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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 Pic/일상

남편의 본사 부름기

남편의 인사이동을 앞둔 어느 쉬는 날 아침, 평소 남편이 가고 싶어하던 본부부서의 부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부서에 올거냐 묻는 물음에 그는 알겠다고 대답했고, 몇 시간뒤 만난 나에게 이야기했다. "나 본사에 갈거 같아"

대부분의 직원이 교대근무를 하는 남편의 회사는 일부 본사 업무로 일근을 하게 되면 생활 패턴이 많이 달라지기 때문에 발령을 앞둔 직원과 미리 조율을 해 두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했다. 우리는 처음 겪는 출산과 육아를 앞두고 금번 발령은 아무래도 시간이 많이 확보되는 교대근무를 계속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미리 말을 해 뒀었다. 그래서 남편은 가고싶은 본부 부서 한군데를 제외하면 나머지 부서의 제안도 어지간히 물리쳐 왔으며, 물론 평소 그 특정 부서 러브콜에 대한 의향은 표시해왔으나 그 부서는 사람을 잘 뽑지도 않으며 이번에는 티오가 없을 모양이라 했다.

그런데 벼락같이 이런 제안이 온 것이고, 그는 거의 9할이 메이드된 상황에 마지막 엔터키를 누른 것이다.



고민했다. 생활패턴을 뒤흔드는 회사의 제안을 나와 상의없이 받아들인 그가 이기적인 것인가. 아니면 그렇게 가고싶던 단 하나의 부서에서 부장이 직접 전화하여 오라고 하는데, 이미 평판 체크도 끝나고 인사 선별도 끝나고 ‘’네’라고 대답만 하면 바로 공문에 반영되는 일을, 추천자를 물먹이고, 추천자에게 되돌리라 어려운 부탁을 하게 하고, 부장에게 전달하고 인사처에 난 공문까지 되돌리며 , 향후 회사에서의 경력과 추천이력까지 훼손시키며 내가 편하자고 하는 것이 이기적인 것인가.

아이만을 생각하면, 남편은 언젠가 가고 싶은 본부부서의 일근을 지금 쓰는 것이 아이와 있는 물리적 시간을 늘리는 일이 될 것이다. 현재 내가 휴직 중이니 아이의 돌봄을 위하여 기회는 번갈아 써야 할 것이고, 그게 최선의 선택일 것이다. 그러니 내가 반대한 건 아이의 입장을 대변한 게 아니었다. 나는 내 휴직기간에 내가 편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작년 여름 출산과 신생아의 시절을 거쳐 반년을 정신없이 보냈으니 내년 복직을 앞두고 올해 일년은 오롯하게 아이와 좋은 시간을 보내며 지내야 할 순간들이라고 여겨왔는데 갑자기 남편의 일근으로 주말만 바라보며 살게 되는 것이 싫었다. 내가 다시 출근하는 기분이라 괴로웠다. 할일이든 친구를 만나든 운동이든 산책이든 아무것도 할 수 없이 그저 계속 집에 머물며 퇴근만 바라보는 독박육아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친정은 멀고 시댁은 불가능하고 나는 비겁하게 이것으로도 그를 압박했다.




어떤 결과가 되든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좋은 일인데도 안 일어났으면 어땠을지를 상상하는 나는 그저 안주와 도태의 아이콘이다.

발목 잡는 아내가 되기는 싫은데, 더 나은 미래를 향해서 나아가는 게 맞는데. 겨우 남은 한해가 피폐해지는 한해가 될 것 같다는 두려움 때문에, 나의 편의가 감소한다는 이유로 그저 붙잡아두는 것이 맞는 것인가. 이렇게 가지 않는다고 하면 나는 마음이 편할 것인가

평소 나의 의견을 긴 시간 고민 없이 잘 받아줬던 그는, 이번만큼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하루종일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답이 나오지 않았다. 어떤 생각이냐고 묻는 내게, 그는 다른 건 없고 그저 기회를 잡는 것과 아닌것만 생각한다고 했다. 다른 구구절절한 것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내가 그에게 온 기회를 놓으라고 이야기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내 입장에서는 날벼락이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기회였다.



어려운 결정이었다. 미래를 꿈꾸는 그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나를 위해 그리고 아이를 위해 희생했다. 그리고 미련을 남기지 않았다. 이 순간을 오랫동안 기억할 것이다. 만 하루간 있었던 해프닝이지만 내겐 깊게 남을 것이다. 이번에 그가 보여준 아량을 나는 오래도록 고맙게 간직할 것이다. 행동은 없이 늘 미안함만 외치는 나는 이번에도 모든 감정을 쏟아부으며 짐을 내게서 덜어버렸고 그의 발목을 잡고 앞길을 가로막았다. 앞으로 나는 어떤 희생으로 그에게 갚을 것인가.

모든 것이 마무리되고 함께 술한잔 나누던 그날 저녁 남편이 내게 말했다. 지금 행복하냐고. 나는 행복해. 그렇게 대답한 내게 그는 그거면 되었다고 했다. 나의 행복을 비는 사람. 그것이 나의 남편이고, 그는 희생으로 내게 화답하는 자다. 나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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