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일동안 뿌옇던 미세먼지가 걷히고 한파가 찾아온 날, 오랜만에 보는 흰 구름에 콧구멍이 벌렁거렸다. 남편은 출근한 주간 근무날, 여유있는 산책을 나갈 계획을 꾸렸다. 날씨가 추워 걱정이 될만도 했지만, 언젠가 제대로 겨울맞이 산책을 해봐야겠다고 한 것이 바로 오늘 그날이다.
오후 세시. 먹고 싸기를 마친 아기 컨디션은 최상. 유모차와 함께 물려 받은 풋머프란 물건을 유모차에 처음 장착해보았다. 방풍커버는 없지만 방한복을 방불케하는 이정도 두터운 겉옷이면 이 날씨에도 꽤 괜찮을 것 같다는 용기가 샘솟았다. 비닐 안에 꽁꽁 싸매고 다니는 다른 유모차가 늘 답답해 보이기도 했고.
두꺼운 내복과 양말을 챙겨입히고 아기 몸을 풋머프에 끼워보았다. 전에 사둔 파일럿 모자를 씌우고 마스크와 손수건으로 볼도 가려주니 그런대로 만족스러웠다. 따뜻해보이는데다 귀엽기까지 해서 기분이 점점 업이 되었다. 처음엔 아파트만 산책하며 분위기를 볼 생각이었다가 아기가 많이 추워하는 기색이 아니자 자신감이 붙은 나는 아파트 정문을 나섰다. 한번쯤 듣지 못하면 섭하다는 '애기 추워 참견'을 오가며 백일만에 벌써 세번 들은 나이다. 속으론 오지랖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들으면 마음이 상한다.
아파트 바깥에 붙은 놀이터를 어슬렁거리다보니 아기는 두리번거리느라 정신 없는데 오히려 겉옷 하나 걸치고 나온 내가 추웠다. 특히 바람 부는데 노출되어 있는 두 손이 너무 시려웠다. 한강어귀에만 얼른 슬쩍 다녀와야지 하고 유모차를 돌리는데 문득 길 건너편 카페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이어서 비어있는 유모차 컵홀더에 시선이 꽂혔다. 그래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사서 손도 녹이고 전망대에서 우아하게 커피 두어모금 마시고 돌아오는 거야. 벌써 뱃속이 뜨뜻해지는 기분인걸.
카페는 몇 달 전에 생겼지만 처음 들러본 곳이다. 유모차를 잠시 앞에 세우고 들어가 주문을 하고 밖에 나와서 기다렸다. 주인 아저씨가 흐뭇한 미소를 띄며 테이크아웃컵을 들고 나와 전달해주었다. 종이컵을 통해 온기가 전해져왔다. 완벽해.
유모차 컵홀더에 받아든 커피컵을 끼고 든든한 마음으로 위풍당당 횡단보도를 건넜다. 횡단보도 끝 보도블럭이 시작되는 곳에는 살짝 턱이 있었는데, 가속도를 붙이거나 살짝 유모차 앞코를 들어야 스무스하게 넘어갈 수 있는 곳이다. 턱을 넘으려고 손잡이에 힘을 주면서 뚜껑 구멍을 통해 커피가 살짝 튀었다. 아잇, 근데 턱이 생각보다 높아서 넘지도 못했다. 어느새 빨간불이 다 되어버린 신호등. 다시한번 손잡이에 힘을주어 유모차 앞코를 들어올렸다. 커피가 한 모금쯤 튀어나왔다. 언덕을 향해 유모차를 힘차게 밀자 보도블럭에 있는 우둘두둘한 점자 블럭을 만난 커피가 사정없이 춤을 추었다. 손에, 유모차 손잡이에, 옷에 커피가 튀었다. 작은 종이컵 그득히 담아주신 아저씨의 마음은 새로산 후리스 점퍼에 따뜻하게 묻었다. 안되겠다. 이대로는 계속 그러니 좀 마셔서 수위를 낮춰야지. 잠시 유모차를 세우고 커피를 덥썩 집어 마스크를 내리고 입에 대자 뜨거운 물이 혀를 강타했다. 앗 뜨것, 뚜껑에는 흘러넘치다 만 커피가 위태로이 남았다. 황급히 종이컵 뚜껑에 묻은 커피를 날름날름 핥았다. 아.. 내 계획은 이러려던 게 아닌데 ..
다음엔 유모차에 꽂을 커피를 사면 구멍 닫는 걸 꼭 달라고 해야지. 아니 그보다 장갑을 꼭 끼고 나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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