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니 아기 백일 잔치를 준비하며 예상 외로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같다. 대단한 처음보는 손님이 오는 것도 아니고 흔히들 불편해하는 시댁도 아닌데 왜 그랬을까. 심지어 백일 사진은 스튜디오를 예약해 놓아서 집에 차리는 백일상은 약식이었는데.
일단 내가 이런 행사를 본격적으로 준비해 본 것이 굉장히 오랜만이기 때문인 것 같다. 회사가 바쁘다는 이유로, 철부지 둘째라는 이유로, 오래된 연인이자 꽁냥거리는 기념일은 오그라든다는 이유로, 자칭 스타일이 형식파괴적이라는 이유로, '본 행사'의 무게를 제대로 감당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한 아이의 엄마의 입장이 되어 온전히 아이를 키우도록 시간이 주어졌고 그 아이의 처음 맞는 기념일로써 백일을 준비하게 되니 더는 빠져나갈 구실이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나름 심혈을 들여 항목별로 준비하였으나 초청한 손님들의 식사까지 준비하기엔 시간이 어려워 그 부분만은 배달로 조달하기로 하였는데, 어쩐지 자꾸 먼저 묻더라니, 계획을 들은 엄마가 '정성이 부족' 한 게 아니냐는 말을 조심스럽게 건네자 속상한 기분이 들었다. 물리적으로 어려울 것 같긴 했지만 나 역시 마음속으로는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으며 조금만 더 부지런하고 요리에 능숙했다면 척척 해낼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왜 이것밖에 못할까 안타까운 마음.
그리고 오랫동안 행사를 구상했는데도 전날에야 허겁지겁 물건을 사러다니고, 당일자에도 생각치 못한 주문을 추가로 얹으며 내 계획력이 이렇게나 초라하다는 실감도 했다. 행사 당일날 아침부터 바쁘고 걱정되면서도 한편으론 설레는 마음이었는데 잘 준비되었다면 후자가 더 컸을테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했다.
오후 3시에 모여 축복예배를 드리고 난 후 식사를 하기로 한 5시까지 붕 뜬 시간에, 예정된 '식순'을 묻는 가족들의 눈망울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하필 아기도 처음 입는 한복이 껄끄러운지 울고불고 하는 바람에 (순발력이 좋은) 남편은 안방에 매여있었고, 결국 나는 아무것도 준비된 게 없다고 실토하고 말았다. 즉흥적인 인간으로 번개에 최적화된 나는 오랜만에 맞은 정례화된 모임에서 호스트로서 부족력을 실감했다.
결국 '차와 다과' 시간으로 예상했던 한시간여는 커피 한잔을 마시는 데 들인 십분 이상으로 버티지 못했고, 찬장에서 와인과 맥주를 꺼내어 술에 취하는 수 밖에 없었다.
백일이 지난 다음날 아침.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백일이라는 종점을 향해 달렸던 것처럼 나사 풀린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오늘 새벽에도 아기는 깨어 배고프다고 울고, 몽롱한 아침은 이어지는 현실의 세계. '백일의 기적'이라고들 하니 (우리 아기는 그럴 것도 없이 잘자고 잘 먹었지만) 아기도 나도 그날 아침에 뿅하고 뭔가 달라질 줄 알았나보다. 그래서 허탈한 기분이었겠지.
다음 목적지는 어딜 향해 달려가야 할지 이제부터 생각해 봐야겠다. 그리고 나도 백일을 맞아 이제 본격적으로 몸도 풀고, 생활도 이전과 다르게 풀어보고 싶다. 여태껏 얌전히 누워 잘 지내준 아기에게도 그렇다. 일단 마음껏 움직이라고 주문해 둔 아기 매트부터 깔고 시작해 봐야겠다.
ps_
어제 엄마가 작은 쥬얼리박스에 넣은 금 한돈을 아기 침대 한켠에 선물로 두고 갔다. 오빠네도 예쁜 봉투에 넣어 돈을 주었고. 뭔가 상징적이기도 하면서 대를 잇는 이런 선물을 받는 기분은 묘했다. 엄마 딸의 딸에게 주는 마음이라니. 그 마음은 어디까지 확장되는 걸까.
엄마는 누구 말마따나 정말 우주같은 존재임에 틀림이 없는 듯 하다. 과연 나도 이 아이의 우주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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