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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 Pic/제 3의 인물

임신일기 11 (최종회) - 태교란 것이 따로 있나, 마음이 편하면 장땡이지

휴직 후 하고 싶었던 일들과 태교는 내게 별개의 일이었다. 내 평생 처음으로 쉬라고 시간이 주어진다면 하고 싶은 일과, 태교로서 해야하는 일은 목적 자체가 달랐으니까. 그렇지만 내 생각과는 다르게 원데이 클래스를 해도, 음악을 하나 들어도, 여행을 가도 태교 중이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애초에 태교를 하겠다고 작정한 것이 많이 없으니 임산부로서의 성실한 태교를 말한다면 나는 낙제점일 것이다. 그렇지만 무엇을 하든 편안한 마음이었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는 꽤 높은 점수일거라 생각한다.



그래도 딱 하나 대표적인 태교행위를 꼽자면 음악태교의 왕이라는 클래식을 자주 들었다. 원래도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임신을 하고 나서는 여유가 더 생겨서 아침 출근 준비시간에 유튜브를 틀어놓고 많이 들었다. 휴직 후에도 아침마다 일어나서, 혹은 집안일을 할 때, 친구들과 차마실때 브금으로도 많이 들었다. 사실 휴직하고 하고 싶었던 일중에 '좋아하는 작곡가별 특징과 음악 정리하기' 도 있었는데 자주 찾아듣고보긴 했지만 본격 착수는 하지 못해 아쉽다.

<임신 중 자주 들었던 음악들>
차이코프스키 - 안단테 칸타빌레
쇼팽 - 세레나데
베토벤 -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슈베르트 - 세레나데
슈베르트 - 방랑자 환상곡
멘델스존 - 심포니 4번 이탈리아
브람스 - 대학축전 서곡
슈만 - 피아노 콰르텟 no1
베토벤 -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봄'
쇼팽의 왈츠곡들
슈베르트의 가곡들

운동 따라 나서기도 빼놓을 수 없지. 한강에서 테니스를 배우는 남편이 일주일에 두번 한시간씩 운동을 하러갈 때마다 나도 같이 따라나가 한시간씩 놀다오곤 했다. 처음에는 코트 앞 벤치에 앉아서 테니스 치는 동영상도 찍어주고 서브 폼도 점검해주고 했는데, 너무 자주 가면 테니스 코치님 눈총을 받을 것 같아 그 뒤로는 코트 근처의 한강벤치에 앉아서 기다리며 놀았다. 어느 날은 책을 읽기도 하고, 일기를 쓰거나 핸드폰을 하기도 하고, 사진도 찍고, 백수처럼 벤치에 드러누워 바람을 맞으며 잠을 청하기도 했다. 평일에도 꽤 많은 사람이 나와서 조깅을 하거나 간단한 체력운동을 하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고, 농구를 하고, 수다를 떨더라. 그때만큼 백수 생활이 와닿은 적이 없었던 듯. 집에 뭉개고 있는 것보다 훨씬 보람찬 백수가 된 기분이었다.

4월 5월이 되면서 날씨가 많이 따뜻해졌고 반팔티를 입고 살랑거리며 다니기 좋은 날씨가 되었다. 조금 이르지만 나시티를 입어도 좋겠다. 바람이 적당히 그러나 끊이지 않고 불고 , 그 결에 초록 풀과 이끼 냄새들이 밀려온다. 하늘은 조금 하얗고 대부분 예쁜 연한 하늘색인데 주변에 구름이 은하수처럼 옅게 흩뿌려져 있다. 머리끈을 가져오지 않아 머리칼이 책보기엔 번거롭게 날리는데 그정돈 뭐 뒤돌아 앉으면 그만. 걱정할 거 하나 없이 바람 맞으며 주변 나뭇잎을 살피는 게 너무 한가롭고 여유로와 나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아, 휴직하니까 진짜 좋은거 같아! "

