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Review/Book

고래




몇년전부터 여기저기서 추천을 받았던 소설인데, 막상 그 두께감 때문에 선뜻 읽지 못하다가 엊그제 누군가의 기사에서였나, 다시금 그 소설에 여럿이 경탄해마지 않길래 나도보겠다 작심을 했다. 최근 사하맨션에서 다시금 시작한 소설읽기가 탄력을 받기도 했고 , 마침 그 책은 회사의 친구가 가지고 있는 걸 알아서 , 빌려보게 되었다.

오랜만에 보는 두께였다. 그리스인 조르바도 이정도 두께이긴 하나(대략 5백여페이지) 민음사 세계문학 특유의 가로로 좁고 위아래로 긴 편집 때문에 단순 글자의 양만으로 비교해보면 그리스인조르바가 더 글자량이 적을지도 모르겠다. 학창시절에 읽었던 괴도루팡이나, 람세스 같은 것들이 생각나는 본격 소설이었다. 이런 류의 소설은 초반에 쭉쭉 치고 나가지 않으면 곧 이도저도 못하고 정체에 빠진다는 걸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었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첫 문장을 읽기 시작했나. 사전에 내용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던 나에게 충격을 준 것은 이 소설이 한국특유의 걸쭉하고 찐득한 필체로 서술되어 있다는 것. 마찬가지로 배경도 얼핏 걸쭉한 시대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소설의 배경이 꼭 모던할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준비되지 않은 채 그 시대의 책을 읽는 것은 내게 왜인지 부담이었다. 사실 그 정체는, 시대정신을 다루고 있는 책이 내게 갖게하는 의무감 같은 것 때문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 역사를 잘 알고, 복기하며 현 시대의 변화를 민감하게 관찰, 목소리를 내는 그런 역할에서 도망가고싶은 마음은 아니었을까.

어쨌거나 이 책은 잘 읽힌다. 중간중간에 독자에게 직접 말을 건내는 작가의 이상한 취미가 희한한 느낌을 주는 걸 제외하면, 새로운 인물이 계속해서 등장하면서도, 개별적으로 떨어지지 않고 인과관계가 이어지는 것이 정말 독특한 구성의 묘미가 있었다.

형식도 파괴적이지만 못지않게 단어도 꽤나 파괴적이어서 가끔은 지하철 사람들 옆에서 책장을 펼치고 있는 것조차 저어될 때가 있었다. 나아가 내게 소설의 제1목적인 아름다운 문장을 수집하는 것은 이번 책에서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책이 정말이지 마음에 들었던건 특별한 주옥같은 문장이 없이도 담담한(아니 오히려 적나라한) 표현들이 사랑스러워지기까지, 그 사소한 사건의 나열들이 인물의 감정과 성격을 속속들이 이해할 수 있게끔 인도하는데에 감탄했기 때문이다.

그와중에 독자에게 말을거는 작가의 이상한 취미와 감정을 최대한 배제한 채 주인공의 욕망과 행동을 걸지게 묘사하는 것은 마치 한편의 판소리를 연상케 하거나 변사의 웅변을 듣는 기분이었다.

이 이야기는 무엇보다 어떤 의무의식을 불러일으켰든데, 쉽게 말하자면 난 아직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읽어야할 것 같은 한국의 소설들, 예컨대 토지와 같은 그런 소설의 프리뷰를 접한것 같은 느낌. 몸풀기소설 같은 느낌.

시대적 상황을 아예 담지 않은 것도 아니고(가끔 실제 모델을 추측케하는 인물과 상황들이 여럿 등장함) 기구한 그시절의 밑바닥 인생들의 아픔이 느껴져서인가. (사실 이건 토지에 대한 오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고보니 드라마는 다 재벌가의 이야기로 대리만족하는데 소설은 어찌 밑바닥 인생으로 동정심을 채우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그래서 그 시대적 소설에 대한 의무감을 털어버렸다는 것은 아니고, 그만큼 뭔가 느껴지는 바가 있다는 것. 뿌듯함이 느껴진다는 것이 포인트다.

추천해마지않는 소설! 올해의 비범작!

728x90

'Review > Book'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샬로테  (2) 2020.01.18
여행의 이유  (0) 2019.08.22
사하맨션  (0) 2019.07.27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0) 2018.10.19
몸의 일기  (2) 2018.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