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지막까지 얼마나 성실히 쓸 수 있을런지는 모르겠지만,
쓰고 싶은 마음이 들 때 시작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아직 끝나지 못한 여행기들 때문에, 가장 프레시한 것이 뒤로 미뤄지는 것은 미련한 일이지. 마치 마트에서 장을 봐온 신선한 식재료가 있는데, 지난번에 장 봐와서 유통기한이 얼마 안남은 것부터 먹어 치우는 것과 같은 미련한 짓이다.
그럼 어디 함 시작해보실까.
# 크로아티아 출발전
사실 크로아티아에 내가 갖고 있던 이미지는 이런 것이었다.
발칸, 휴양도시, 꽃보다누나, 해안도로, 팬시함.
그래서 약간 저어했다. 왠지 너무 유행따라 여행지를 소비하는 그런 기분이어서. 3년전에 꽃보나 누나 광풍 이후 크로아티아는 한국 여행자가 엄청나게 늘었다는데. 그 뒤에 줄서는 기분이 들까봐서였다.
그렇기에, 어쩌면 여행을 준비하는 내내 내가 그렇게 소극적이었던 걸지도
사실 영훈이와 같이 여행을 가는 것은 친구와 가는 것과는 달리 상의할 일이 많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준비력이 좋은 아이에게 모든 걸 맡기면 편해진다는 걸 깨닫고 게으름을 맘껏 부릴 수 있었다. 겉으로는 게으름을, 속으로는 크로아티아에 대한 작은 기대감을 감추고 있었다.
# 네일
여행때마다 특별히 여행기분을 내기 위해 연례의식처럼 해왔던 네일아트를 하러 가서, 또 늘 그렇듯이 갈팡질팡하며 색깔을 못 정하고 있는데 카톡단체창에서 아이디어가 튀어나왔다. 마침 리우 올림픽 기간이어서 브라질 국기 에디션으로. 노란색 + 초록색,, 뒤이어 크로아티아를 가니까 크로아티아 국기는 어떻냐고 이미지가 빵 떴다. 그래 이거다!!!
크로아티아의 날씨와도 닮은 쨍한 원색의 조합. 젤네일이 아니라서 흰색+빨강 체크는 넣지 못했지만 의기양양하게 집에 돌아와 네일아트를 자랑했더니, 프랑스 버프를 받았다.
# 콜밴
얼레벌레 떠나는 날이 되었다. 떠나는날 일은 무척 바빴다. 사실 서두르지 않았어도 평소 7시 정도엔 끝났을수 있는데 맘이 급했다. 밤 비행기는 여행 시작일을 앞당기는 장점이 있는데 , 터키항공을 곧 죽어도 양보할 수 없었던 건 2박을 밤비행기에서 때우는 최상의 스케줄 때문이었다. 하지만 스탑오버로 선택한 터키에서 쿠데타가 날줄까진 예상하지 못했더랬지....아...ㅠㅠ 이 이야긴 다시한번 등장할 예정.
떠나기 며칠 전 영훈이가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여행얘기를 했는데, 마침 방학중인 친구 훈성이가 공항까지 롸이드를 해준다고 했단다. 너무 오바스러운가 싶어서 거절할까도 했는데 뭐 누이좋고 매부좋은지 나름 신이 나있길래 알겠다 했더랬다. 그런데 출발 당일날 회사에서 마감을 하고 있는데 훈성이가 나 퇴근도 하기전에 우리집에 기사하러 와 있다고 연락이 왔다. 얘도 참 가만보면 어지간히 부지런한듯. 누군가 바래다주는 여행이란건 참 고마운일이다. 그사람은 날 데려다주고 약간의 상실감을 가지고 온길을 되돌아갈텐데 그 시간과 발품이상으로 내가 의미있는 사람 이란 뜻이니. 고마운 마음 으로 이친구의 호의를 잘 받아야지.
승차감 좋은 올랜도를 타고 해치백에 트렁크 두개를 싣고 마치 공항 콜밴을 부른듯 편히 도착했다. 고맙다 훈성아. 나중에 오리 꼭 사줄께.
# 경유
늦어서 면세점 쇼핑도 못하고 죽은듯이 자면서 어느새 도착한 터키 이스탄불의 현지 시각은 새벽 4시 30분. 크로아티아로 떠나는 환승 비행기는 오전 9시 20분이니 거의 5시간이 남았다. 아무리 공항을 잘근잘근 훑어봐도 3시간이 넘게 남는다. 결국 만들지 않고 온 PP카드를 한탄하면서 동반1인 값을 내고 라운지에 입성했다. 사람이 많아서 자리도 별로 없었지만 눈치 하나는 귀신같이 빨라 맨 구석자리에 앉은 가족이 일어날때쯤 잽싸게 소파자리를 겟했다.
여유를 찾는다는 건 이런 작으면서도 편안한 것에서 비롯되는데, 편한한 소파에 등을 대고 나니 비로소 창밖으로는 터키의 맑은 하늘이 상쾌한 아침을 시작한 것이 눈에 들어오고, 앞에 테이블에 (북유럽나라가 분명한) 크림색 머리카락을 한 엄마와 아이가 그림카드를 가지고 노는 것이 흐뭇해보였다.
