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 떠다니는 글을 본적이 있다.
유시민이 말하는 '글을 잘 쓰는 방법'
어느 강단에서 두시간여 강의한 내용을 누군가가 정성스럽게 받아썼다.
그 안에서 말하는 그는 정말 설득적이었다.
꽤 긴 그 글을 빠져들어 봤더랬다.
하나부터 열까지. 그가 말하는 이오덕 선생의 책까지 찾아봤다.
그런 전적에 그의 글이란게 어떤지 궁금하기도 했고, 워낙 내가 즐겨 찾는 주제인데가
거창한 제목까지 해서 난 이 책이 매우 궁금했다.
그런데 오랜기간 기다려 빌린 후, 지금은 조금 아쉽다.
출신당이 있다 해도, 너무나 공개적으로 전제를 하고 말하는 정치적 입장도 불편하고
의연하고 유려한 그의 여러 가지 삶에 대한 자세는 훌륭하지만
꼭 도덕책을 읽는 것 같은 뻔하고 당위적인 말들.
크라잉넛이나 슈스케에 대해 본인이 느낀걸 쓰는 건 좋으나
개인적 연예계 일차원적 감상평을 이런 제목의 책에 넣어놓은 안이함.
그리고 주제를 신선하게 해석하는 시각의 부재. 결국 그렇고 그런 이야기를 늘어놓은 느낌이라는 것이다.
좋았던 것은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청춘의 면면들.
그리고 일 사랑 놀이에 연대를 보탠 그의 통찰력.
줄치며 너무 진지하게 읽지 않아도 몇챕터 읽어보는 것으로 느낌이 올듯.
모든 선거에는 승자와 패자가 있다. 내가 열렬히 지지한 후보의 당선이 내게 주는 강렬한 환희의 건너편에는 낙선한 후보를 열렬히 지지했던 사람들의 깊은 절망이 있다. 누군가를 지지하는 것은 그 후보가 패배할 가능성까지 함께 받아들이는 행위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측이 승리했을 경우 그들에게서 축하와 덕담을 받을 도덕적 정치적 자격이 우리에게 없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소극적 선택도 선택인만큼 성공이든 실패든 내 인생은 내 책임이다. 그 책임을 타인과 세상에 떠넘겨서는 안된다. 삶의 존엄과 인생의 품격은 스스로 찾아야 한다. 죄악과 비천함에서 자기를 지키는 것만으로는 훌륭한 삶을 살 수 없다. 악당이나 괴물이 되지 않았다고 해서 훌륭한 것은 아니다. 무엇이 되든, 무엇을 이루든, '자기 결정권'은 또는 '자유의지'를 적극적으로 행사해 기쁨과 자부심을 느끼는 인생을 살아야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각자 정체성이 다른 자아들이다. 누구도 타인에게 삶이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한다고 대신 결정해줄 수 없다. 아무리 많은 돈과 권력을 가지고 있어도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라고 해도 의미를 모르는 삶은 비천하고 허무할 뿐이다. 숱한 고난을 받고 살다가 모진 핍박을 받아 죽을지라도 스스로 뚜렷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며 살았다면 훌륭한 인생이다.
자기의 삶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타인의 위로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청년은 아기가 아니다. 삶의 의미는 사회나 국가가 찾아주지 않는다. 찾아줄수도 없고 찾아주어서도 안된다. 각자 알아서 찾아야 하고 찾지 못할 경우 그 책임은 전적으로 그 사람 자신에게 있다.
삶의 위대한 세 영역은 사랑 일 놀이이다. 이것은 당위가 아니다. 이셋을 위해 사랑야 한다는 게 아니다. 사람들이 실제 이 셋으로 삶을 채우며 여기에서 살아가는 의미를 찾는다는 이야기다. 나는 셀러그만의 견해를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이 셋 말고도 '연대'에서 삶의의미를 찾는다. 동일한 가치관과 목표를 가진 누군가와 손잡는 것이다. 기쁨과 슬픔, 환희와 고통에 대한 공감을 바탕으로 삼아 어디엔가 함께 속해있다는 느낌을 나누면서 서로 돕는 것을 의미한다.
열아홉살의 나는 도전하지도 않고 좌절한 현실주의자였다.
나는 스무살이 되기 전에 벌써 현실에 굴복하고 순응할 준비를 했다. 내가 하고 싶고 내게 기쁨을 주는 일을 찾고, 그 일을 잘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데 써야할 청춘의 시간을 다른 곳에 써버렸다. 때로는 합리적 의심과 깊은 사유를 통해 확신에 이르지 못한 가운데 어떤 이념이나 명분을 받아들였다.
나름 의미는 있겠다 싶었지만 가슴이 두근거리지는 않았다. 설렘이 없으니 열정이 솟을 리 없었다. 마음의 설렘이 없는 일에 인생을 쓰고 싶지 않았다.
자살은 단순한 충동의 표출이 아니다. 누구도 가벼운 마음으로 자살하지 않는다. 겉보기에는 마치 한 순간의 분노나 충동을 억제하지 못해 목숨을 끊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죽음이 직접 동반하는 것보다 더 혹심한 몸과 마음의 고통을 겪은 끝에 자살을 감행한다.
레이건은 철학적 자아의 죽음에 의연하게 대처했다. 그의 담화문은 자유의지를 가진 지성적 인간으로서 할 수 있었던 마지막 결단이었다. 지는 해가 만드는 낙조는 일출만큼 눈부시지 않다. 하지만 아름다움으로 치면 낙조가 일출을 능가할 수 있다. 레이건의 마지막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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