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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Book

지적 생활의 즐거움 -P.G. 해머튼

제목이 흥미로워 시작하였으나 , 작가의 정체가 더 궁금해지며 끝난 책

명상집 같기도 하고 철학서 같기도 하며 교장선생님 훈화말씀 모음집 같기도 한 이 책은 줄줄이 구절마다 죄책감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문장들로 가득찼다. ㅎㅎ

단호박같은 문체와 쉬운 설명, 확실한 방향성은 알겠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주관적 견해임을 밝힙니다’ 라고 마지막에 써 있을 것 같은 느낌. 그래서 흥미로우면서도 몰입하여 공감하기보다는 조금 객관적인 시선에서 바라보게 되었던 것 같다.

장점이라 하면 상당히 구체적인 목차! ㅋ
시간을 아끼라는 것과 시시한 문제에 시달리지 말고 집중하여 큰일을 도모하라는 큰 맥락은 공감했다. 더불어 다국어 학습은 시간낭비라고 시원하게 날려주셔서 빵터짐 ㅋㅋ

[목차]

1부. 지적 생활
지나치게 일하는 젊은 작가에게
다시 지나치게 일하는 젊은 작가에게
건강이 좋지 않은 지식인에게
운동을 게을리하는 친구에게
신문을 읽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교양을 갖춘 친구에게
훈련보다 재능에 더 비중을 두는 작가에게
지적인 교양이 이성관계에서 부도덕한 면이 있다고 말하는 평론가에게
배움은 다양할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친구에게
여러 분야를 공부해야 한다고 집착하는 친구에게
프랑스의 모 대학 학장에게
기억력이 나쁘다고 한탄하는 친구에게
늘 시간이 부족하다고 한탄하는 친구에게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고 싶어하는 이에게
책 읽을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사업가에게
가난한 지식인에게

2부. 지적인 삶
고독한 작가의 삶을 두려워하는 친구에게
지적 생활이 추구하는 삶이 무엇인지 묻는 친구에게
늘 고난과 싸워야 하는 지식인에게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친구에게
인정받지 못함을 괴로워하는 젊은이에게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젊은이에게
젊은 예술가에게 보내는 편지
일상적인 인간관계에 실패를 거듭하는 지식인에게
적을 만들지 않는 인간관계에 대하여 묻는 그대에게
나이 때문에 지적인 삶을 살아갈 자신이 없다고 말하는 친구에게

[ 발췌 ]

# 이 시대의 청년들이 방황하는 이유는 지나치게 많이 배워서입니다. 얕은 깊이로 너무 많은 학문을 거쳤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지적 유산은 그리 풍부하지 못합니다. 현대인이 지적 생활을 계획하면서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피할까, 고민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고뇌는 쓸데없습니다. 우리는 본능으로 무엇을 배우고 싶은지, 무엇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 길로 망설임 없이 떠나면 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한 과목, 또는 두 과목으로 압축해 지식을 쌓고 교양을 축적하는 것이 정답입니다. 우리에겐 이토록 많은 분야의 지식이 전부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이 같은 특권이 과거의 악습처럼, 무지처럼 여겨지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이 순간에도 세계는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만들어진 가벼운 지식들에 뒤떨어질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지식은 특권이 아닙니다. 지적 생활은 몇몇 선택받은 자들을 위한 축복이 아닙니다.


# 주의할 점은 인간은 자신과 관련이 없는 것들에 간혹 의문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의문으로 그쳐야 되는데 의문이 확신이 될 때까지 추구하다보면 정작 관심을 가져야 될 것들에 소홀해지기도 합니다. 내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뭔가 새로운 지식을 배우게 되면 반드시 지성 전체의 구조에 변화가 생긴다는 점입니다. 화합물이 외부에서 유입된 새로운 성분에 의해 다시금 변화되는 것처럼 말이지요. 지식을 넓혀나가는 것은 장점과 단점을 모두 안고 있습니다. 열성적인 교육론자들은 배워서 나쁠 게 없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배운 것이 내 안에서 어떤 작용을 일으킬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특히 지적 생활자들은 과도한 지식습득으로 자기만의 개성을 잃게 될 염려가 있습니다. 지식의 축적이 지적 생활의 목표는 아닙니다. 우리는 배운 것을 나만의 개성으로 새롭게 배출하기를 원합니다. 그 길에서 지식은 매우 중요한 이정표인 동시에 때로는 무지가 전에 없던 창의적 발상을 가능케 하는 자유의지가 되어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 둘을 자연스럽게 융합시키는 것이야말로 지적 생활의 성공적인 사례라고 생각됩니다.


