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지지않는 백야의 나라를 여행하면서 여름이 아닌 10월을 택한다는 건 어찌보면 모험이었다.
여름밤이 짧은만큼(백야가 절정일 때 밤은 자정12시부터 새벽3시까지정도) 겨울밤의 어둠은 길기 때문이다.
오후 서너시면 어두워져서 뭘 할 수 없다는 위협. 시간이 금같은 여행자에게 이만한 마이너스가 있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행을 결심한 건,그 긴긴 겨울밤을 밝혀주는 공연이었다.
9월부터 본격시작하여 겨우내 매일같이 열리는 수준높은 공연들. 발레, 음악회, 오페라, 서커스.
팍팍한 물가에도 '술' '담배' '공연'은 싸다는 매력적인 나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도저히 공연을 예매할 수 없었던 터에 상트에서 욕심내어 이왕이면 두 편.
첫날은 오케스트라, 둘째날은 발레를 보기로 했다.
# 첫번째 날: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공연. 쇼스타코비치 극장
러시아는 어딜 들어가든 건물 현관즈음에서 옷을 맡기고 실내로 들어선다.
워낙 추운 나라여서 두꺼운 외투, 목도리,장갑,모자 등 거추장스런 옷가지가 너무 많기 때문일 거다.
스케이트장서 스케이트 빌릴 때마냥 나란히 늘어선 옷장앞에서 줄서서 번호표를 받고 옷을 건네주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계단을 올라오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옷차림이 거의 포멀, 드레스 이브닝 파티 수준이다.
이것이 바로 공연을 대하는 그들의 마인드!
티켓을 끊고 붉은카펫을 따라 올라온 작은홀에는 샴페인과 캐비어, 카나페 등 디저트가 놓여있고
쇼스타코비치 극장의 짦은소개와 관련 음악가의 초상이 걸려 있었다.
▲ 다영이 카메라에 보이는 건 바로 나 : )
연주홀 내에 들어선 나는 탄성을 지를 지경이었다.
수백개의 샹들리에가 밝은 빛을 비추는 천장, 중앙을 따라 시원하게 깔린 붉은 카펫, 같은 색깔을 한 붉은 세단 의자,하얀 아이보리색 나무손잡이, 양쪽 사이드에는 반짝반짝 하얀색 대리석 기둥들, 그리고 그 기둥들 사이에 얼굴을 내밀고 앉은 관객들.
공연은 당일날 아침에 예매한 공연인데도, 빈 자리 없이 가득찼다. 왠만한 좋은 공연은 거의 그렇다고 했다.
그 붉은 세단 의자에 앉아서 사람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는 것만으로도 흥분이 됐다. 이런 멋진 곳에서!
공연이 시작되었다.
단원들이 나와서 악기를 조율하고, 곧이어 박수를 받으며 지휘자가 등장했다.
그런데, 지휘자와 함께 한 사람이 더 등장했다.
보면대를 앞에 두고, 그 분께서 마이크에 대고 러시아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냥 곡 소개인줄 알았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악기를 내려놓고 얌전히 앉아 마이크로 울려펴지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이야기를 읽어주는 아저씨는 마치 변사처럼. 한껏 연기톤을 섞어 내용을 읽는다. 무슨 내용인지는 몰라도, 분명 대사가 섞인 시나리오 같은 걸 읽는 건 분명하다.
말은 빨라지기도, 깔리기도,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되었다가 여자의 목소리가 되었다가 한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쿵쾅거리며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하기도 하고, 오케스트라가 조용히 마무리하면 아저씨가 또 다음 내용을 읽어내린다. 아저씨 말중에 바이올린이 서서히 깔리며 비장한 음악을 연주하기도 한다. 오리지날 싸운드 트랙이 따로 없다.
러시아 스타일 오케스트라 푸시킨이라고 한단다.
푸시킨 문학의 한 토막을 짤라서, 거기 나오는 내용을 음악과 함께 재구성해낸 것이다.
(보면대 위에 있던 변사아저씨용 시나리오는 거의 백과사전이었다. 중간에 첫번째 책을 내려놓고 두번째 책을 폈을 때 우리는 저걸 다 읽어낸 거냐며 기겁했다.)
▲ 두번째 사진에 이마드러낸 요 아저씨 였음. 변사 아저씨.
아저씨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마치 웅변대회에 나온 연사처럼 두팔을 휘저어 가며 연기를 하는데
그 모습이 생경한 나는 웃음이 나와서 참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물론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어 더 그랬겠지만)
하지만 나와는 다르게
공연내내 잠시라도 떠들 수 없을만큼. 조그만 아이들도 앞을 바라보며 집중하는 눈으로 경청했고, 진지한 태도를 갖추고 있었다. 그들의 초롱한 눈. 그건 정말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있는 문화는 아닌 것 같았다.
