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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 Pic/제 3의 인물

임신일기 5 - 임신 중 직장생활 : 단축 근무

고등학교 친구들이 집에 놀러왔던 작년말쯤 우연하게 털어놓은 임신 소식에, 직장녀였던 친구 하나가 내게 조언을 건넸다. 회사에서 쓸 수 있는 ‘임산부 단축근무’란 것이 있는데, 초기 12주까지는 정규 근무시간 8시간 중에 두시간씩 단축할 수 있도록 법적으로 보장받게 해주는 것이라고. 무려 근로기준법 임산부 보호 항목에 명시된 내용이다.

처음에는 그런 걸 뭘 쓰나 싶었다. 임신을 했다는 건 어차피 몇달 후 떠날 사람이라는 것. 주기적인 발령이나 공모가 일상적인 이 조직에서 곧 발령(휴직)이 예정되어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장기적 업무에는 투입이 곤란하고, 마음도 성의도 떠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같은 업무를 나눠하는 조직의 특성상 옆 팀원에게 아무래도 부담을 지우는 일이라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친구는 나를 붙잡고 다시한번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내가 이걸 써야 다음에 나와 같은 대상이 되는 사람이 또 쓸 수 있고 마치 잔잔한 수면에 파문이 일듯 흐름을 만들어갈 수 있는 것이라고. 조금은 책임감을 가진 자세로 이런 법을 잘 지키고 활성화시키기 위해 힘써야 한다고.



늦은 나이에 첫 임신인데다 시험관까지 했으니 초기 안정을 위해 한 달 뒤 정기 인사에 바로 휴직에 들어가는게 어떻냐고 조언하는 부서 사람들이 꽤 있었다. 처음에는 별 생각이 없던 나 역시 초기에 조심해야한다는 말을 하도 들으니 단축근무를 사용하여 출근시간이라도 조금 늦춰볼까 하는 생각이 서서히 들었다. 회사의 복무 관련 규정을 뒤져보니 구석에 짧게 안내가 되어있었다. 아마도 우리 회사는 법에서 정해놓은 주수 이상으로도 직원이 신청하는대로 받는 것 같았다.(담당부서에 전화하여 물어보니 “그렇다고 기간 내내 신청하는건 좀 곤란하죠. 알아서 잘 하세요”라고 여운을 남기긴 했다) 물론 해당 소속 지점장의 서면 확인 및 인사부의 승인 하에 가능한 일이었다.

7주차가 좀 넘었을 무렵 지점장님께 말씀을 드렸다. 내가 신입시절 입행했을 때부터 외환 겸임교수로 날 보아오셨던 지점장님은 내 소식에 제 일처럼 환한 얼굴로 기뻐해주셨다.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되는 분이 은행 생활에서 몇 없을 것인데 그 중에 이분이라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지점장님 역시 12월에 당장 들어가는게 낫지 않냐는 말씀을 하셨는데, T/O나 인원 충원 같은 건 차치하고 분명 내 입장을 고려해주시는 것이 진심으로 느껴져 참으로 고마웠다.

그렇게 단축근무를 15주까지 신청했다. 인사부가 뭐라든. 그것으로 고과 평가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든. 가장 중요한 건 같은 부서 같은 팀의 업무 배분과 부담인데 현재 구성원으로 이 부서에서 앞뒤 한시간씩은 커버할 수 있는 범주의 업무라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팀장님과 지점장님은 내게 단축근무를 더 긴 기간 사용해도 되지 않겠냐고 권하셨는데 그건 내 쪽에서도 양심에 좀 찔리는 일이기도 하여 나름 법정 기간에서 3주 늘린 것으로 만족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주. 갑자기 우리 부서의 통폐합 소식이 들려왔다. 최근 몇년간 부서의 존망을 두고 엄청나게 시끄러웠음에도 잘 벼텨왔는데 하루아침에 벼락 같은 결론이 난 것이다. 소식을 전하는 지점장님 표정이 심상치 않아서 어려운 일일 것임은 짐작했지만, 내가 지점에 오픈한 임밍아웃은 그 즈음의 사건도 아니게 되었다.

회사 생활동안 한번을 겪을까말까한 통폐합 같은 일을 갑자기 겪는 것은 감정 소모가 다대한 일이다. 말 많은 조직답게 소문도 파다했다. 이런 일이 터지기까지 짐작가는 원인제공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또 할 일이 있을런지 모르겠지만 사고치는 놈 따로 피해자 따로 있는 상황, 그걸 제대로 파악조차 하지 못하는 이 조직에 대한 실망감은 분명했다. 그런 오명을 쓴 채 퇴진해야하는 이 부서의 사람들도 상처받는 일이다. 새로 오신 지점장님도 큰 피해자 중 하나이고. 부서원 모두가 바람앞의 등불같은 위치에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고, 개인적인 인사 향방도 업무의 해체도 부서의 존치도 한치앞도 몰라 어수선하고 어지러웠다.

임신한 중이 아니었다면 정말로 여러모로 곤란해지는 상황이었을 터인데 어떻게 보면 한끗 차이로 나에게는 정말 기가막힌 타이밍이었다. 일단 회사에 출근하면서 난임병원에 동시에 다니는 일이란 정말이지 이 부서가 아니면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었고 (10시반출근 유연 근무 사용 및 점심시간의 편의 등) 새로운 부서에 통폐합이 되면 병원에 다니는 것은 물론이요 업무와 환경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일이므로 최소 몇달의 시간은 훌쩍 지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떠나기 전까지 아무 변화가 없었다면 더욱 편안했을 순 있지만, 그냥 개인적으론 다행이고 감사하다는 말밖에.