환승을 한시간쯤 앞두고 우리는 생전 처음으로 '라운지에서 샤워를 하기'로 결정했는데, 동반1인의 뽕을 뽑겠다는 자본가적 심리에서 시작한게 아니라고 고백할 순 없으나 재미난 경험이었다.
세상에 공항의 환승 구역만큼 무국적인 공간이 없는데, 어느나라 사람 할 것 없이 신기하게도 사람들을 어딜가나 비슷하다. 어디든 자리만 나면 앉아서 배를 채우고, 다리를 펴고 쪽잠을 자고 아이를 사랑스럽고 번거롭게 지켜본다. 최소한의 옷가지와 가방속 물건과 가이드북의 글씨만이 나의 정체성을 지켜주고 있었다면, 샤워실에 들어가 그 마지막 보루인 옷을 벗고 맨 몸이 되자니 이 무국적의 공간에서 마지막 한꺼풀마저 벗겨져 날것의 인간이 된것 같은 느낌? 이제, 이 라운지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모두 함께 그냥 '인간'이 된 기분?
어쨌든 머리는 감고 보는 거랬다고, 샤워 한방에 없던 힘도 생겨난 우리 둘은 피곤함을 물리치고 상쾌한 아침이 되어 크로아티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 도착
공항 도착지밖에 , 특히 날씨가 화창한 곳은 출구에 꼭 저렇게 천장을 길게 빼서 극한 대비를 만들것을 권유한다. 마치 띠처럼 보이는 파란 하늘이 이곳에 대한 설렘을 극대화할 것이니. 햇빛으로 처음 걸어 나오는 순간 습도는 안높지만 청명한게 첫 느낌이 둘다 소리를 지를만큼 어메이징했다. 그치만 땡볕에선 조금 걷다보니 금방 더워지긴 했어 ㅜㅜ 다행히 그늘에선 쾌적하다. 앞으로의 날씨가 기대되는대목. 여행에서 날씨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 렌트
차를 수령하는데 1시간이 걸렸다. 한 40분은 줄을 섰고 20분은 픽업하는데 걸린 시간. 날씨도 좋고 사람들은 별로 찡그리지도 않은 채 마냥 기다리고 있었다. 뭐, 대수랴 싶은 표정. 급한 건 역시 우리같은 한국인들 뿐인가. 한국서 미리 예약한 차는 골프였는데, 마침 그 차가 빠졌는지 (아니면 상술인지, 돈을 더 냈으니까) 차를 업그레이드를 해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가 고른건 벤츠 A클. 작지만 잘빠진 차는 맘에 쏙 들었다. 이후에 처절하게 느꼈지만 무시무시했던 크로아티아의 해안도로에서 나의 걱정되는 맘을 최소 300g 정도는 덜어줬달까.
# 패션
뜬금없는 선입견일지도 모르지만 외국 여자들이 한국보다 자유로워 보이는것은 나이를 막론한 그들만의 개성있는 own's 패션 때문이 아닌가 싶다. 여유있는 표정도 함께 . 부귀해보이거나 나이에 따라 레벨이 올라가는 명품으로 멋부린게 아니라, 티한장에 바지를 입어도 자세가 곧고, 자기 몸을 이해하고, 본인이 예뻐보이는 핏을 살린 패션. 단 비대하지 않은 몸뚱이는 필수다
# 몬테네그로
두브로브닉 공항에서 시내방향과 반대로 몇십 킬로만 가면 몬테네그로 국경이 나온다. 국경을 넘어 두시간쯤 달리면 코토르라는 도시가 나오는데 그곳이 우리의 첫날 목적지였다. 렌트한 차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30분도 안왔는데 정체가 시작되었다. 생각지도 못한 첫번째 난관. 국경리스크
처음에는 별 생각없이 기다렸는데, 10분이 지났는데도 5미터도 못가는 걸 보고 이게 웬만한 정체가 아니라는 것이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앞뒤 차에 사람들이 슬슬 밖에 나와서 끝도 없는 행렬을 살펴보고 들어갔다. 에어컨도 없는 차의 탑승자들은 아예 밖에 나와 그늘 자리에 드러누웠다.
40분쯤 기다렸나. 코토르 도착예정시간이 2시가 넘어갈 무렵, 결정을 내려야 했다. 갈것인가 포기할 것인가. 돌아오는 시간까지 감안하면 두브로 숙소를 6시에 체크인 예약했으니 시간이 별로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얼마나 줄이 긴지 살펴보려고 잠깐 나와서 몇차를 거슬러 올라가보았다. 끝날듯 안끝나는 차량의 행렬에 오기가 생긴 나는 구글지도에 표시된 국경언저리까지 걸어갔다가 뭔가 비스므리하게 생긴 건물을 확인하고, 오는길에 순서를 세어봤는데 우리차는 68번째였더랬다. 하지만 이 속도로는 족히 한시간은 더 기다려야 했다. 포기.