# 겉표지를 봐도 무엇이 양서이며 무엇이 악서인지 모릅니다. 두꺼운 책이 좋은 책일까요? 그럴 리 없습니다. 우선 읽어봐야 알 수 있습니다. 책 한 권을 읽는 데 소모되는 시간은 그림 한 편 감상하고, 교향곡 1악장을 듣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긴 시간을 요구합니다. 뿐만 아니라 책은 작가의 긴 이야기들이 가득하기에 무조건 읽고 따라갔다가는 거짓된 이론, 그릇된 사상에 깜빡 속아넘어가 제대로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즉 나의 지적인 잣대를 활용하여 나에게 도움이 되는 책과 읽어봐야 소용 없는 책을 가려낼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지적인 훈련이 충분치 못한 사람은 책을 읽어도 그 안에서 양질의 지적 자극을 건져올리지 못합니다. 그리고 쓰레기 잔해와 같은 엉터리 학설들을 가려내지도 못합니다. 그런 사람이 글을 쓴다고 가정해봅시다. 과연 그의 글이 양서로 불릴 수 있을까요?


# 훌륭한 인물의 어린 시절처럼 ‘나도 말썽 좀 부린다’ 싶은 생각을 하게 되는 젊은이들은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귀담아 들어야 될 것입니다. 세상에는 대학교에서 충분한 지적 훈련을 받고 사회에 나와 경쟁을 통해 나름의 성과와 업적을 달성한 사람들도 굉장히 많다는 점입니다. 유명인들 중 전자보다 후자의 예가 더 많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핵심은 자기계발입니다. 어린 시절 반항아였든 모범생이었든 훗날의 결과는 자발적인 훈련이 어느 정도였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학교 교육은 부차적 수단에 불과합니다. 교사가 가르치는 내용을 따라가지 못하더라도 나중에 훌륭한 인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자기 나름의 성숙과정과 발전과정을 거쳤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교사가 가르치는 내용을 그대로 흡수해 학교 내에서 수재로 불린 사람들도 훗날 기대만큼 훌륭한 인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이때도 중요한 건 나름의 성숙과정입니다. 그들은 절대로 교사가 가르치는 것만 익히지 않았습니다. 학교에서 배운 내용 외에 자신이 추구하는 또 다른 배움의 목표를 설정하고 덧입혔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람이 장차 어떤 인간이 되느냐는 그의 정신력에 달려 있습니다. 지적 생활을 꾸준히 추구하려는 정신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똑똑한 반항아일지라도 자기 세계를 구축하지 못합니다. 같은 이유에서 전 세계에서 시험성적이 제일 좋은 사람이더라도 부여되는 지적 활동에 끌려가는 자는 결국 스스로를 잃고 맙니다.


# 만약 당신이 신문을 경멸한다면 이처럼 유익한 읽을거리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대신 당신은 재미없는 역사서를 찾게 될 것입니다. 역사서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조차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과연 과거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요. 우리는 도서관에서 역사서를 읽습니다. 천 년 전에 로마를 다스렸다는 황제를 만나본 적도 없습니다.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도 모릅니다. 그의 시대에 살았던 대중으로부터 소감을 전해들은 일도 없습니다. 문제는 당신이 읽게 될 그 역사서를 쓴 작가 또한 당신과 마찬가지로 그 시대를 겪어본 적이 없다는 점입니다. 당신이 오늘의 이야기가 담긴 신문보다 위대한 역사서를 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까닭은 그것이 책이기 때문입니다. 값비싼 가죽으로 장정되고, ‘로마사’라는 근사한 제목이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바로 지금 바티칸이 저지르고 있는 부정부패를 읽지 않는 까닭은 이를 보도한 사람이 한낱 기자이며, 그의 기사가 실린 것이 신문이라는 종이조각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편견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지적 생활에는 따로 계급이 없습니다. 지적 생활에도 급이 있다는 생각은 편협입니다.


# 지성인은 타인의 편향뿐 아니라 자신의 편향도 용납하지 못합니다. 지성인에게 편향성은 고통이자 수치입니다. 왜곡된 시선은 절망입니다. 신문을 읽지 않겠다고 선포한 당신의 말 뒤에 이런 생각들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신문을 읽으면 적잖은 시간을 허비하게 된다는 것, 지적인 연구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 특별한 사건을 좋아하는 신문의 특성에 자극받고 싶지 않다는 것, 균형을 상실한 견해에 노출되고 싶지 않다는 것, 자신이 소속된 당파의 편견을 강요한다는 것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당신의 생각에 어느 정도 동의합니다.