어쨌거나 이런 사정으로 졸지에 방관자 신세가 되어버린 나였기 때문에 다른 이들에 비하면 통폐합 소식을 강건너 불보듯 들었고 나는 두가지 선택지를 받았다. 12월 정기 인사때 맞춰 들어갈 것인지. 예정대로 다닐 것인지. 난 1분기만 더 버텨보기로 했다.



본점 건물로 이사와 부서장이 바뀌었고 그 시점 기준 2주 남은 단축근무를 보고하러 올라갔다. 이전처럼 환한 얼굴로 기뻐해주실 거라고까지 기대하진 않았지만, 안타깝게도 얼굴이 많이 구겨지셨고 게다가 마치 그런 것을 내 밑에서 쓰는 게 가당키나 하냐는 표정으로 나에게 반문하셨다.

"단.....축근무 라는 걸 쓴다고...? 나 참 .. 회사에서는 말이야 권리라는 것이...있다고 다 권리가 아니야"

소속장으로서 설사 좀 반기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굳이 말씀하실 줄까진 몰랐다. 속으로 생각하지 않고 지금 나한테, 면전에 얘기한다고? 요새 같은 시대에? 진짜로?
심지어 당신께 승인해주십사 사인을 받으러 간것도 아니었다. 이전 소속장님이 이미 다 사인하고 인사부까지 승인 난 사항이며 앞으로 2주 남았다고 알려드리러 갔던 것 뿐. 하지만 난 그 시점으로 당돌하게 단축근무라는 걸 사용할 생각씩이나 하는 사람으로 정해져 버렸다.

그날 불편한 마음으로 뱉으신 이후의 말들을 굳이 옮겨적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난 그날 그분이 보인 몇줄의 말들과 행동이 깊이 가슴에 와 박혔다.
그날의 나 역시 얼굴을 붉히거나 화를 품은 최소한의 정색을 할 수도 있었지만 어쩐지 난 그냥 좀 웃음이 나왔다. 어쩌면 측은한 기분이었다. 이런 구시대적 인사방침을 지닌 부서장이나, 이 부서장을 본부부서장으로 앉히고 있는 조직 모두가 실망스러웠다. 그 회사에 다니고 있는 나를 포함하여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이분은 이 상태로 그냥 은행 마지막까지 다니시다가 퇴직하시겠지. 우리는 이런 것 하나 이야기 할 수 없는 경직된 조직인 것이 현실이었다.



영업점에서 일하면서 워킹맘들이 늦게 출근하거나 일찍 퇴근하거나 급한 일로 자리를 비울 때 업무 커버를 많이 해보았고, 비슷한 입장에 처한 미혼 남녀 + 기혼남까지 함께 나머지 일을 처리하며 어느날에는 이해도 했다가 어느날에는 격한 토로(=뒷담화)도 하는 등 14년째 반대편 입장을 공감하며 살았다. 나 역시 단축근무 얘길 처음 들었을 때 불편했던 게 사실이니까. 그러다가 난데없이 임산부가 되어 처음으로 배려받는 대상이 되어보니 이런 종류의 일에 부딪히는 저항감이 어떤 느낌의 것인지 처음으로 실감이 났다. 이런 것을 왜 법으로 정해놓았고 지키려고 노력해야 하는지도.

법적으로 정해진 단축근무를 쓴다고 할 때 속으로는 불편했을지언정 말로 꺼내지 않았던 사람들과 면전에서 표정을 구기던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더 써도 된다며 환하게 축하해주던 사람과 매사 비아냥거리는 사람과도 차이가 있다. 사회(조직)은 어쩔 수 없이 더불어 사는 것이고, 적어도 당사자가 남의 희생을 당연한 듯 굴지만 않는다면 되도록 동료들끼리 이해와 배려와 나중에 주고받는 일감 품앗이로 고통을 분담하며 일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해왔던 나의 14년차 조직경험론(?)이 이렇게 허약한 토대였구나.

친구가 처음에 말한 것처럼 반드시 내가 이 직장에서 파문을 일으키는 역할을 수행해야 하고 그 몸짓이 모여서 기업문화를 바꾼다는 말에 공감했다. 조금 오기가 생겼다고 해야되나.

그 이후로 회사에서는 되도록 스트레스 받지 않으면서 다니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 여러 바뀐 환경 때문에 나 뿐 아니라 부서의 모두가 스트레스풀한 상황이었다. 나의 단축근무 사건을 포함한 출퇴근빌런을 두고(짐작하겠지만 단축근무를 싫어했던 그 부장님이 부서원 모두에게 요구하는 ‘이른출근늦은퇴근’- 근태론 때문이었다) 백가지 사람의 백가지 방안이 난무했고 난 거기에 같이 휩쓸려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내가 할 말은 하고 내가 출근해야겠다고 생각한 때, 퇴근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한 때 퇴근하겠다. 회사를 막 다니는 게 아니라 나의 주관대로 하고 나머지는 감내하겠다는 것이다. 눈치를 보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있는 직장 생활은 이제 시작일 뿐인데, 갈 길이 참으로 멀다는 생각에 머리속이 조금 복잡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