모든 행동이 느려졌는데, 느린 것이 허용되서 좋았다. 집 나설 준비를 천천히 느릿느릿하고 아침 공기를 만끽하며 두부나 콩나물을 사러 슈퍼에 다니곤 했다. 더워진 날씨를 빼곤 내게 보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늘 시간에 쫒겨 다니던 나로서는 어색한 일이랄까. 옷차림도 단순해졌다. 약속이 있어 나갈때도 직장 출근할 때의 옷차림과 가방과 신발과 몸가짐과 너무나 완벽히 달라졌다. 상체만 보이는 화장대 거울에서 얼굴에 공들여 치장을 하고는 (휴직하고 더 그런듯 , 왜죠? ) 일어날 때까지만 해도 그냥 예전 모습과 다를바가 없었는데 망원역으로 걸어가는 길에 문득 상가 유리에 비친 나를 보니 세상 편한 차림새의 누가봐도 임산부. 그리고 맨다리에 가벼운 단화 신발. 배를 한껏 내밀고 신발을 대충 발에 걸치고 좌우로 뒤뚱거리는 발걸음. 매우 느린 걸음.

시간이 많이 나서 집을 돌보았다. 남편과 나의 옷장 정리, 그리고 미뤄두었던 식자재장과 양념장칸을 정리했다. 욕실도 대청소. 마음도 같이 정리되는 기분이라 산뜻해졌다. 사실 직장인이었던 동안에도 집안의 소소한 이런 것들 하나 정리할 시간이 없던 것은 아니었는데, 이건 확실히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하는 일 같다.

이상하게 책은 더 안본것 같다. 특히 육아책은 전혀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이래도 됩니까? ㅎㅎㅎ 그간 보고싶던 책을 교보와 알라딘에서 두어권 샀는데 그 벽돌책들이 잘 진도가 안나가서 책이 전반적으로 뒤쳐진 듯. 그것 외에도 책을 보기에 배가 너무 많이 나와서 자세가 편하지 않은 것도 한 몫했다. 배가 불편하니 앉기보단 눕게되고, 누우면 책을 보기 어려운 것(맞다 핑계다). 밀리의 서재는 접속 안한지 몇주가 된거야 이거


태교 책 읽어주기는 딱 두번. 교보타워에 있는 동기 운경이가 임신축하 겸 송별 선물로 사준 태교 책인데, 남편은 태교여행마다 이 책을 들고 가서 고대로 가져오곤 했다. 총 9편의 동화가 실려있는데, 내가 먼저 한편 읽었고 남편 목소리로는 두편의 이야기를 들었다. 엄청 닭살 돋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동화가 감동적이고 따뜻하여 읽기 착수가 힘들지 막상 하고 나면 굉장히 흐뭇하다.


전시회도 몇번 갔다. 서촌에 있는 박노해 갤러리, 미메시스 아트뮤지엄 등. 휴직 시작할 때는 전시회도 많이 가고 싶었는데 코로나 시국에 붐비는 전시회는 엄두가 안남. 작심하고 간 곳은 별로 없었지만 발 닿는대로 느슨한 상설 전시회들에 들러 시간 넉넉하게 보고 오는 것은 주중에 돌아다니는 백수의 최고 특권



집에서 가까운 가게들을 적극적으로 방문하여 소소한 것을 자주 시도해보았다. 소품 가게, 먹을 것을 파는 곳들 - 초콜릿 전문점, 과자가게, 베이커리, 꽃가게, 디저트가게, 향수가게, 소품가게, 등등을 거리낌없이 방문하여 되도록 한두가지라도 사서 먹어보거나 쓸데없는 것들을 사와서 써봤다. 평소에 돈의 사용처와 과소비에 지나치게 엄격했다면, 시간과 돈을 주고 100일간은 니맘대로 어디한번 써봐 라는 시기가 주어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추천받은 예쁜 악세서리 가게를 방문하러 경리단길까지 갔는데 문을 닫아서 경리단길 구경만 하다 온적도 있었다. 설사 방문에 실패했을지라도 금같은 주말 시간 아까운 생각은 들지 않아 화가 덜 나는게 휴직인의 최고 장점.