# 영국이나 미국처럼 신문이 발달한 나라에서는 반년 후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사건들이 며칠씩 장황하게 신문을 장식합니다. 이에 덧붙여 센세이셔널한 기사들로 독자의 일시적인 기분전환에 목을 맵니다. 지적 생활에서 신문의 최대 결점은 항상 색다른 것만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2200년 전, 아리스토텔레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지난밤에 찰스 다윈이 어디를 다녀왔는지는 그리 중요한 사건이 아닙니다. 언제 발견했는가는 사건의 핵심이 아닙니다. 그 같은 진실에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더욱 중요합니다. 헌데 신문은 이를 채워주지 못합니다. 색다른 사실을 신문이 강조할수록 사건의 올바른 관계는 잘못 전달됩니다


# 과도한 두뇌노동은 분명 몸에 해가 됩니다. 지나침은 부족함보다 못한 법이지요. 허나 그런 이유로 지적 생활을 미리부터 겁낼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은 체질대로 갑니다. 원래 강건한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죠. 따라서 지적 생활과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았음에도 고민이나 스트레스로 정신이 육체에 병마를 가져오는 예도 있고, 나약한 육신 탓에 어쩔 수 없이 지적 생활에 방해가 찾아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두뇌노동과는 별반 상관없는 원인으로 병에 걸리는 사람이 더 많을 것입니다. 그렇기는 해도 도를 넘어선 혹사는 육체에 해를 미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적 생활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는 두뇌의 타고난 재능이 아닙니다. 육체적 기반입니다. 건강한 몸이 받쳐줘야만 원하는 정신활동이 가능해진다는 뜻입니다. 이를 망각한 채 정신이 건강을 압도할 수 있다는 착각은 우리 삶을 병들게 만듭니다


# 책은 지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소수의 선택받은 사람들을 위한 책이 아닙니다. 이 책은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지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확신을 주기 위해 쓴 책입니다. 지적 생활이 몸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오랜 기간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노력 없이는 지적 생활을 영위하지 못합니다. 스스로를 연마해야 합니다. 타인의 삶에 눈길을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명성을 얻겠다는 목표를 세워두고 매일 정해진 계획에 쫓기는 생활로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충분한 시간을 들여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예술은 인간의 이상을 높이기 위해 존재합니다. 보다 순수하고, 보다 강렬하게, 그리고 더욱 위대한 존재로 인간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술이 필요합니다. 인간의 이상을 실현시키지 못하는 예술은 놀이이며, 인간의 존재를 위대하게 발전시키지 못하는 예술은 어릿광대의 분장(扮裝)에 불과합니다.


# 철학의 시작은 공포를 이기는 데서 출발합니다. 종교에 귀의하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며, 과학을 입증하는 데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나만의 사상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는 데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시간이 우리를 용감하게 만듭니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닙니다. 인간은 시간을 두려워합니다.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흘러가는 시간을 멍청히 바라보며 아무것도 하지 못했음을 두려워합니다. 용기는 시간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시간의 소유권이 내게 있음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흘러가는 시간의 강물에 둑을 쌓지 않는 것입니다. 내게 필요한 물줄기만 길어 올려 그것으로 만족하는 삶이 진정 용기 있는 삶입니다. 그런 삶의 태도야말로 내가 추종해야 할 철학의 길입니다.


# 내게 서재의 책들과 책상에 대한 권리가 있다면, 함께했던 정신적 공유가 전부입니다. 늦은 밤, 지성의 요구에 잠들지 못하며 책장을 넘기고, 불면의 시간들을 안타까워하며 펜을 쥐었던 경험이야말로 내가 소유한 모든 것입니다. 그런 날들이 과거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내게 남은 것은, 나의 권리는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 전부인 것입니다. 위대한 사상도 실은 이와 같습니다. 철학의 가치는 반추에 있습니다. 고단한 삶의 언덕 앞에서 잠시 숨을 돌리며, 미친 듯이 나의 뒤를 쫓는 고통을 추적해보는 순간에 있습니다.


