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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 Pic/제 3의 인물

임신일기 2 - 난임병원 첫번째 이야기

20대 무렵에는 내가 난임병원에 다니리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어렸을 때 약골 체질도 아니었고, 늘 잘 먹고 잘 자는 케릭터였으니까. 심지어 약사셨던 아부지는 어지간한 아픈 증상에도 병원은 커녕 그냥 가만히 있으면 나으니 기다리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목감기처럼 염증이 분명한 경우에만 집에 있는 오래된 약통 (약국시절부터 갖고 있는, 통안에 든 알약 수량이 어마무시한, 아마 몇백개 타블릿은 너끈히 들어있는 엄청 큰 약통)을 꺼내어 항생제를 주시는 게 고작이었다.

은행에서 세번째 지점으로 옮길 무렵쯤, 나는 서른이 조금 넘은 나이로 결혼을 했고, 그때 그 지점은 하루빨리 탈출하고 싶은 곳이었다. 난 당연한 수순을 밟듯이 근처 산부인과에서 산전검사를 했고, 배란테스트기를 동원하여 날짜를 맞추곤 했다. 그러나 맞벌이 직장인이란 너무도 피곤하고 퇴근하면 손가락 까닥하기가 귀찮은 것. 숙제와 같이 다가오는 일들은 스트레스가 되어갔다. 네번째 지점으로 옮길 때쯤, 남편이 예정에 없던 퇴직을 하고 자발적 취준생이 되었고 나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정신없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임신은 자연스레 후순위로 밀려났다.

아이가 있으면 있는대로, 또 없으면 없는대로 살아가겠거니 생각했다. 시간은 계속 흘렀고 나는 서른여덟이 되었다. 조바심이 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언제든 마음내키는 시기에 뚝딱하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 뿐더러 여자는 필연적으로 몸의 나이를 머릿속 한켠으로 생각하지 않을수가 없으니까. 2020년이 시작할때쯤, 나도 임신을 위해 전문적인 병원에 다녀봐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1년이 지나도록 자연적으로 임신이 되지 않으면 난임이라고 정의한다는데, 그렇게 치면 우리는 벌써 5년이 넘은 시간을 보내온 것이다.

병원에 가기로 마음 먹은 뒤 집근처 몇군데 병원을 알아보면서 처음엔 산부인과에서 배란일만 받아볼까 고민도 했었다. 그러나 한번 병원에 가기로 결심한 이후로 확실해진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시간이 금"이라는 것이다. 한달에 한번 오는 기회(?)란 매달 시도하였을 때 일년에 12번의 횟수가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일단 시작해보면 알겠지만 이러저러한 여건상 매달 계속해서 시도하기란 쉽지가 않다. 회복되는 몸도 생각해야하고, 스케줄도 맞아야 하며, 약을 많이 쓰게 되면 좀 쉬는 달도 있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시간이 많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처음부터 난임 전문 병원을 찾아간 건 잘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날 이후 하나씩 차근차근 검사를 하다보니 막연한 두려움은 사라지고 원인규명도 하고 혹여 뭐가 잘 안되더라도 후회는 남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진작 왜 하지 않았을까. 반이면 시작인 내 성격에 뭐든 시작하고 나면 그 이후에는 고민없이 또 차근차근 잘 치뤄냈을 것을. 돌아보면 내가 병원 다니길 주저한 이유는 ‘인공적’이라는 부분에 의미부여를 지나치게 많이 했기 때문 같기도 하다. 나는 그것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며 이런 일을 겪는 것이 잘 연상되지 않는다는 막연한 기대.

난임시술이라는 건 당연히 자연적인 임신보다 확률이 높을 것이다. 날짜와 시간도 정교하게 맞춰서 그것도 모든 정성을 들여서 환경을 맞추니까. 심플하게 목적을 생각하면 당연히 선택해야될 일이었다. 물론 돈도 적잖이 들고 병원에 시간 맞춰 계속 다녀야 하며 매일 스스로 주사도 맞는 험난한 일도 겪어야 하지만.

처음 인공수정 시술을 하던 날 병원 침대에 누워 어쩌면 '나를 비참하게 만들지 않는 기술' 책에서 말한 것처럼 나 역시 내가 유일하고 완벽하다는 사실에 너무 많은 포커스를 두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라고 난임병원에서 인공수정하지 않으리란 법이 어디있으며 안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란 법이 있을까. 왜 내가 하필 그 주인공이 되었는지 너무 많은 의미부여를 할 필요가 없다. 나를 둘러싼 것들이 늦되고, 잘되지 못한다는 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쓸데없이 자기연민에 빠지지 말고 나의 고통과 번거로움을 너무 우월히 평하지 말자고. 잘 해낼수 있고 그 고민과 걱정을 끌어안는 시간이 더 아깝다고 생각하고 다짐했다. 거기까지 생각한 뒤에 마음이 조금 편해졌고, 갑자기 복잡했던 마음보다 잉태의 숭고한 숭간이 이렇게 10분만에 속전속결 지나는 것이 이래도 되나 싶은 기분이 들어 좀 우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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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공수정 세번과 시험관 한번으로 임신이 되었다.


  • 행자 2021.05.09 15:27

    나는 인공수정과 시험관의 차이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글을 통해 일로씨와 과거의 일로씨 사이에 많은 대화가 오고간 걸 알 수 있었어요! 그 과정을 잘 지나 예비 엄마가 된 걸 축하해!

  • 익명 2021.05.12 10:33

    비밀댓글입니다

    • BlogIcon Nangbi 2021.05.31 22:29 신고

      ㅎㅎㅎ 진하게 감동적인 댓글이야! 특별히 어떤 감정을 깊게 생각하진 않으려고 내 딴에는 노력했던 것 같은데, 아마 그 저변에는 빠지면 우울해할 것이란 걸 알아서 도망가는 심리가 발동했을 거라 생각해. 그때나 지금이나 좀더 솔직했다면 좋았을텐데 비겁한 본능은 쉽게 없어지질 않는구나. 또 만나서 이야기하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