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보에서 표지를 여러번 보았던, 나름 화제가 되었던 책으로 기억한다. 흔한 에세이 같아서 선뜻 집어들지 않았었는데, 이 책을 찾아읽게 된 계기는 브런치에 올라온 작가의 몇개의 글 때문이었다.
'몸에 꼭 맞는 불행'이라는 글로, 그리고 '가난하면서 관대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라는 글로 작가는 나에게 엄청난 공감을 이끌어냈다. 말로 표현해내기조차 구질구질하여 기꺼이 내키지 않는 작고 지친 감정들을 정확한 묘사와 통찰력으로 짚어낸 글에 감명을 받았다. 일반인은 아닌듯 하여 프로필을 살폈더니 바로 이 화제의 책의 저자이셨다.
브런치에서 보았던 비슷한 결의 글들이 이 책에 다소간 담겨있었다. 작가의 성장배경과 해왔던 일들을 보고 나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사회적 약자로서 얼마나 많은 상황에 처해보았는지 그때마다 느꼈던 당혹감과 분노, 그리고 노력들이 이 책으로서 결실을 맺은 듯 했다. 공격하거나 혐오하는 방향을 선호하지 않는 내게, 작가는 최소한의 자기 방어를 이야기했다. 또한 내가 행동하지 않은 탓에 상대방의 무례한 언행들이 반복될 빌미를 제공한다는 부분에 이전보다 훨씬 깊이 공감했다.
부당하게 느껴지는 상황을 겪는이가 이만큼이나 많다는 사실도 더 크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오죽하면 이 책이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여럿에게 위로가 되었는지 세태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정문정 작가님을 좋아하게 될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나도 좀더 섬세한 글쓰기를 하고 싶어졌다.
[발췌]
- 말한 사람을 지긋이 쳐다본 뒤 “어? 상처 주네?” 하고 짧게 한마디 했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건조한 말투였다.
- 혹시라도 기분 나쁜 티를 내면 “농담일 뿐인데 왜 이렇게 예민하냐”며 ‘프로 불편러’ 취급을 받기 십상이라 대부분 그저 참는 쪽을 택한다. 그렇게 참고 참다 어느 순간 불만을 털어놓으면 상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걸 네가 싫어하는 줄 몰랐는데? 진작 말하지 그랬어.”
- 무례한 사람을 만날 때, 어떻게 하면 단호하면서도 센스 있게 의사 표현을 할 수 있을까? 그녀가 “상처 주네?”라는 말이 오래 기억에 남았던 건 그래서였다. 간결하면서도 단호한 사실 그 자체인 이 말은, 상대를 구석으로 몰지 않고서도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성공적으로 전달했다. 상대는 곧바로 사과했지만 상처 준 사람이 되었고, 그녀는 깔끔히 사과받고 넘김으로써 쿨한 사람이 되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녀에게 사과한 상대는 그동안 전혀 제지받지 못한 행동에 한 번 제동이 걸림으로써 ‘이 행동이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자각하는 기회를 얻었다. 그건 사실 그의 인생에서도 다행인 일이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잘못인 줄 모르면 반복하기 마련이다. 높은 자리로 올라갈수록, 나이가 들수록 무례한 사람들이 많아지는 건 타인에게 제지당할 기회를 얻지 못해서이기도 하다. 수평적인 의사소통이 부족한 사회에서는 갑질이 횡행할 수밖에 없다.
- 김찬호 교수의 책 《모멸감》을 보면, 자신의 결핍과 공허를 채우기 위해 한국인이 가장 많이 취하는 방법 중 하나가 다른 사람을 모멸하는 것이라고 한다. 위계를 만들어 누군가를 무시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것이다.
- 나이를 먹어가면서 나는 사람들의 이상한 말에 분명히 대처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무례한 사람들은 내가 가만히 있는 것에 용기를 얻어 다음에도 비슷한 행동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삶에서 만나는 다음 사람들에게도 용인받은(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행동을 반복했다. 또한 나는 그런 말에 대응하지 않음으로써 패배감을 쌓아갔고, 그렇게 모인 좌절감은 나보다 약자를 만났을 때 터져 나오기도 했다. 갑질의 낙수 효과다.
-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당당해!”라는 말은 어떤 상황을 해명한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러니까 예컨대 덩치 있는 여자는 당당하면 안 되는데, 그럼에도 당당하니 놀랍고 대단하다는 뉘앙스가 담겨 있다.
