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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 Pic/회사생활

그때 내가 힘들었던 이유

1.
외부용 수첩, 펜과 필통 , 명함케이스가 필요하다.

아직 경험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안면을 트고 거래를 부탁하는 그런 자리에서 첫인상을 좌우하는 말솜씨가 부족함을 느낀다. 잘 부탁한다는 말을 웃으며 하는 능력, 시사 화제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하는 능력, 어색해진 공기를 풀어주는 말들을 능숙하게 이어가는 능력.
오늘 방문한 법무법인은, 한눈에봐도 그럴싸한 사무실에 그럴싸한 차림새와 여유를 갖춘 사람들이 나왔다. 주요 4대로펌 출신들이 모여서 만든 신설법무법인이라니 역시나 그런 느낌이다. 같이 간 옆팀 팀장님과 원래 아시던 사이라서 화기애애하게 시작하였고, 가벼운 화제로 몸을 푸는 사이 나만 혼자 경직되어있다는 것이 한눈에 느껴졌다.

삼십여분간의 가벼운 대화가 끝날즈음까지 나 혼자 말이 없었더니 , 팀장님께서 “과장님 목소리 한번 들려주시죠” 라고 말을 꺼내어 모든 눈이 나에게 쏠렸다. 당황하여 “아, 저는 여기로 온지 얼마 안되고, 그래서...” 라고 말을 떼는데 옆에서 팀장님이 내말을 부드럽게 자르고 “ 잘하는 사람만 일한다는 영업부에 계시다가 오셔서...” 라고 하신다. 아, 내가 처음 사람들을 소개받고 일을 부탁하는 입장에서 저 말은 적절치 않은 말이었구나. 삼십분동안 혼자 적응도 못하다가 기껏 꺼낸게 저말이라니..


창구에서 오는 손님들만을 맞고, 혹은 내부직원들을 상대하다가, 뭔가 다른 형태의 일이 시작되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나에게는 급격한 변화이지만, 날 보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의아함 뿐이겠지.




2.
옆팀 팀장님이 나를 불러 따로 말씀하셨다.

고객을 사로잡으려할땐 확실히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확인해보고 연락한다” 그런말 말고 모르는건 그냥 차라리 아예 모른다고 하고 남들도 모를것이다라고 말하라고 했다. 확신을 주는게 중요하다고 했다. 법무법인은 고수이므로, 우리도 그들과 서로 딜(Deal)을 주고받는 느낌으로 해야하고, 한편 우리는 영업의 스탠스이니 안되는것도 잘 풀어주는 게 중요하다고 한다.

이건 근데 내공을 이미 갖춘자들이 하는 말이지 않나, 나는 이럴 자격이 될까. 과연?

그분은 나에 대해 추천받아 온 소문을 들었다며, 숲은 알고 있고 남은건 감을 회복하는 것이니 곧 궤도에 오르시겠죠 하고 잘라 말했다. 나의 부대설명은 더이상 먹히지 않았다. 열심히하는사람 필요 없고 잘하는 사람이 필요하며 , 여긴 내가 담당하는 법 이슈가 많아 내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했다.

부서에 논의할 자가 아무도 없는데 어떻게 논리를 점검해야 하는지, 내가 10년전에 은행신고가 아닌 보고를 했던 과거는 알고 있는지, 내가 배수진인지, 그런 건 남들눈엔 중요한 게 아니다. 그냥 닥치고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




3.
오늘은 Y지점에 상담이 예정되어 있었다. 근데 그 지점의 부지점장님과 지점장님이 돌아가면서 전화주실 때마다 내용이 바뀌네. 오전내내 통화하는데 해투는 해투인데 펀드회사인지 사모펀드인지 그 안에 상품인지 뭔지 명확하지가 않다. 그것도 반은 자사주로 투자한다고 하고. 내가 10년전 상담해왔던 업무는 흔하게 일어나는 전형적인 모양새 뿐이었는데 , 여기서 전문가랍시고 사기꾼같은 가면을 쓰고 부서소개의 말을 하고, 모르는 걸 아는척하고 추앙의 말을 들을때마다 나는 속으로 씁쓸한 웃음을 지을 뿐이다.

점심무렵 상담을 위해 지점에 도착했고 센터장님과 부지점장님과 나란히 앉았는데,여전히 투자의 구조는 들쭉날쭉 요지경이다. 곧이어 업체직원이 도착하여 누구보다 잘 설명을 시작했는데, 내가 아는 개념과 잘 모르는 개념이 도처에서 튀어나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애써 감추었다.