심지어 인터넷으로도 시도했다. 팔판동에서 눈여겨보았던 향수가게 VILLA ERBATIUM의 샘플 시향지를 인터넷으로 시켜서 30여종의 샘플을 얻고 써보았다. 평소같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이다.ㅎㅎㅎ

태교는 아니지만 베이비페어도 한번 다녀왔다. 하도들 베페 타령을 해서 나도 임산부된 김에 경험한번 해볼 겸 가보고 싶었다. 일산 킨텍스에서 한 베이비페어였는데, 이것저것 필요한걸 소소히 사오긴 했지만 경험을 위해서였지 굳이 또 올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



남들은 잘생긴 연예인을 보면서 태교한다는데, 나는 나달을 보면서 태교를 했다. 휴직기간동안 바르셀로나 오픈, 마드리드 오픈, 로마오픈, 리옹 오픈, 롤랑가로스, 이스트본 오픈, 윔블던을 보았다. 권순우가 롤랑가로스 3라운드 진출,윔블던 첫승, ATP투어 4강 진출하는 것을 보며 응원도 했고, 나달의 로마오픈 우승을 비롯한 본격 클레이 코트 시즌을 충분히 즐겼다. 윔블던이 끝나기 전에 출산할 줄 알았는데, 윔블던 결승전도 둘이 볼줄은 몰랐네. US오픈은 셋이 봐야지


잠을 많이 잤다. 솔직히 너무 많이 잤다. 태교도 좋지만 아기가 태어나면 체력과 잠이 부족하니 미리 많이 자두라는 애정어린 조언을 자주 들었다. 그러나 그런 것과 별개로 난 너무 잠을 잘 잔다. 예정일 전날인 오늘도 12시간 깨지도 않고 푹 잤으니 말 다했다.(심지어 그 와중에 낮잠도 잤다) 이것저것 보다가 눈이 피로해지거나 몽롱해지면 미련없이 잠에 들수 있다는 게 행복했다. 일할땐 커피를 달고 살았는데, 커피를 마시며 정신을 깨울 필요가 없다는 것도 새삼스레 신기했다. 테니스 시즌에는 시차를 맞추려 새벽 3,4시에 자고 낮 1,2시에 일어나는 경우도 많았다.

시간이 될 때마다 한강 산책을 많이 했다. 작년 가을에 새로운 집으로 이사오면서 역과는 멀어진 대신 한강과 가까워진 것이 지금 한껏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집에서 5분만 걸어가면 탁트인 전경과 벤치와 산책길이 나오는데 테니스를 따라갈 때도, 노을 좋은 날 저녁에도, 맑은 날 구름 구경하고 싶을 때 시도때도 없이 한강에 나갔다. 임산부 운동을 위해서라도 산책을 자주 해주라고 하는데, 일부러 어딜 가지 않아도 지척에 이만큼의 환경이 있어 감사하다는 생각.

세상이 아름답다. 하고 싶은 건 시도해보았고, 하다가 별로면 맘 편하게 그냥 관두었다. 스트레스 없이 지내기가 목표라면 어지간히 이뤘을 것이다.

엄마 마음이 편안한 게 최고의 태교라고 했다. 사실 휴직하고 나서는 모든 것이 여유롭고 너그럽고 즐거웠다. 오죽하면 세상이 아름답다 말할까. 최근 3년 가장 가까이서 회사 스트레스를 함께 겪었던 황 언니는 이런 나의 말을 듣고는 그거면 되었다고 했다. 그게 찐 태교라고.

‘완벽한 하루를 고대하며 대다수의 날을 보내기보다 작더라도 매일 원하는 걸 아낌없이 채우며 살자’ 라는 게 평소 나의 지론인데 최근 삼개월은 그런 의미에서 내겐 완벽한 날들이었다. 이제 꿀같은 백일은 지나갔고 출산과 육아라는 중차대한 일에도 이렇게 사는 건 꽤 오랜기간동안은 어렵겠지. 내 인생의 한 막이 이제 곧 내리고 새로운 막이 오르기 직전이다. 실감은 아직 잘 안나지만 내 삶이 어떻게 바뀔까 하는 기대감과 두려움이 공존하고 있다. 설레임으로 맞이하려면 준비라는 걸 해야한다. 두려움은 무지와의 싸움이니까.

임신일기 마지막회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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