# 매일같이 열심히 공부한다고 해서 지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지적인 삶과는 거리가 먼 지식노동에 회의감을 느껴 교양으로부터 멀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지식을 활용하는 기술만 늘어나는 것입니다. 지성과 교양의 궁극적 목표인 개인의 완성과 성취감, 행복은 사라지고 오직 지식이 재물로 변환되는 물질적 성과에 급급하게 되어 지식인임에도 지성인이 되지 못하는 사람도 우리 주변에는 많습니다. 반대로 가난하여 많은 것을 배우지는 못했어도 최소한의 지식에서 인생에 꼭 필요한 주관적 가치관을 발견하고 이를 실천함으로써 풍파와 시련에 굴하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을 갖추게 된 사람도 많습니다. 교양을 추구하는 가난한 분들에게 진심으로 전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일종의 스파르타식 격려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당신은 가난 때문에 부자유를 느끼고 있습니다. 지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그 부자유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유복한 사람은 지적 능력이 있더라도 마음이 동하게 되는 대상이 너무 많게 돼 모처럼 축적한 능력이 분산됨으로써 별로 도움 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당신에게 세상은 박식해질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가난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감사한 일입니다. 가난에도 불구하고 훗날 성공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신이 배워야 될 것들에 대해 주위 의견에 휘둘리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매우 큰 행운으로 작용했습니다. 결국은 겉치레에 불과함에도 박식한 척하려고 주위 의견에 영합하기 시작하면 귀중한 시간을 희생당합니다. 아니, 뿐만 아니라 자기 속에서 솟아나는 흥미도 어느새 사라져버립니다. 당신은 자기 안에서 저절로 생성된 순수하고 활기 넘치는 흥미를 소중히 여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난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에게 그것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를 상실해서는 안 됩니다. 인생은 순수한 흥미에 반응합니다. 그 반응이 우리를 보다 높은 곳으로 인도합니다. 부자들은 당신보다 교양을 익힐 기회가 많습니다. 이는 특권이라며 부당하게 느껴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겉보기와 실상이 항상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이 세계는 평등이라는 위대한 법칙의 작용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요컨대 인간은 누구나 한계를 안고 있습니다. 부자는 호화로운 진수성찬이 차려진 연회석에 앉아 있지만, 그가 먹고 마셔서 소화할 수 있는 양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 이건 좀 ... 동의할 수 없다. 누구도 자발적으로 가난을 선택한 적이 없거늘 교묘하게 합리화하는 느낌이네.

# 독서는 이런 식으로 자신의 능력에 맞게 계획하고 시간을 배분했을 때 최선의 성과가 얻어지는 지적 활동입니다. 외국어 원서만 해도 그렇습니다. 무조건 원서를 구입하고 책장을 펼친다고 해서 이해되는 건 아닙니다. 나의 외국어 구사능력을 고려해서 사전도 찾아봐야 하고, 낯선 문법의 등장에 따로 공부도 하는 등 독서 이외의 시간이 추가될 수 있습니다. 이런 자투리 시간도 독서라는 활동에 포함시켜야 합니다. 외국어에 대한 얘기가 나왔으니까 말인데 어학공부도 최대 2, 3개 국어로 제한하는 것이 옳습니다. 다국어를 구사하는 분들은 나의 이 같은 주장에 반기를 드실지도 모르겠으나, 일반인에게 다국어 학습을 강요하는 건 시간낭비일 뿐입니다. 인생의 불규칙성에 적응해나가는 것도 벅찰 때가 있습니다. 그 와중에 낯선 외국어의 불규칙동사에 끌려다니는 것은 혐오스런 시간낭비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적 생활은 시간을 먹이로 삼습니다. 따라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지적 생활의 핵심입니다. 탐욕스런 인간의 본능은 시간에 대해서도 비슷한 행위를 나타내려고 노력합니다. 우리는 휴식이라는 이유로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할 때가 아주 많습니다. 그 시간들을 절약하지 않고서는 지적 생활에 필요한 기본 토대가 마련되지 않습니다. ‘시간은 돈이다’라는 명제를 들어본 적 있을 겁니다. 많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말인데, 여기서는 시간이 돈과 같다는 뜻으로 해석해볼까 합니다. 돈을 열심히 벌어서 부자가 되는 방법도 있지만, 그 전에 어이없이 지출되는 돈을 절약함으로써 부의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 24시간이라는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고민하기에 앞서 엉뚱하게 지출되는 시간부터 절약하는 게 우선입니다. 저녁마다 외출해서 돈을 물 쓰듯 쓰는 사람이 부자가 될 수 없듯이 저녁마다 파티에 나가 몇 시간씩 허비하는 사람에게 지적 생활에 필요한 시간이 주어질 리 없습니다.


