀 여유있게 돌아다닐랬는데 16000보를 걸었네.
우리 두부도 돌아다니는 걸 좋아해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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