# 두번째 날 : 에르미따쥐 황실극장 '잠자는 숲속의 공주'
"러시아를 가기로 했어.
예전 대제가 궁전으로 쓰던 황실극장에서 발레를 하는데, 그걸 보러 가는 거야.
요 몇년간 내가 한 것 중에 가장 멋진 일이 될 거야.
▲ 에르미따쥐 황실극장으로 발레 보러 가는 길. 황실극장의 입구는 겨울궁전 입구쪽이 아닌, 네바강과 면한 쪽에 따로 있어 어둑해진 뒷골목을 헤치고 걸어들어가야 했다.
에르미따쥐 황실극장은, 발레극장 규모치고는 작은 편이다.
옛날에 황실가족을 대상으로 실제 공연을 하던 무대라서 객석이 크지 않고 원형으로 설계된 것이 특징이다.
오케스트라는 무대 바로 아래쪽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객석이 적어 값이 좀 비싼 편이라 현지인보다는 주로 외국인 관광객들이 자리를 채운다고 했다.
세상에, 이렇게 대리석으로 치장하고 온갖 고전 조각품들이 날 둘러싼 황실극장에서 내가 실제로 발레를 보다니.
이건 같은 공간을 두번 찍고 어쩌고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적극적인 향유잖아!
몇백년전의 공간을 관람석에서 제3자로 관찰하는 게 아니라 현재의 내가 그 예전처럼 똑같이 쓰고 있다는 것.
생각해보면 놀랍고 매우 감동적인 일이다.
언젠지도 모르는 역사와의 단절이 아니라 그 이어짐이 말이다.
이날의 작품은 '잠자는 숲속의 공주'였다.
다영이는 '지젤'을 보고 싶다고 했고, 나는 뭐 아무래도 상관 없었지만,
잠자는 숲속의 공주라니, 이게 언제적 동화야. 유치하지 않겠어? 라고 잠깐 생각했던 건 큰 오산.
동화속 의상은 바비인형옷처럼 환상적이었지만 그보다 기품있게 디자인되었고
발레동작은 무척이나 풍부하여, 내가 잊고 있던 스토리 한끝까지도 모두 기억 나게 해주었다.
상징(어떤이에게는 촉)에 약한 나도 '공주', '바늘', '신데렐라' 인 걸 알 수 있게 해주는
섬세하고 뛰어난 표현력!
발레를 보면서
1. 가벼운 몸으로 가볍게 뛰는 그 움직임이 닮고싶어 가벼워지잔 생각을 했고, 발레리노의 몸과 훤칠한 체격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뒷태는 예술!
2.하프 소리를 이렇게 가까이서 들어본 적이 없다. 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가벼운 소리. 발레에는 발랄한 하프가 제격인 것 같다.
3.절제의 발레와 화려한 궁전의 언밸런스.
4.주인공 발레리나의 태연한 표정 뒤의 떨리는 근육, 발레리노와 잡은 손에 싣는 힘의 크기, 허벅지를 받친 손가락의 패임, 턴을 하며 균형을 잡기 위해 반의 반박씩 밀리는 박자에서 느껴지는 발레의 멋.
▲ 다 알고 기다리는 중이죠?
발레가 끝나갈 때쯤.
10시에 끝나니 그때 데리러 온다고 하셨는데
9시 20여분에 막이 내린 걸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한 우리는 고민고민하다 가이드님께 전화를 걸었다.
"오늘 공연이 빨리 끝났나봐요. 아직 9시 반인데"
"그럴리가 없는데, 사람들도 다 자리 떴어요?"
"아뇨, 다 가진 않고 몇몇은 남아 있는 것도 같아요"
"그럼 더 있을거에요. 기다려보세요."
'근데 스토리가 끝났는데요? 왕자랑 공주랑 만났다니깐요.'
그러기엔,
오케스트라가 악기도 두고 갔고, 반수 이상의 관객이 기다리는 표정으로 앉아 있었고, 2막 자체가 왕자 공주가 만나자마자 바로 막이 내렸다는 이상징후들이 있었다.
어쩐지 3막이 오르더니, 계속 나와서 돌아가면서 수십번씩 인사하더라. (발레에 식견이 깊은 건 아니지만, 몇번 경험을 토대로 볼 때, 주인공 발레리나와 발레리노의 인사는 평균 5번 이상이 기본이다.)
정말 발레 본토고장에서 무식한 한국인 될 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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