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ravel/England

영국 1 - 런던 : 출발

2018.04.06~11

* 어제는 비가 하루종일 오고, 또 밤새도록 비가 내렸다.아침나절의 비개인 하늘은 쌀쌀하면서도 기분좋게 만드는 촉촉한 차가운 공기. 곧 열두시간 비행기를 타고 떠난다는 것이 믿기어려울만큼, 실감이 나지 않는 이번여행. 예약할 때도 정신없이 바빴지만, 출발일주일전쯤 갑자기 닥친 예기치 않은 회사 사정(발령)으로, 더더욱이나 여행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아졌다. 

 

휴가는 생각없이 떠나야 제맛인데, 그냥 한순간한순간의 새로운것, 장소, 분위기를 느끼며 오감을 집중해야하는 것인데 , 그래도 그걸 충분히 즐기고 오기 힘든데 , 이렇게 번잡스러운 마음에서야. 

 

그래서 이번 여행에서 나는 분명히 정리가 필요하다.  여행의 목적이 이렇게 뚜렷한 것도 처음이다. 이전에 어느 여행 칼럼에서 읽은 것처럼 각각의 정신상태와 그것을 해결해주기위한 치료로서의 여행이 매칭이 된다면, 이번 여행에서 내가 안고 있는 고민과 그 해소로서의 여행의 기능이 어느 순간인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 

* 비행기 좌석이 3자리 연석이었는데, 복도쪽에 앉았던 외국인이 빈자리를 찾아서 자리를 옮겨주어 둘이서 세자리를 편하게 쓰고 가게 되었다. 시작부터 운이 좋네, 어서 이 여행에 집중하고 기분이 좋아지라는 신호인것 같아 적극적으로 좋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무엇이 됐든 마음이 쓰이고 시작부터 축쳐져 있어 정작 중요한 시간을 놓치는 것만큼 나중에 돌아보면 아쉬운 일이 없겠지

오랜만에 대한항공으로 장시간 비행이라 영어가 아닌 한국어 지원의 영화를 맘껏 볼수 있다는 사실이 약간 설레였다. 사실 나는 영화를 그리 자주 보는 편은 아니었는데 최근 들어서 내적으로 계속 침잠하다보니, 마음을 울리는 이야기들을 자꾸 찾게 된다. 그러다보니 책 외에도 영화 속 이야기와 이미지로 강력하게 기억하는 감정에도 끌림이 생기게 된 것 같다.
대략 목차를 훑어보니 플로리다프로젝트, 원더, 다키스트아워, 팬텀스레드 등이 있네 - 뭘볼지는 잠시 더 즐거이 고민해봐야겠다. 

그보다 먼저 난 비행기를 타면 꼭 하는게 있는데, 그건 바로 스토쿠이다. 누군가에게는 도대체 무슨 재미로 하는지 모르겠는 퍼즐게임이라지만 , 난 이 조그만 칸들을 채우며 내 기분도 따라 차곡차곡 즐거움을 채우는것만 같다. 세판을 넘어가면 조금 멀미가 날수 있으니, 첫번째 기내식이 나오기 전에 easy, medium, hard 각 단계별로 한판씩만 해야지.

* 탑승 직후 나눠준 작은 생수로는 건조한 기내에서 갈증을 해소하기엔 택도 없어서, 승무원석에 가서 물을 하나 더 얻을수 있냐 했더니 큰 물통밖에 없단다. 내 작은페트에 옮겨담는건 괜찮다 하여 그분이 도와주려는걸 내가 하겠다 했다가 이런 잔뜩 흘려버렸다.
다시한번 자세를 잡고 이번엔 담는 물통까지 두개를 손에 다 들고 통 두개를 8자로 기울여 따랐더니 그나마 좀 잘 따라진다. 흔들리는 기내에서 물통속 물을 옮겨 담는 건 꽤나 스킬이 필요한 일이었군. 별거아닌거 같은 일을 도와준다 했을땐 이유가 있었어. 뭐든지 얕봐서는 안되지. 

* 12시간의 비행시간중 10시간여를 잠을 못 자다가 두시간여를 남겨놓고 눈을 감았는데, 꿈속에서 회사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눈을 감으면 그날의 저녁, 나를 보며 손가락으로 급히 가리키던 표정, 절망감. 그게 모두 되살아난다. 벌써 이미 발령이 난 지 열흘이 지났고, 정리하겠다고 굳게 다짐하고 이곳에 왔지만, 눈을 감은것이 악몽인지 눈을 뜬것이 악몽인지 구분할수가 없다.

* 비행기가 착륙하니 존레논의 이매진이 흘러나온다. 보통은 차분한 클래식이 나오는데 영국은 영국이네 . 군중속에 파묻혀 따라 나오니 차례대로 줄을 서는데 맙소사 사람이 너무 많다. 저녁 6시 35분에 입국심사 줄을 서기 시작했는데 , 심사대 도달직전 7시 46분이 넘었다. 한시간이 넘게 줄만 섰네. 히드로가 입국심사로 악명이 높단 소리는 들었지만, 이리 긴 줄은 오랜만이다. 한국시간으로 새벽 4시가 다 되어간다. 

* 비행시간도 늘어지고, 줄서는 것도 늘어지고, 시끄럽고 느린 지하철을 갈아타고 시내 숙소에 도착하는 것도 한시간이 넘게 걸렸는데 체크인하는데 또 기다리라고 하여 조금 지쳤다. 시차 때문에 피곤한 것도 있긴 하지만, 쌀쌀한 밤에 인적이 드문 거리를 걸어 처음오는 숙소를 찾아오는 건 긴장되는 일이다.

체크인을 기다리며 로비에 앉아있는데 한 직원이 다가와 웰컴 드링크를 내어준다며 차를 고르라 한다. 진저레몬으로 주문하고 잠시 늘어져있자니 따뜻한 머그잔 한잔정도 기대한 것이 무색하게 티포트와, 찻잔세트, 쿠키와 설탕 , 우유까지 풀세트로 정성스레 세팅해준다. 역시 차의 나라답구나, 타협하지 않는 뭔가가 느껴진다. 때마침 시작한 호텔 로비의 라이브 피아노 연주까지. 여행이 시작되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