- 식이장애를 이겨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종종 그 비결로 심리적 이유를 들곤 한다. ‘스스로에 대한 칭찬일기를 쓰면서부터’, ‘사랑과 안정을 주는 애인을 만나고부터’, ‘가족의 관심과 배려를 받기 시작하면서부터’ 등이다. 한없이 무력해지는 일상을 견디고 다시 나아갈 힘을 얻는 건 이해받았다는 느낌, 그래도 내가 세상에서 의미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관계 속 인정뿐이다.
-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들은 자신이 그 자체로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믿지 못한다. 그래서 상대가 작은 호의만 보여도 금방 사랑에 빠져버린다.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은 경험이 별로 없기 때문에 달콤한 말로 조종하는 사람에게 속기도 쉽다. 자신이 행복을 누리고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지 못하기에 불행의 세계가 오히려 더 익숙하고, 그곳에서 빠져나올 생각을 하지 못한다. “날 사랑하는 게 맞아?” 하고 의심하고 집착하며, 상대를 시험하려 한다.
- 첫째, 스스로에게 연민을 가지는 것에서 벗어날 것. 그럴수록 너를 함부로 대해도 되는 줄 아는 사람이 주변에 늘어난다. ‘내 인생은 원래 불행해’라고 말하는 걸 그만둬라. 둘째, 일상에서 작은 거절을 조금씩 해볼 것. 거절도 근육이 필요한 일이라 처음에는 어렵지만 작은 것부터 해보다 보면 갈수록 쉬워진다. 의외로, 거절을 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특히 너를 진짜로 사랑하는 남자라면 네가 거절을 한다고 해서 떠나가진 않는다. 셋째, 나는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고 믿을 것. 자존감이 낮으면 관계를 끝낼 때가 되어도 ‘이 사람 말고 또 누가 나를 사랑해주겠어···’ 하고 질질 끈다.
- 이처럼 ‘희생했다’고 하는 생각은 이상한 보상 심리를 불러온다. 겉으로 사소해 보이는 문제로 싸우게 되더라도, 싸우다 보면 일이 커지는 경우가 많다. ‘착한 사람’의 내면에는 그동안 참아온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기 때문이다. 자존감이 줄어드는 만큼 피해의식이 커지기 때문에 걸핏하면 “네가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어!”를 외치게도 된다. 돌이켜보니 혼자 과도하게 기대하고 섭섭해한 경우가 많았다. 문제가 나에게도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는 시간이 꽤 걸렸다. 내가 관계의 키를 잡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상대에게 떠맡겨버리고는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고 속상해했구나. 상대 또한 그게 부담스러웠을 텐데···.
- 사람은 인생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선택지 앞에서 어떤 식으로든 대응해가며 성장한다. 자신이 선택한 것에 대한 책임을 배우며 성인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소위 ‘착한 사람’들은 남들의 눈치를 보느라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잊어버린다. 착하기만 한 사람들은 인생의 선택권을 자신에게 주는 것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과 관련된 문제에서조차 방관자의 자세를 취한다. 진로, 취업, 결혼 같은 중요한 결정조차 마찬가지다. 내가 온전히 선택한 것이 아니기에 잘못되면 포기하는 것도 빠르고 남 탓을 하는 데도 익숙하다. 주인공이 아닌 관찰자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착하다는 평가에 집착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습관을 가지길 권한다.
-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부모는 자녀에게 ‘너는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암시를 반복해 자신에게 의존하는 상황을 만들어낸다. 이런 양상은 연애에서도 흔히 나타난다. “나니까 너랑 만나주는 거야”, “너는 가치 없는 사람이야” 같은 말을 반복하며 파트너를 그런 암시에 걸리도록 하는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집 안의 가스등을 일부러 어둡게 해놓고 “집이 왜 이렇게 어둡지?” 하고 묻는 아내에게 “당신이 예민하군. 잘못 본 거야”라고 질타하면서 아내가 자신의 판단을 믿지 못하게 한 일화에서 유래했다. 이 같은 후려치기 또는 가스라이팅은 피해자가 스스로를 믿지 못하고 의심하게 유도해 가해자에게 의존하게 하는 명백한 감정적 학대다. 가해자는 이런 통제를 통해 자신을 떠나지 못하게 하고,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맺는 방식에까지 해를 입혀 사회생활을 어렵게 한다.
