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게 미리미리 준비하라고 할때 귀담아 들을 것이지 백일천하를 낭낭하게 누리다가 출산 직후 급습을 당한 기분이었다.
임신 1일차부터 280일차까지 쭈욱 마라톤 달리기를 하다가 열달만에 결승점을 마지막 피치를 올려 전속력으로(진통끝에) 통과했으면 이제 좀 누워서 쉬게 해줘야지. 방금전에 결승 통과했는데 헉헉거리고 앉아있는 애한테 이제 허들 경기 하러 갈까? 몸좀 풀래? 하는 기분.
제왕절개 수술한 당일날 침대에서 꼼짝도 못하고 있다가 전동베드의 도움으로 겨우 상반신만 일으켜 세운 다음날 오전, 신생아실 간호사가 와서 안내를 했다.
"내일 오전 11시에 첫 수유하러 4층 수유실로 오세요."
"네? 지금 걸을 수도 없는데 내일 갈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컨디션 봐서 해도 되죠?"
간호사는 "뭐 이런 애가 다 있지??" 라는 표정.
몰랐지. 오늘 겨우 앉았는데 내일 걸어다닐 수 있을 줄. 타이밍 맞춘 수유라는 게 옵션이 아니라 필수인 줄.
그래. 내가 좀 간과한 부분이 그 타이밍이었다. 임신 때는 나의 몸 컨디션이 가장 최우선이었다. 언제 어떤 행동을 하는지는 다 나의 신체적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여 판단한 후 이뤄졌다. 그런데 이렇게 몸상태가 최악인데, 부축자가 없으면 일어나지도 못하는데 어딜 가서 뭘 한다고요??
그게 시작이었다. 이제부터 모든 타이밍의 결정은 아기가 한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언제 수유실에서 콜이 올지 모르는 끝없는 대기의 시작이었다.
하루종일 병실에만 있는데도, 부모님이나 시할머니의 방문도, 핸드폰으로 지인들에게 소식을 전하는 가벼운 일들도 맘놓고 할 수가 없었다. 간격이 짧아도 시간이 정해져 있으면 스케줄이라도 정할 텐데, 아기는 언제 깰 지 모르니 그마저도 알 수 없었다. 직접 수유하는 것 뿐 아니라 때에 따라 유축도 해야해서 시간은 배로 들었다.
그 전까지는 제왕절개 수술시 병원에 5박6일 입원하는 이유가 병실에서 회복에만 전념하고 밥먹고 자고 쉬라고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회복은 각자 알아서 하는 것이고 수유는 별개의 활동이랄까. 시간 맞춰 내게 항생제 놔주러 오시는 간호사분도 나 수유하러 가서 없다고 하면 끄덕거리고 돌아섰다는데, 나로서는 뭣이 중한지 모르겠는 혼돈의 카오스였다. 신생아실 간호사분들과 산모를 간병하는 간호사분들은 서로를 모르는 척하는 이상한 공생관계라고 생각했다.
모유수유는 성스러운 영역이다. 수유는 누군가에게는 0순위의 우선순위였다. 임신기간에 수유에 대해 찾아보지 않아 몰랐었는데, 출산 후부터 접한 많은 사람들(신생아실 간호사, 조리원 선생님, 산후도우미, 소아과 종사자)과, 글과, 책과, 영상에서 모두 모유수유를 부르짖었다. 수유를 할 수 없는 이유라는 건 굉장히 특수해야 했다.
그제서야 생각이 났다. 내 주위의 많은 친구들이 내게 모유수유가 혹 잘 안되거든 너무 무리하거나 집착하지 말라고 당부했던 것. 집착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는데, 내가 챙겨먹는 끼니보다 대기업의 영양구성이 훨씬 좋을 것이라고 믿어왔고 아기에게 분유를 제공할 마음이 너무나 충만하여 자동분유제조기까지 일찌감치 장만해 놓은 나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유수유가 너무나 잘 되는 몸이었다.
다행스런 것은 모유수유를 하면 내 몸의 회복도 빨라진다는 것이었다. 수유를 하면 호르몬이 촉진되어 배가 빨리 들어가고, 오로가 배출되며, 절로 다이어트가 된다 했다. 출산관련자 모두가 하라고 하니 일단 하기 시작했고, 이러저러한 장점도 있으니 속는셈치고(?) 하는데까지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해보니 생각보다 내 몸이 너무 컨디션이 좋아서 이 모유수유능력(?)을 이대로 썩히기 아까운 지경이 되었다.
애초에 모유수유를 어떻게 하겠다 작정하지 않았으니 완모(분유없이 모유로만 수유)니 혼합수유니(모유+분유) 계획도 없이 하루하루 잘만 흘러가고 벌써 두달이 되었다. 하루에 분유를 많게는 한두번 먹이고 있고, 특별한 이벤트가 없는 날은 분유없이 모유로만 먹여도 충분히 잘 지내고 있다.
생각보다 수유의 괴로움은 없는 편이다. 새벽 수유시에 분유보다 먹이는데 시간이 길게 걸린다는 정도? 모유를 주기 곤란한 상황에는 분유도 주는데 다행히 아기도 가리는 거 없이 잘 먹는다. 매운 음식? 특별히 매운 걸 왕창 먹지 않으면 아기도 그렇게까지 영향받지는 않는다하여 적당히 먹고 있다. 어차피 매운거 잘 못 먹는 맵찔이기도 하고.
마지막 한가지 고충은 역시 술인데…
대한모유수유의사회에서 포스팅하기를, 모유는 혈중 알콜 농도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내 체중에 맥주1캔(one drink) 정도는 2-3시간이 지나면 수유에 문제가 없단다. 술을 섞어먹지 않는다면 맥주 1-2캔은 예상 가능한 범주에서 즐길 수 있을 듯.
그리고 많이 먹는 날을 대비한 궁극의 무기, 밀크스크린을 구비했다 ㅋㅋㅋㅋ
수유의 역습에 단디 준비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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