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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체로 디테일을 통해서 전체로 접근한다.
일종의 BOTTOM UP 방식이랄까. 함정이라면 TOP DOWN을 안하는 게 아니라 못한다는 것?
여행을 가서 그 감정을 캐치할때도 순간적 장면의 냄새나 색깔 소리 느낌(육감)을 적는다.
그리고 그게 모여 여행기가 된다.
책을 읽을 때도 작가가 적는 단어의 면면, 상황의 예리한 묘사, 독창적 표현에 집중하며
그런 특징이 잘 드러나는 작가와 글을 선호한다.
예나 지금이나 이 글을 통해 작가가 하려는 말 (주제파악) 에는 매우 약하며
그래서 평소 생활에도 작은 행동으로 드러나는 사람들의 의도 파악에도 그렇게도 무지하다.
MBTI의 감각적인 유형은 변하지 않았다. 내 장점이자 단점.
책 리뷰를 쓸때마다 전체적인 관통 주제보다는 한구절 한구절을 필사하느라 늘 몇바닥이 되고마는
옮긴 구절이 부끄럽다.
그래도 오늘도 여전히 옮겨 쓰는건
다시 글을 보면 부끄러워 또 고치고 그럼 또 나아지리라는 믿음이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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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이 , 김승옥의 글이 그렇게 필사하기에 좋은 훌륭한 필체라는 말을 여러번 들었다.
그래서도 한번 읽어보고 싶던 글이었다.
읽고 나니 과연 -
짧은 문장은 짧은 문장대로, 긴 문장은 긴 문장대로 훌륭하다.
긴문장은 수사구나 반복되는 절 때문에 자칫 주어가 헷갈리기 마련인데 그런 염려는 거의 없다.
문장호응을 아주 섬세하게 다듬었으며,그 와중에도 예리한 표현이 구석구석 보인다.
한편으론 짧은 문장을 만들지 못하여, 늘 문장이 구구절절 길어져 자책했던 기억이
김승옥의 긴 문장을 만나 약간의 위안을 얻었다.
모든 것이, 흔히 여행자에게 주어지는 그 자유 때문이라고 아내의 전보는 말하고 있었다. 나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모든 것이 세월에 의하여 내 마음속에서 잊혀질 수 있다고 전보는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처가 남는다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랫동안 우리는 다투었다. 그래서 전보와 나는 타협안을 만들었다.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 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 번만이다. 꼭 한 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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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의 문장이 좋은 것은 분명하다.
고전은 고전의 의미가 있다.
하지만 60년대의 한국사회 내에서 유달리 의미가 있는 고전은
2013년의 나에게 생각보다 그리 큰 의미는 아니더라.
어쩌면 모든 유명한 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무진기행은 1960년대를 사는 사람에게는 필독 작품일 수 있고
그 시대를 공부하는 사람에게도 필독 작품일 수 있다.
시대를 잘 반영한 수작이고 한국인으로서 공부해야 할 역사이다.
하지만 모든 고전이 시대를 초월하여 배경을 초월하여 독자에게 성찰을 주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배경도 시대도 다른, 아예 다른 대륙의 고전일지라도
인간의 성장과 고뇌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 오히려 내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부끄러워지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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