- 그들은 경험한 적이 없는 것이다. 원하는 것을 성취한 경험 말이다. 그 때문에 인생에서 원하는 것이 있다면 노력해서 가지라고 말하는 대신, 상처받지 않기 위해 ‘포기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 패션지를 읽다 보면 자신의 높은 안목을 내세우며 독자의 취향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훈계하는 톤의 칼럼을 종종 접한다. 그것이 잡지의 생리라는 걸 알면서도 그런 문장은 아직도 마음 깊은 곳을 찌른다. 하지만 그런 식의 비난이 적절한가? 많은 취향이 우리가 주체적으로 선택한 것 같지만 사실 타협의 결과일 뿐이지 않은가? 안목이란 자본과 충분한 시간이 갖추어졌을 때, 실패해도 괜찮은 여유가 있을 때 생겨나는 것이다. 그런 글 앞에서는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운 줄 몰라서 후진 취향을 가진 게 아니라고요!” 하고 항변하고 싶어진다.
- 시다는 인테리어 회사에 다닐 정도로 공간에 대한 지식과 관심이 많은 사람이지만, 실제로 그가 택할 수 있는 취향은 철저히 제한되어 있다. 취향은 킨포크인데 현실은 다이소인 셈이다. 포스트잇처럼 자신이 존재했던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만 허락되는 것이다.
- 오랫동안 고민해 선택한 결과가 대단하지 않더라도 자신조차 시시하게 여기지 말라는 것, 같은 방식으로 다른 사람이 선택한 인생에 대해서도 시시하게 여기지 말라는 이야기를 작가는 여러 책에서 반복한다. 작가의 에세이 《어느 날 문득 어른이 되었습니다》에서도 그는 자신의 성격 중 마음에 드는 부분이 “한 가지 일에 실패해도 내 전부가 엉터리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 사람에 대한 상상력이 없으면 다른 사람을 쉽게 미워하게 되고, 윽박지르게 되고, 잘못부터 따지게 된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다양한 입장과 이해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느끼는 것이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꼭 자신이 직접 경험해봐야만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입장으로 살아볼 순 없지만, 상대를 이해해보기 위해서 상상력을 동원하고 공감 능력을 발휘할 순 있다. 상상력이 곧 타인에 대한 사랑이기도 하다는 말은 그런 뜻이다.
- 소설가 김훈이 “기자를 보면 기자 같고 형사를 보면 형사 같고 검사를 보면 검사 같은 자들은 노동 때문에 망가진 것이다. 뭘 해먹고 사는지 감이 안 와야 그 인간이 온전한 인간이다”라고 했는데, 나는 이 말을 아주 좋아한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 일관된 모습을 연기할 필요는 없다. 나만의 독창적인 캐릭터는 의외의 모습들이 모여 완성된다.
- 우리는 저마다 읽히기를 기다리는 책 같아서 누군가 나를 읽어나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기를, 대충 읽고선 다 아는 양 함부로 말하지 않기를, 다른 책 사이에서 나만의 유일한 가치를 발견해주기를 원한다. 그럼에도 정작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어떤지? 토마스 만은 《토니오 크뢰거》에서 우리가 어떤 사람을 간단히 한마디로 규정해버리는 것을 가리켜 “당신은 (그런 식으로) 처리돼버렸군요!”라고 표현했다. 우리는 누가 나를 ‘처리’해버리면 화를 낼 거면서 남들은 쉽게 ‘처리’해버린다.
- 시니컬은 경험을 통해 학습되고 강화된다. 날 때부터 시니컬한 사람은 없다. 시니컬은 ‘혹시나’가 ‘역시나’가 됐던 기억들, 기대했던 일에 연달아 실패했을 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다.
- 학교에서 배운 세상과 현실 세상의 괴리를 깨닫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는다. 더는 상처받지 않는 방법은 더는 기대하지 않는 것이다. 시니컬해지는 것은 “안 될 거야”라고 말하는 것일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아등바등하는 모습과 결국 실패하는 모습을 보면서 “거봐, 내가 그럴 거라고 했지”라고 예언하는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세상 물정 잘 아는 현명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 분노하고 불만을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멈추지 말자. 어릴 때 배웠던 것만큼 아름답지만은 않은 세상이지만 ‘그래도 혹시’의 마음만은 잃어버리지 않도록. 최선이 없다면 차선을, 차선이 없다면 차악이라도 선택해야 한다는 절실함만이 최악을 막아준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반인종차별주의자, 반전주의자, 페미니스트 등 과거의 이상주의자들이 간절히 꿈꿨던 세상이기도 하다. 세상을 무조건 긍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시니컬해지지 말자는 건, 철저하게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으로 돌아와서 용기 있게 현실을 직시하자는 뜻이다.