# 시간을 절약하는 가장 유용한 방법은 뭔가를 배우거나 연구하는 등의 지적 활동에 임할 때 의지를 갖고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을 완전히 나의 것으로 만들겠다, 나라는 존재로 가득 채우겠다, 라는 강한 기개를 드러내야 합니다. 그런 날들이 차곡차곡 쌓이다보면 어느 순간 도저히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할 것 같은 장벽에 부딪히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진실한 마음으로 자기를 돌아봐야 합니다. 과연 나는 지금보다 더 성장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에 확신이 든다면 좀더 매진합니다. 성장할 수 있다는 확신은 들지 않더라도 그 무엇보다 내가 이 분야를 연구하고 공부하는 데 기쁨을 느끼고 있다면, 그래서 도저히 포기할 수 없다는 마음이 생긴다면 마찬가지로 좀더 매진합니다. 반대로 이 한계가 넘을 수 없는 장벽처럼 보일 때는 깨끗이 인정하고 돌아섭니다. 어떤 지식과 기술에 익숙해질수록 시점이라는 것이 보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점이란 습득한 지식과 기술이 일상에서 자연스레 발휘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도달하기까지 많은 장벽들이 있습니다. 시간도 적잖게 필요합니다. 흥미를 갖고 배우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꽤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는 수준에 도달하기까지 인내만 있다면 누구든지 가능합니다. 그러나 습득한 지식과 기술이 나의 일생을 좌우하는 데 이르기 위해서는 시간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시간과 더불어 재능과 열의가 필요합니다. 그간 내가 쌓아올린 시간에 어느 정도로 열정과 재능을 담아냈는가가 중요합니다.


# 자신의 정신적 양식은 스스로 찾아내야 합니다. 지식은 음식과 같아서 먹고 싶은 것, 궁금한 것, 내 입에 맞는 것을 탐하는 건 잘못이 아닙니다. 오히려 타인으로부터 억지로 머리에 주입된 지식이 우리 삶에서 탈을 일으킵니다. 당신은 스스로 기억력이 나쁘다고 하셨지요? 그건 일종의 배탈 같은 것입니다. 당신은 억지로 주입된 지식에 혐오감을 느낀 것입니다. 당신의 뇌는 원치 않는 지식을 망각하기로 결심한 것이지요.


# 당신이 어떤 직업을 통해 행복해지고 싶다면 다음 세 가지를 유념해야 합니다. 첫째, 그 일에 필요한 능력을 갖출 것, 둘째, 지나치게 많이 일하려고 하지 말 것, 셋째, 그 일을 사랑한다고 당신 자신을 속이지 말 것. 직업은 생계를 책임지는 수단이면서 한 인간의 개인적 능력을 드러내는 동기가 됩니다. 영국 사람들은 ‘할 일이 없는 것은 고통이다’라는 속담을 즐겨 사용하는데, 일이 없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라기보다는 일이 없어 자신의 능력을 시험할 수 없다는 것이 더 고통스럽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그러므로 할 일이 없는 노년이 고통스러운 것은 당연한 결과겠지요. 철학으로 설명하지 않더라도 노동은 생명이며, 직업이 생활의 척추라는 것은 누구나 공감하는 진리입니다. 수입이 없으면 빵도 살 수 없고, 우유도 살 수 없습니다. 정신적 고통과 육체적 고통이 동시에 엄습하는 것입니다. 특히 젊은 시절의 일자리는 그의 평생을 좌우하는 절대적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전성기는 25세에서 시작해 40대 후반에 마무리됩니다. 그 시기를 일하지 못하고 낭비하는 것은 다른 사람보다 일찍 지옥을 경험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인간은 대부분 청장년기에 큰일을 완수합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 청장년기에 능력의 절정에 도달합니다. 그 시기를 놓친 인생은 아무것도 남지 않은 빈 지갑과 같습니다.


# 우리는 일반적으로 가까운 친구들에 대해서는 많은 생각을 합니다. 우정이란 무엇인가, 그에게 어떤 행동을 보여줘야 하는가, 등을 진지하게 고민합니다.하지만 적에 대해서는 그 같은 진지함을 보여주는 경우가 매우 드물지요. 단순히 마음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또는 그가 나에 대해 불평하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는 시시한 이유를 핑계로 너무 쉽게 적을 만들어버리곤 합니다. 그렇게 서로 적대관계가 성립되면 아무것도 아닌 일에 반발하고, 대항하는 악순환이 시작됩니다. 상대방이 시시한 사람이라면 자기도 시시한 문제에 휘말리게 됩니다. 적을 만들기 전에 좀 더 현명하고 냉정하게 판단해야 하는 까닭입니다. 적으로 인정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들과 싸워야 합니다. 어차피 인간의 본성은 투쟁적입니다. 그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 최선이겠지만, 아직은 그럴 자신이 없다면 부끄럽지 않은 적을 찾아봐야 합니다. 경멸하고 싶은 사람을 적으로 만들지는 마십시오. 당신의 적에게 긍지를 가져야 됩니다. 당신이 그들의 적이라는 사실에 긍지를 가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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