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실이라지만, 빌라 꼭대기에 붙은 익숙한 공간이었다. 오빠가 연남동 빌라에서 작업실을 차렸듯이. 청년쯤 젊어보이는 흰 면티 입은 남자가 골목 어귀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차를 타고 골목에 진입했지만,수월히 차를 댈 곳은 없어 보였다. 차를 어떻게든 대고 나서 연락할까 하던 중이었는데 옆에서 그냥 전화를 걸었다. 역시 그 서성이던 사람이 전화를 받는다. 차는 그냥 빌라 앞 골목에다가 잠시 주차하면 된다고 했다.
어색한 순간이 찾아왔다. 사실 작가가 작품양도를 위해 만날 날을 잡으면서 연락을 해왔을때 함께 저녁을 먹자고 했는데 아무래도 그건 너무 뻘쭘할듯 하여 완곡히 거절했었다. 상상만으로도 아찔해진다. 그래도 연락처를 주고받고 이야기한던 건 내가 아니라서 , 나는 그저 조용히 있으면 되었다. 차에서 내려 고개를 끄덕이며 눈인사를 나누었다.
빌라 삼층에 작가의 작업실이 있다고 하여 따라 올라갔다. 미닫이를 열고 들어가니 너른 공간에 겹겹히 세워놓은 캔버스가 눈에 띄었다. 낡은 소파와 전자레인지 하나. 지직거리며 나오고 있는 라디오의 DJ가 우리사이 어색함을 지우려는듯 활발한 멘트를 쉴새없이 내뱉고 있었다.
남자는 쭈볏거리며 우리를 구석에 있는 푹 꺼진 소파에 안내하더니 , 아시아프에서 구매한 그 작품을 스티로폴로 곱게 싼 채 내밀었다. 작품 사이즈는 한 20CM*20CM정도 될까. 소파 맞은편 스툴에 앉은 작가와 우리 사이 사이드쪽으로 작은 테이블이 하나 놓였있었는데, 비슷하게 생긴 작품이 세워져있었다. 우리작품은 가운데 색깔칠한 부분이 네모인데, 전시되어 있는 건 칼라부분이 세모이다. 호기심이 생겨 물어봤더니 이 작품 자체가 갯수가 8개가 있는 연작이라는데, 듣고보니 이어진 그림은 아니고 , 비슷한 스타일의 작품이 그만큼 더 있는듯 하였다.
어색한 공기를 잇기 위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생전 초면의 화가와 그의 작품 이야기를 진지하게 하는것은 처음이라서, 참 오그라들기도 하고 내심 이 불편함에 이제 그만 안녕 인사하고픈 마음이 들만큼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미술작품 구매도 처음이요, 그것에 10만원이라는 적지않은 투자를 한 것도 놀라운 일이라, 그로인해 얻게된 이 소중한 작가와의 시간을 임팩트있게 가져가고 싶은 것도 사실이었다. 마치 위대한 작가의 힘든 초년시절에 처음으로 믿고 그림을 구매해준 팬으로서 어딘가에 기록될 지도 모르는 게 아닌가. ... (하하)
작가도 이런 시간을 자주 가졌거나 능숙한 것이 아니고 긴장한 것이 분명한 것이 , 쉬운 질문에 땀을 뻘뻘 흘리며 동문서답을 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같은 말을 반복하는 기분.(자신의 성장이야기) 특히 학창시절이나 군대에서 힘들었을때 그림을 그렸다는 이야기나, 우울감을 표현했다는 색채, 그림속 동심원은 곧 본인을 그렸다는 것들을 설명할 때, 아직 어린 작가(아마도 30초반)의 순박(?)함에 미소가 지어졌다. 작가는 한참을 이야기 하다가 깜빡 잊은듯 냉장고에서 꿀물을 꺼내 내밀었고, 같은 건물 2층에 어머니가 하신다는 미술학원에 연작이 있다고 하여 내려가자고 일어섰다가 문열쇠가 없어서 어색하게 한참을 기다리기도 했다.
내려가서 작품을 구경하는 시간은 꽤 재미있었다. 작가의 생각이 어떻든, 표현된 그림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는 흥미로웠다. 8개의 연작은 네모와 세모 외에도 찢어진 눈 모양, 타원, 마름모, 표주박 같은 여러 모양이 있었고, 덧칠한 색도 주황, 분홍 ,파랑 등 여러가지였다. 그는 그밖에 큰 그림들도 보여주었는데, 개인전 도록에 실린 그림들도 실물을 구경하고, 전시 미 출품작인 해바라기도 보고, 이러저런 습작들도 구경했다
이분의 작품은 만화와 일러스트의 중간쯤의 펜선 느낌에 색채감이 오묘하게 도는 물감을 풀어 중심에 마무리하듯 섞어 그린게 대부분이었다. 색채의 매력과 펜그림의 매력이 공존하여 그것이 내게는 좋았다. 특히 바깥부분의 펜그림은 미완성 같은 기분 혹은 마치 컬러링 밑그림 같은 기분도 들지만 ,한편 펜선이 주는 깔끔하고 댄디한 느낌도 좋았다. 문득 펜은 뭘 쓰시는지 궁금하여 작가분께 물어보았더니 구석에서 필통도구 전체를 꺼내오셨다. 본인이 오래도록 찾다가 정착한 펜이라고 한다. 한자루에 8,000원에 펜촉 여러개를 갈아끼우는 펜. 오는길에 호미화방에 들러서 나도 같은 펜을 사가지고 와서 그김에 집에 있던 스케치북에 따라서 몇개 그려보았더니 갑자기 드로잉에 대한 욕구가 샘솟는다.
작품을 구경하다보니 구체적인 여러 파생되는 이야기도 나오고 작가도 조금 긴장감이 풀어진 모양이다. 묻지도 요청하지도 않은 것을 이것저것 꺼내어 보여주며 신나게 설명을 하는데 힐링 된 것이 우리인지, 그인지 모를 일이다.
그래도 마지막은 여전히 어려운 법. 그래도 기념이니 어수선한 셀카를 하나 남기고, 어떻게 마무리할지 몰라 대충 인사하고 쭈볏거리듯 뒷걸음질 치며 차에 올랐다. 연작7개가 이곳에 남아있는데, 한개의 작품을 생판 남에게 맡기듯 떠나보내는 작가의 심정은 어떠할지 문득 궁금해졌다. 우리가 1/8의 귀중품 퍼즐을 가져가는 기분. 차를 타고 둘이 돌아오는 길에 우스갯 소리로 1/8 재테크를 할만큼, 위대한 작가는 아닐수도 있겠다 했지만, 돈과 바꿀수 없는 신기하고 특이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선택한 첫 작품의 작가로서 이 특이하고 조금 소심한 친구와 함께한 첫 발자국이 무척이나 유쾌하다는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