- 심리학 용어 중 ‘퍼스널 스페이스(personal space)’라는 말이 있다. 개인이 쾌적하게 있기에 필요한 점유공간을 뜻하는 말인데, 나라마다 사람들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거리가 다르다.
- 나의 퍼스널 스페이스를 지키면서 최대한 불편하지 않게 대화를 종료해야 할 때가 있다.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예를 들어, 누군가 의도를 알 수 없는 질문을 던졌을 때는 섣불리 대답하지 않는 것이 좋다. 친하지 않은 사람이나 상사에게 갑자기 “요즘 바빠?” 하는 질문을 받았을 때는 “아, 과장님이 더 바쁘실 것 같은데요. 요즘 어떠세요?” 하고 대답하는 것이다. 그러면 보통 상대는 여기 답하면서 자신이 질문한 의도를 함께 말하기 마련이다. 단순히 안부를 물은 것인지, 업무를 맡기기 위해서인지를 들은 후 나의 상황을 말해도 늦지 않다.
- 질문자의 의도를 곧바로 알 수는 있지만 대답하기 불쾌한 경우에는 딴청을 부리는 것도 방법이다. 예를 들어 “너 페미니스트지?” 하는 질문을 받았을 때 “네”, “아니요” 같은 대답부터 하지 않고 “페미니스트가 정확히 무슨 뜻이에요?” 또는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하고 물어보는 식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불쾌한 티를 내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상대는 “여성우월주의자를 페미니스트라고 하지 않나?”, “네가 아까 하는 말을 들어보니까···” 같은 해명을 하다 스스로의 논리가 빈약함을 깨닫고 급히 화제를 돌리게 된다.
- 질문자의 의도를 모르더라도 대답하기 꺼려지는 질문, 논쟁이 예상되는 질문에는 그저 들어주기만 하는 것도 방법이다. 어차피 모든 사람과 토론을 할 수는 없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니?”, “최저 시급이 오른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니?” 같은 질문을 친분이 없는 사람에게 받았을 때는 그저 대화의 공을 상대에게 넘겨주자. 보통 상대가 나를 훈계하거나 떠보려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그쪽으로는 별로 생각을 안 해봤어요” 하고 나의 패를 내보이지 않는 선에서 끝내는 것이 대화를 빨리 종료하는 기술이다.
- 이처럼 나의 공간을 문득문득 침범하는 사람들은 대개 나를 잘 모르고 스쳐 지나가는 이들이다. 어쩔 수 없이 한 공간에서 계속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상황일지라도 나의 깊은 감정까지 공유할 필요는 없는 사람이다. 그런 이들에게까지 나의 공간을 열어 보일 필요는 없다. 또 사람마다 퍼스널 스페이스에 대한 감각이 달라서, 나는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자신에게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며 훅 들어오는 사람도 있다. 그들에게 끌려다니지 않고 나만의 속도로 관계를 이어가려면 나름의 대처법이 필요하다. 평정을 유지하면서 나만의 고유한 공간 감각을 고수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이는 결국 ‘나를 지키는 법’과도 관련되기 때문이다.
- 성희롱을 당했을 때 가장 먼저 할 일은 ‘내가 예민한 사람인 거겠지’, ‘그분은 그럴 사람이 아니야’ 하는 생각을 멈추는 것이다. 아무 일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제지하거나 불쾌감을 표현하기 어려워진다. 두 번째로 할 일은 웃지 않는 것이다. 정색하면서 거부하기가 힘들더라도 최소한 웃지는 말아야 한다. 많은 여성은 성희롱을 당했을 때 순간적으로 너무 당황해 웃어버리곤 한다. 거절할 때조차도 너무 단호하게 들릴까 봐 머쓱하게 웃는다
- 때로는 무례한 사람들과 싸워야 한다. 나는 그런 상황에서 주로 두 개의 문장을 사용한다. 바로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와 “그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다. 여기서 핵심적인 것은 ‘일일이 상처받지 않는다’와 ‘상대방 페이스에 휘말리지 않는다’ 이 두 가지다. 미셸 오바마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그들 부부를 공격하는 트럼프의 행태를 간접적으로 비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저급하게 가도, 우리는 품위 있게 갑니다(When they go low, we go high).”
