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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Book

무진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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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체로 디테일을 통해서 전체로 접근한다.

일종의 BOTTOM UP 방식이랄까. 함정이라면 TOP DOWN을 안하는 게 아니라 못한다는 것? 

 

여행을 가서 그 감정을 캐치할때도 순간적 장면의 냄새나 색깔 소리 느낌(육감)을 적는다.

그리고 그게 모여 여행기가 된다.

책을 읽을 때도 작가가 적는 단어의 면면, 상황의 예리한 묘사, 독창적 표현에 집중하며

그런 특징이 잘 드러나는 작가와 글을 선호한다.

예나 지금이나 이 글을 통해 작가가 하려는 말 (주제파악) 에는 매우 약하며

그래서 평소 생활에도 작은 행동으로 드러나는 사람들의 의도 파악에도 그렇게도 무지하다. 

 

MBTI의 감각적인 유형은 변하지 않았다. 내 장점이자 단점.

책 리뷰를 쓸때마다 전체적인 관통 주제보다는 한구절 한구절을 필사하느라 늘 몇바닥이 되고마는

옮긴 구절이 부끄럽다.

그래도 오늘도 여전히 옮겨 쓰는건

다시 글을 보면 부끄러워 또 고치고 그럼 또 나아지리라는 믿음이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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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이 , 김승옥의 글이 그렇게 필사하기에 좋은 훌륭한 필체라는 말을 여러번 들었다.

그래서도 한번 읽어보고 싶던 글이었다.

 

읽고 나니 과연 -

짧은 문장은 짧은 문장대로, 긴 문장은 긴 문장대로 훌륭하다.

긴문장은 수사구나 반복되는 절 때문에 자칫 주어가 헷갈리기 마련인데 그런 염려는 거의 없다.

문장호응을 아주 섬세하게 다듬었으며,그 와중에도 예리한 표현이 구석구석 보인다.

 

한편으론 짧은 문장을 만들지 못하여, 늘 문장이 구구절절 길어져 자책했던 기억이

김승옥의 긴 문장을 만나 약간의 위안을 얻었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 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이웃간 젊은이의 전사통지가 오면 어머니는 내가 무사한 것을 기뻐했고, 이따금 일선의 친구에게서 군사우편이 오기라도 하면 나 몰래 그것을 찢어버리곤 하였었다. 내가 골방보다는 전선을 택하고 싶어 해 가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에 쓴 나의 일기장들은, 그 후에 태워 버려서 지금은 없지만, 모두가 스스로를 모멸하고 오욕을 웃으며 견디는 내용들이었다. "어머니, 혹시 제가 지금 미친다면 대강 다음과 같은 원인들 때문일테니 그 점에 유의하셔서 저를 치료해 보십시오..." 이러한 일기를 쓰던 때를, 이른 아침 역 구내에서 본 미친여자가 내 앞으로 끌어당겨 주었던 것이다. 무진이 가까웠다는 것을 나는 그 미친여자를 통하여 느꼈고 그리고 방금 지나친, 먼지를 둘러쓰고 잡초 속에서 튀어나와 있는 이정비를 통하여 실감했다.

 

 

"월말에다가 토요일이 되어서 좀 바쁘다" 그는 말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그 바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바쁘다. 자랑스러워할 틈도 없이 바쁘다. 그것은 서울에서의 나였다. 그만큼 여기는 생활한다는 것에 서투를 수 있다고나 할까? 바쁘다는 것도 서투르게 바빴다. 그리고 그때 나는, 사람이 자기가 하는 일에 서투르다는 것은, 그것이 무슨 일이든지 설령 도둑질이라고 할지라도 서투르다는 것은 보기에 딱하고 보는 사람을 신경질 나게 한다고 생각하였다. 

 

 

어느 해 나는 그 집에서 방한 칸을 얻어 들고 더러워진 나의 폐를 씻어내고 있었다. 어머니도 세상을 떠나간 뒤였다. 이 바닷가에서 보낸 1년, 그때 내가 쓴 모든 편지들 속에서 사람들은 '쓸쓸하다'라는 단어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단어는 다소 천박하고 이제는 사람의 가슴에 호소해 오는 능력도 거의 상실해버린 사어 같은 것이지만 그러나 그 무렵의 내게는 그 말밖에 써야 할 말이 없는 것처럼 생각되었었다. 아침의 백사장을 거니는 산보에서 느끼는 시간의 지루함과 낮잠에서 깨어나서 식은 땀이 줄줄 흐르는 이마를 손바닥으로 닦으며 느끼는 허전함과 깊은 밤에 악몽으로부터 깨어나서 쿵쿵 소리를 내며 급하게 뛰고 있는 심장을 한 손으로 누르며 밤 바다의 그 애처로운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의 그 안타까움, 그런 것들이 굴 껍데기처럼 다닥다닥 붙어서 떨어질 줄 모르는 나의 생활을 나는 '쓸쓸하다'라는, 지금 생각하면 허깨비 같은 단어 하나로 대신시켰던 것이다.

 

 

모든 것이, 흔히 여행자에게 주어지는 그 자유 때문이라고 아내의 전보는 말하고 있었다. 나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모든 것이 세월에 의하여 내 마음속에서 잊혀질 수 있다고 전보는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처가 남는다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랫동안 우리는 다투었다. 그래서 전보와 나는 타협안을 만들었다.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 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 번만이다. 꼭 한 번만.

 

 

덜컹거리며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서 나는, 어디 쯤에선가, 길가에 세워진 하얀 팻말을 보았다. 거기에는 선명한 검은 글씨로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씌어 있었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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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의 문장이 좋은 것은 분명하다.

고전은 고전의 의미가 있다.

하지만 60년대의 한국사회 내에서 유달리 의미가 있는 고전은

2013년의 나에게 생각보다 그리 큰 의미는 아니더라.

 

어쩌면 모든 유명한 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무진기행은 1960년대를 사는 사람에게는 필독 작품일 수 있고

그 시대를 공부하는 사람에게도 필독 작품일 수 있다.

시대를 잘 반영한 수작이고 한국인으로서 공부해야 할 역사이다.

 

하지만 모든 고전이 시대를 초월하여 배경을 초월하여 독자에게 성찰을 주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배경도 시대도 다른, 아예 다른 대륙의 고전일지라도

인간의 성장과 고뇌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 오히려 내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부끄러워지는 것처럼.

 

 

 

 

 


무진기행

저자
김승옥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07-08-03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근대인의 일상과 탈일상을 감각적으로 표현해 내면서 196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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