첫날부터 일정이 틀어지자니 아쉽기도 하여 돌아오는 길에 516번 지방도를 타고 크로아티아 땅끝 해안까지만 가보자고 하고 방향을 바꾸었다. 아까와는 다르게 차는 별로 없이 황량하고 휑한 경관에 굽이굽이 길이 이어졌다. 30분도 안되어서 해안가에 다다랐는데 갑자기 나타난 바다에 감탄할 새도 없이, 경찰 같은 사람이 차를 세우길래 서고 나니 여기가 국경이란다. 당황하여 주섬주섬 여권과 그린카드를 건네고 일단 패스했다. 이게뭐지? 여긴 왜이렇게 차가 없지? 우리가 몬테네그로에 들어온건가?
이때 울리는 문자.
'몬테네그로에서 한국으로 걸때 5500원/분, 받을때 504원/분 데이터 2원/0.5kb'
하하하하하하 . 비싸기도 하지. ㅡㅡ;
따라란 이것이 해안쪽 국경을 통해 만난 절경. 산과 구름에 둘러싸인 내해가 깊숙히 들어간 곳에 코토르가 있다. 사진 1시방향 어렴풋이 보이는 겹겹의 산 더 너머에 코토르가 있다.
오예, 입 to thd 성
아까 그 국경을 넘었더라면( 할수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이 바다의 뷰는 못 봤겠지. 그 길이 빠른 길이긴 했어도 해안쪽 도로는 아니었으니께. 이미 돌아와서 코토르를 가기엔 늦은 시간이었지만, 여기서 바라보니 이처럼 검은 산에 둘러싸인 그 도시의 전경이 어떨지 약간은 짐작이 되어 약간의 위안이 되었다.(코토르는 이탈리아어로 검은산이라는 뜻)
# 해변
코토르를 포기하고 대신 근처 시내에 식당을 찾아 뭘 좀 먹기로 했다. 헤르체고노비 근처 lgalo라는 지역이다. 시내쪽으로 내려오니 해수욕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차를 대고 잠깐 내렸는데 헐벗은 사람들이 찻길까지 꾸역꾸역 몰려있었다. 반팔에 긴바지를 입은 나를 자꾸 흘끔흘끔 쳐다봐서 부끄러워졌다. 이렇게 이질적일 수가 없다.
뭔가 외국의 해변가 같으면서도 이상한 이 느낌은 저 해괴하리만치 큰 나무 아래에 너무 빡빡하게 비키니어들이 몰려 앉아있기 때문인것 같기도 했다. 마치 망원 한강공원에서 손뻗으면 닿을만한 자리에 돗자리 빽빽하게 펴놓고 몰려앉아 짜장면 시켜먹는 것 같은 이상함.
하지만 사람들도 사진도 뭔가 모르게 묘하게 마음이 끌려. 이상한 매력이 있다.ㅋㅋㅋ
나름 처음으로 발담근 아드리아해의 첫 느낌은 미지근.
몬테네그로는 잘 사는 나라는 아니지만 소박하고 조용하고 거무죽죽한 매력이 있었다(칭찬임)
황량한듯 정비가 안된 도시의 느낌에 거친 산에 둘러싸였지만 파란 바다와 자원을 가졌으니, 크로아티아와는 다르게 또 색다른 포텐으로 어필할 날이 올 것이다.
# Restaurant Mali Jay
첫 식당은 정말 느낌대로 골랐다. 식당서빙을 하는 할아버지가 음식을 다 주문받더니 음료를 고르는데 강력하게 Loza 라는 걸 추천했다. 음료 메뉴중에 맨 위에 있기도 했고, 가격도 1유로, 흔쾌히 두잔을 시켰다. 그랬더니 이 유리잔에 나온 이것은. 술?!
분명 우리에게 주차 안내까지 해주었고, 운전해야하니 논 알콜로 달라고 했는데, 이 아자씨 영어를 반쯤 알아듣는 것 같긴 했지만 그래도 너무 대놓고 술을 ㅠㅠ
게다가 향만 한번 맡았을 뿐인데 절로 미간이 찌푸려지는 이것은 알고보니 포도맛 라키야. 라키야는 발칸반도를 대표하는 전통주인데 주로 식전주로 원샷하는 이 술의 도수는 50도. 오마이갓
음식은 대체로 짜지만, 대체로 양이 많다.
여느 유럽이 그렇듯 물이 비싸고 음료도 비싸다 (250ml 병콜라 오랜만에 봄)
하지만 50년전통이라고 하고, 야외에 로맨틱한 테이블에 잘 대접받았으니 술은 눈감아줄께요.
시내를 나와 다시 크로아티아로 향하는데 거친 산이 벽이 되어 도로를 가로막는 기분이 든다. 이곳의 느낌은 쭉 이럴것 같아. 이후 쭉 자동차 여행을 하면서 느꼈지만 발칸반도의 자연지형은 정말 천의 얼굴을 가졌다.
이것은 시작일 뿐이었어.
p.s
# 물가도 싸고 유로도 받아서 여러모로 편했던 몬테네그로에서 장을 봤다.
햄천국에서 행복하게 쇼핑한 햄을 마지막날까지 싸들고 다니다가 결국 못먹고 왔다는 슬픈 이야기.
# 오해하지 말자, 사진찍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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