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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 Pic/제 3의 인물

임신일기 1 - 임신을 대하는 마음

임신 사실을 알고 나니 언젠가 해야하는 밀린 숙제를 드디어 착수한 첫째날의 심정과 같이, 앞으로 채워나갈 일이 걱정은 되면서도 한편으로 이제 드디어 시작했다는 안도감 및 여유가 생긴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나의 늦은 스타트와 앞으로 남은 창창한 과정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그동안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아이에 대한 적극적 노력을 은연중에 거부하고 있었다는 걸 인정한다. 남의 집 아이들을 보면서 속내 기꺼이 안부를 물을 수도, 질투만 하고 있을 수도 없었던 나는 핑계댈 것이 필요했을 것이다.

혹시나 올수도 있는 임신 때문에 안그래도 결정장애자인 내가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고 (회사에서 희망부서 공모, 장기로 운동 끊기, 취미생활 시작하기, 몇달 뒤 해외 여행 일정 정하기, 피부과 다회권 결제 등) 삼십대를 흘려보냈다는 걸 알면 누군가는 한심해 한숨을 쉴 것이다. 가장 자유롭고 활동적으로 움직여야 할 때인데 이런 사소한 이유 같은 건 정말 누가 봐도 귀찮았단 말을 대신하는 핑계에 다름 아니지 않은가? 그냥 하다가 일이 생기면 중단하고 미루면 되는 것일 뿐인데. 그저 끝까지 누리지 못할(지도 모른 다는) 것이 아까워서 시작하지 않고 억울해한다니 누가 비웃어도 난 할말이 없다.

그러나 지나버린 날들을 어쩔 것인가. 특히 시간과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던 자유인생 황금기에 운동을 비롯한 적극적 취미활동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나는 너무 아쉬운 마음 뿐인데, 생각해보면 그게 뭐 억울할 게 있나 싶다. 후회한들 뭘하나, 그냥 이제부터 그렇게 하루하루를 잘 살면 되지. 매일 시작되는 소중한 시간, 무엇이 되었든 이제부터 마음먹으면 바로 시작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안주하는 보수적인 인간이 되지말자 다짐했다.

그렇게 마음먹은지 딱 삼주만에 임신 사실을 알았다. 일년 내내 병원을 다녔으니 사실 급작스러워할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난 적잖은 심정적 혼란을 겪었다. 이것이 나에게 진짜로 앞으로 일어나는 일인 건지 믿을 수가 없었고, 두달여간이 지나도록 스스로 부인했던 것 같다. 또 무언가를 해보지도 못하고 모든 일은 중단되었다.

처음 전화로 피검사결과 임신 수치 소식을 들은 11월 초 어느 아침, 회의에 소집되어 긴한 안건을 논하는 와중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나의 마음은 콩닥콩닥 했다. 그때 그 심정은 조금 들뜬 듯도 했고 살짝은 방관자가 된 듯도 했다. 몇 년간 내 일이라고 생각해왔던, 지금 회의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이 일이 갑자기 남일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일의 애착, 책임감이란 것이 이리도 가벼운 것이었나 싶기도 하고. 휴직을 간절히 원했던 몇년 전에 내가 꿈꾸던 순간이라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사람 마음이란 너무도 쉽게 변하는 것이다 싶어 스스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어 곧 연말이 되었다. 원래 새해를 맞이하는 마음을 유달리 특별히 갖지는 않는 편이었지만, 특별히 이번 연말과 새해 맞이는 어느때보다 편안한 기분이었다. 이전에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지 못하여 초조한 마음이었다면 이제는 시간이 지나간다는 사실에 마음이 안도되는 기분. 그래서 휴가나 휴일이 끝나고 출근날이 되어도, 한달한달을 넘어 다음달 달력을 보아도 이전처럼 괴롭지는 않았다. 마치 전역을 앞둔 군인처럼 시간이 차곡차곡 잘 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기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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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한 채 회사를 다니는 일은 마치 반칙과 같은 일이었다. 그것도 다 임산부를 배려해줄만한 회사에 다녀서 감사히 받은 것이지만. 그 이야기는 차차 또 이어보기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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