- 흔들리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평가나 조언을 거대하게 받아들인다. 확신 있는 사람은 남에게 물을 시간에 그 일을 이미 하고 있다. 일상에서 무례한 사람이 당신을 평가하거든 ‘저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하고 넘겨버려라. ‘그의 말이 사실일지도 몰라’ 하면서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 그는 나를 잘 모를뿐더러 나에 대해 열심히 생각하지도 않는다. 몇 년 후 “그렇게 말한 적이 있는데 기억하세요?” 하고 물어보면 분명 기억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런 말을 곱씹는 게 억울하지 않은가? 나의 과정을 모두 아는 사람은 나뿐이며,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은 남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의 말에 흔들리려 할 때마다 나는 이렇게 다짐한다. ‘사람들이 말하게 두고, 나는 나의 일을 하러 가자.’
- "길을 가는데 갑자기 누가 자기에게 뭘 주고 갔어요. 선물인 줄 알고 열었는데 안을 보니 쓰레기예요. 그럼 질문자는 어떻게 하겠어요?” 질문자가 말했다. “그냥 쓰레기통에 버리겠죠.” 스님이 이어 말했다. “나쁜 말은 말의 쓰레기입니다. 말이라고 다 같은 말이 아니고, 그중 쓰레기가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질문자가 가만히 있었는데 그 사람이 쓰레기를 던졌어요. 그러면 쓰레기인 걸 깨달았을 때 그 자리에서 쓰레기통에 탁 던져버리면 됩니다. 그런데 질문자는 그 쓰레기를 주워서 1년 동안 계속 가지고 다니며 그 쓰레기봉투를 자꾸 열어보는 거예요. ‘네가 어떻게 나한테 쓰레기를 줄 수 있어’ 하면서 그걸 움켜쥐고 있는 거죠. 그 사람은 그 쓰레기를 버리고 이미 가버렸잖아요. 질문자도 이제 그냥 버려버리세요"
- 자존감 도둑들, 첫 번째는 나를 감정 쓰레기통 삼는 사람이다. 부모와 자식 간, 특히 감정적으로 깊이 교류하는 엄마와 딸의 관계에서 특히 이런 경우가 많다. 남편과 싸울 때마다 딸에게 남편 욕을 하고, 남편을 습관적으로 비난하면서 딸이 자신의 감정을 받아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엄마들을 많이 보았다. 자식이 그런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 하면 ‘지 애비랑 똑같다’, ‘이기적이다’라며 비난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식은 부모의 감정받이를 하려고 태어난 게 아니다. 그런 부모 밑에서 자라왔다면 어릴 때는 어쩔 수 없더라도 성인이 되면 최대한 빠르게 독립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이를 볼모로 한 정서적 협박에 시달려 원하는 인생을 살지 못하게 된다. 친구나 연인 관계에서도 항상 하소연만 하거나, 내 이야기를 꺼내도 금세 자기 얘기로 돌아가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뭔가 일이 있어서 일시적으로 그런 게 아니라 항상 그런 사람이라면 최대한 거리를 두는 것이 좋다. 그런 이들은 성숙하지 못하다. 자신의 불행에만 함몰되어 당신을 존중할 여력이 없다.
- 두 번째로, 걸핏하면 “난 원래 그래”라고 말하는 사람과도 오래 관계하면 부작용이 생긴다. 관계란 애초에 누군가 참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원하는 것을 주고받는 것이다.
- 세 번째로, “난 뒤끝은 없잖아”, “내가 좀 사차원이잖아”라고 말하는 사람도 조심해야 한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대개 생각나는 대로 내뱉는다. 아무렇지 않게 남을 지적하고 비난한다. 이것이 ‘솔직한 의사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가식적이라서 그에게 ‘싸가지 없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사람 관계에는 서로 지켜야 하는 선이 있고, 그것이 상대에 대한 예의라는 걸 알기 때문에 조심하는 것이다.
