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내 알함브라 궁전에 들러서 가장 중요한 볼일을 마친 우리는 이미 일찌감치 시작된 씨에스타에 맞추어 사과양은 숙소에서 나는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궁전터가 높은 언덕에 자리하고 있는데다가 특별히 높은 현대화된 건물도 없는 이 도시는 어지간한 카페만 가도 환상적인 뷰를 제공했다.
많은 전망을 봐왔지만 어느 화려한 도시의 전망도 여기 그라나다의 풍경에 견주어 이기긴 어려울 것 같다. 알함브라 궁전과 알바이신 관광으로 먹고사는 작은 관광도시. 도시도 큰 건물도 따로 없고 화려한 스카이라인도 없는 곳. 그렇지만 넓고 탁트인 땅에, 통일감 있는 낮은 집들이 이뤄내는 풍경은 참으로 멋있었다. 내가 화려한 고층의 스카이라인보다 넓은 곳에 탁트인 풍경을 마음에 들어한다는 것도 이때부터 알았나싶다.
흰색 벽에 팥죽색 삼각 기와지붕을 얹은 뾰족한 집들이 높이도 각각 다르게 늘어서서 뜨거운 태양빛을 한 벽으로 받아 빛나고 있다. 너른 도시의 끝에는 넓은 산맥이 전체 도시를 감싸듯 두르고 있는데 산 꼭대기엔 바위인지 흰자락이 드문드문 보인다. 그 산의 품을 따라 사선으로 늘어선 집들.
풍경을 보고 계속 앉아있자니 얼굴에 더운 열기가 느껴진다. 곧 이렇게 탁 트인 공간에 앉아있는데도 바깥공기에 면해있는 피부 전체가 붉게 달아오른 기분. 저녁 일곱시가 다 되어가는 늦은 시간인데도 이 나라의 낮은 한창이다.
핸드폰으로 노래를 틀었다. 귀에 꽂은 이어폰으로 짙은노래가 흘러나온다. 말그대로 평온하고 평화로운 기분이 들었다.
지금 이 알함브라 팰리스 안 카페에 앉아 잔잔한 전망을 바라보며 음악을 듣는 이 순간 지금 이 기분에 머릿속을 스쳐가는 사람들, 내가 문자나 한장의 사진으로 마음을 전하고 싶은 이들은 분명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리라. 이렇게 평온한 마음을 인식할 때, 불안 시기 같은 모든 안좋은 감정을 다 내려놓은 지금 이 마음을 나누고 싶은 사람. 처음으로 여행은 주변 사람을 돌아보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생각을 했다.
이 순간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그걸 놓치지 않으려 얽매이게 될 때가 있다. 첫날 호텔에서 눈을 떴을 때. 이제 시작이라는 그 날듯한 기분. 그라나다 Alixares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그 조용한 숲속에 앉아있던 순간. 어제 수영장에서 나올 때 만족스러웠던 그 기분. 지금 호텔 카페에 앉아있는 이 순간. 자꾸 이 순간이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아 사진을 찍고 마음을 정리하고 뭔가를 쓰려다 보니 -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라는 어느 책의 글귀가 생각난다. 역시 가장 소중한 것은 사진으로 옮길 수 없다. 시간과 공간을 온전하게 기억하는 것은 오직 나의 감각 뿐이다. 사진이 본질이 될 수는 없다. 그러니 그냥 내려놓고 이 순간을 맘껏 즐기면 되는 것인데, 참으로 이런 주객전도가 없다. 내 병이지 병이야 ㅎㅎ
천천히 석양이 지기 시작한다. 보라색으로 물들어가는 하늘도 일품이다. 계속해서 바라보아도 질리지 않는 풍경이다. 작은 도시라 그런지 이곳 그라나다에서 유독 여유감이 많이 느껴진다. 일주일에 주말끼는 빡빡한 일정으로 타지에서 이렇게 여유를 부려본 적은 처음이다. 이 시간이 아깝다면 아깝지만, 여기서 별로 그런 느낌은 들지 않았다. 이것도 여행의 일부. 모토가 다른 여행.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 중간에 이틀이 껴서 빡센 가운데 정말 꿀맛같은 휴식. 휴양이었다. 이들처럼 시에스타를 한낮에 두시간씩이나 보내고나도 별로 아깝지 않은 건 이들의 생활패턴(오후 1-5시 놀고, 저녁은 9시쯤 먹는) 의 이유를 몸소 느끼기 떄문이다. 오후에 아무것도 못할만큼 덥고, 또 그만큼 저녁 해가 늦게지는 환경 말이지.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생활패턴을 잘 이해하게 되었고 게다가 무엇보다 이곳 그라나다 자체가 이틀을 풀로 할애할만큼 크지도 않고, 조용하고 깨끗해서 쉬기에 너무 적합했다. 이렇게 여유부리는 맛도 괜찮구나. 아주 맛이 좋다 ㅎㅎ
사과양과 다시 만나 저녁을 먹으러 그라나다 시내로 내려왔다.
거리는 대도시처럼 복작거리지 않고 조용했지만 생동감이 있어 좋았다.
아파도 청순한 우리 사과. 예뻐서 내가 반할 지경 ㅋㅋ
온통 이슬람 양식으로 화려한 패턴 투성이인 그라나다 기념품을 잔뜩 사오며 이날도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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