같이 간 차장님은, 분명 나보다도 자본거래 신고 관련 잘 모르신다고 하였는데, 어째 이야기하는게 굉장히 자신감에 넘친다. 이런 태도는 장점과 단점이 있는데 뭐든 일단 아는척 하라는 것도 신뢰의 나름 중요한 부분이라 무시할수는 없다지만, 이렇게 모두들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끼리 애매한 이야기만 한시간째 이어갈 때는 가끔 속으로 어처구니가 없어 진이 다 빠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 역시 뾰족한 답도 없고 능력도 없는, 그중의 하나라는 것이 씁쓸하여 할말도 없다.


어찌어찌 한시간을 이야기하여 돌아갈 마무리를 지은뒤 지점을 탈출했다. 구두로만 이야기하고, 제대로된 계약서가 없다는 것이 이렇게 다행일줄은 몰랐다. 계약서가 있었다면 즉답을 내놓으라 했겠지. 일단 시간이라도 벌어서 다행인데, 말로만 때우는 나의 폭탄돌리기 회의는 언제쯤 참사를 맞게 될까. 그것도 좋은 관람포인트가 될 것이다.

나오면서 풀이 죽은 나를 위로한답시며 같이간 차장님이 하는 말이 더욱 장관이었는데 우리는 그냥 지점과는 다른 부서에서 나와서, 투자지원이라고 박힌 다르게 생긴 명함 내밀며, 업체직원을 홀리면 된다고. 그러면 은행에 신뢰가 생기고, 우리 고객이 된다고. 정말 그럴까? 그렇게 입에 발린 자찬이나 하면서 신뢰를 만들수 있나, 이런 껍데기 모양만 가지고 나는 언제까지 버틸 생각인가?


회의가 끝나고 나오는길에 지점장님에게 전화가 왔는데, 차장님께 보고 들었는데 처음치고 무리없이 잘 처리한것 같고 멀리까지 회의를 갔으니, 그만 퇴근하란다. 네시가 갓넘은 시간이었는데, 뭐라고? 난 다 내팽개치고 온데다가 지점에 회신전화할 곳도 몇군데 남아있고 옆에 차장님은 심지어 조작자 해제도 안하고 왔다는데, 그거 안한다고 큰일나는거 아니니까 그냥 가란다. (지점에서는 사유서 써야하는 사안이다) 감사하지만 아직 남은게 많아서 그리는 못하겠다 했더니, 됐고 치명적인거 없으면 그냥 가고 할일 있으면 옆사람한테 인계할테니 절대 오지 말라고 몇번이나 신신당부를 한다. 몇번이나 얘기를 해도 들어먹질 않으셔서 급기야는 그냥 가는게 마음이 편할거 같다(그러니 그만 닥치라)고 했더니 그럼 어쩔수없지..라시네.

지금 내가 어떤 회의를 어떻게 어영부영 틀어막고 왔는지 알고 나에게 이렇게 편의를 베푸시는 걸까. 게다가 난 불안요소가 있으면 좌불안석인 스타일인데, 우리 지점장님은 획기적 아이디어 하나로 밀어붙이는 스타일이라 그분의 칭찬이 전혀 와닿지 않는다. 사람마다 업무 스타일이라는 것도 있고 나름 정리할 것도 있는데, 주말을 앞두고 나는 오늘 업체 이야기도 정리하고 내용도 확인한 뒤 퇴근하고 싶은데 일방의 생각만을 밀어부치는건 좀 부담스럽다. 야근을 싫어하는 좋은 지점장님 포지션은 알겠는데 일하지도 못하게 하면 쓰나.

결국 나만 혼자 사무실오 돌아왔고, 자리로 돌아와서도 이것저것 하느라 정신없이 바빴고, 내 자리 pc가 유연근무 때문에 꺼져서 남의 자리 빌려서 한시간을 쓰고도 일을 마무리하지 못했다. 서류만 간신히 출력하여 그때부터 보기 시작했는데 7시에 무조건 퇴근하라는 지점장님 지령도 에라 모르겠다고 그냥 넘겨버렸다. 보다보다, 정말 모르겠는 업무들은 내 머릿속을 통채로 갈아엎어야 될것 같았고, 지금 가장 시급한 건 업무관련된 책을 사서 제대로 공부하는 것 같아서, 책을 몇권 검색한 뒤에 교보로 내려갔다.그리고 10분만에 책을 한 권 사들고 출발하였다. 이번 주말엔 꼭 공부를 하리라. 더이상 사기꾼이 될순 없다 다짐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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