- 권위적이거나 시대착오적인 발언을 하는 사람을 보면 “혹시 지금이 몇 년도인가요? 어제까진 2017년도였는데” 같은 농담을 한다. 또 회사 상사가 퇴근 시간 이후에 전화를 하면 전화를 받자마자 “고용노동부에 신고할 겁니다. 조만간 딱지 받으실 거예요”라고 하기도 한다. 평소에도 농담을 많이 한다는 이미지를 갖게 되면 나름대로 장점이 있다. 시간상으로 무리한 요구를 하는 클라이언트에게 “당연히 그때까지 가능합니다. 잠은 죽어서 자면 되니까요” 하고 농담을 한 적도 있다.
- 그들을 만났을 때 내가 대처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문제가 되는 발언임을 상기시켜주는 것이다. 우리는 자유롭게 말할 수 있지만, 다른 이의 인권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그렇다. 누군가 그 선을 넘었을 때 경고하는 것은 언어 폭력에 대처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식이다. 편견이 심한 말을 들었을 때, 흥분하지 않고 “제3자가 듣는다면 오해하겠는데요?”라고 말하거나 “당사자가 들으면 상처받겠네요”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감정을 싣지 않고 최대한 건조하게 말하는 것이다.
- 두 번째는 되물어서 상황을 객관화하는 것이다. 상황을 이해 못 한 것처럼 천진난만하게 되물으면 더욱 좋다. 예를 들어 누군가 농담이라며 “저 사람은 얼굴이 참 이타적이네”라고 한다면 “아, 저 사람이 못생겼다는 뜻이죠?”라고 되묻는 것이다. 그렇게 물어보면 상대는 순간적으로 머쓱해하며 자신의 표현을 점검할 것이다.
- 세 번째는 상대가 사용한 부적절한 단어를 그대로 사용해 들려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영감탱이는 욕이 아니라 친근한 표현이라서 썼다”고 한다면, “저도 친근하게 영감탱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하고 응수할 수 있다. 상대가 사용한 논리를 그대로 가져와 돌려줄 수도 있다. “가슴이 작은데 왜 브래지어를 해?” 하고 묻는 남자에게 “그럼 오빠는 왜 팬티 입어?”라고 할 수 있듯 이상한 논리로 상대를 공격하는 사람에게는 역지사지를 경험하게 할 필요가 있다.
- 네 번째는 무성의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육아 전문가들은 아이에게 여러 번 설명했음에도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거나 떼를 쓴다면 달래주지 말라고 조언한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쳐다만 보거나, 하던 일을 멈추고 그 자리를 떠나는 것도 방법이라고 한다.
- 다섯 번째는 유머러스하게 대답하는 것이다. 애정은 없고 자기 자랑만 있는 잔소리를 들으면 “요즘은 잔소리하려면 선불 주고 해야 한다던데요?”라고 하거나 “저희 부모님도 30년 동안 노력하다 포기하셨는데 어떻게, 가능하시겠어요?” 하고 농담하듯 받아치면 상대도 더는 말을 이어가기 힘들 것이다. 말이 길어질 것 같으면 “그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하고 화제를 돌리는 것도 좋다.
- 질문을 바꿔야 한다. 기존의 질문 ‘그 사람은 그것만 빼면 괜찮은가?’와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고칠 수 있을까?’는 틀렸다. ‘그의 단점이 객관적으로 문제가 되는 수준임이 분명한가?’와 ‘단점이 개선되지 않는다 해도 그것을 내가 감당할 수 있는가?’로 옮겨가야 한다. 인간은 잘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 후, 그가 바뀌지 않더라도 내가 그를 감당할 수 있는지 물어야 한다.
- 재능이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게 아니고, 스스로 있다고 생각하는 그 믿음이 중요한 거다.” 남들이 지적하는 말을 듣고 단점을 없애는 부분만 집중하다 보면 장점도 함께 없어지고 만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좋아할 때, 단점이 있더라도 특정한 장점이 크게 발휘되는 사람을 보고 매력적이라고 느끼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원래 반짝거렸던 것들을 ‘다른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로 수정하다 보면, 결국 그것은 아무도 좋아하지 않게 되어버린다.
- 특히 상대의 행동을 넘겨짚고 곱씹는 버릇을 없애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 자꾸만 의도를 곱씹다 보면 피해의식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해되지 않는 상대의 반응을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하고 드러난 사실 자체만 봐야 한다. 그처럼 적당한 무심함과 둔감함은 상대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중하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태도이기도 하다. 직장에서 이런 마음으로 서로를 대한다면 스트레스가 확연히 줄어들 것이다. 내가 만난 성공한 직장인들의 롱런 비결이 이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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