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페냐크의 몸의 일기라는 책이 있다. 태어나 어렸을 적부터 늙어 병들어 죽을 때까지 순수하게 신체의 변화와 감각을 나이별로 적어놓은 뛰어난 발상의 책. 흔히 일기라고 할 때 떠올리게 되는 내면에 대한 일기가 아닌 오로지 몸에 관한 일기다.
임신일기를 적는 것은 마치 나의 몸의 일기를 적는 기분이었다. 가장 놀라운 건 태어날 때부터 몸속에 품고 있던 임신에 대한 몸의 반응이 내 나이 39에 시동이 걸려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것. 그게 오작동 없이 이뤄진다는 것이었다.
21.02.19 (5개월, 19주 1일)
금요일이다. 아침에 7시에 나간다는 계획은 차츰 늦어져 오늘은 7시 35분에서야 겨우 문을 나섰는데 마을버스가 곧 도착한다는 앱 알림 덕에 주차장을 전력질주했지만 버스는 꽁무니도 보이지 않았다. 임신중 몸상태가 나쁘지 않은 기간이라더니 그 말이 맞았다. 임신이후로 처음으로 제대로 달리기를 한 것 같았는데 몸이 가볍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출근은 33영업일이 남았다. 달력일로 세면 50일. 짧다면 짧은 기간이고 아직 남은 걸로 치면 또 한달이 넘게 남았다. 그때 나의 컨디션이 어떨지 아직은 장담을 못하지만 요새같은 컨디션으로는 괜찮을 것도 같은데 겪어보지 못한 일이니 함부로 말할 순 없겠다.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날 때마다 출렁이는 배 덕에 똑바로 상체를 일으키는 것이 점점 어려워진다는 걸 생각해보면 이게 언제까지 불러올지, 나중에 숨쉴 구멍은 있을런지 벌써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니.
21.03.02 (6개월, 20주 5일)
태동이 시작한지 며칠 지났다. 처음엔 이게 태동인가 싶을 정도로 잘모르겠던 것이 이제는 확실하게 신호가 온다. 이걸 어떤 느낌으로 설명할까. 굳이 예를 들면 마그네슘 부족으로 눈가가 비정기적으로 당기는 느낌? 그걸 한번 인지했지만 뒤이어 몇차례 그렇게 실제로 움직일 때 그걸 막을 도리없이 당하는 느낌?
태동이 한번 시작하니 지속적으로 계속 움직이고 , 한시간에 세번이 아니라 거의 뭐 일분에 열번씩도 움직이는 것 같다. 이렇게 잦을 줄 몰랐는데 이 상태로 앞으로 5-6개월이 더 간다고 생각하니 놀랍기도 하고 부담(?)이 되기도 한다. 책을 읽는데 태동이 시작되면 읽던 정신을 빼앗길 정도로 분명한 활동. 계속 움직이는 것이 이렇게 원래 잦은 게 맞는 건가 싶고.
한편으로는 임신기간 우울감에 시달리는 몇몇 친구들의 기분이 어떤 것인지 조금 생각해보게 되었는데 그게 나역시 태동이 처음에는 신기하고 놀라웠지만 조금 지나고 나니 나 이외의 누군가(?)가 몸에 장난을 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 혼자서만 온전히 컨트롤 해왔던 내 몸이고 그것에 한치도 의심을 해보지 않았었는데, 난생 처음 겪는 통제 불가의 변화가 무서운 속도로 찾아온다는 것이 두려워지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가슴이 커지거나 배가 무거워지는 것도 마찬가지로 지금도 충분히 이상현상인데 앞으로 몇주 몇달씩이나 이 상태가 심화될 것이라는 것이 겁이 나고, 더욱이 그것이 본인의 마음의 준비가 덜 된 상황이라면 (어리거나 임신을 준비하지 않은) 그 두려움과 불편함과 누군가를 향해 분출될수도 있는 분노(?)가 마음의 평안을 잡아먹을 수 있다는 것.
솔직히 나 역시 임신의 기쁨이랍시고 모든 몸의 변화가 그저 눈물나게 감사하기만 한 것은 아닌 것이 사실이라, 불편함과 두려움이 주는 우울감이 역치 이상으로 커지게 되면 어느순간 잡아먹힐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몸의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
21.03.15 (6개월, 22주 4일)
요새 몸의 증상을 짚어보자면 이런 것들이 있다.
1. 배가 무겁다. 이건 뭐 만국 공통의 임산부 증상이겠지. 다행히 우려했던 것보단 작은 폭으로 몸무게가 증가하고 있다. 어제 기준으로 4키로 정도 늘었다. 원체 무게가 있었으니 너무 살찌지 않고 날씬한 산모가 되는 것이 목표인데 중반 이후에 얼마나 마음대로 될진 모르겠지만 아직까진 그래도 선방 중이라 생각한다. 그래도 앞의 숫자가 바뀌니 충격은 충격. 아마도 적게 늘은 몸무게의 원인은 배가 불러 있어서 평소보다 적게 먹는 것. 그리고 금주일 것이다
2. 관절이 약해진 느낌. 한 자세를 오래 하고 있다가 자세를 변경하려면 갑자기 온 관절의 마디가 힘이 안들어가고 허리가 안 펴지는 느낌이다.가장 큰건 역시 자다 일어날 때. 소파에 오래 누워있다가 일어날 때도 비슷하다. 마치 할머니처럼 허리를 붙잡고 지탱하며 겨우 발걸음을 떼는데 다른 허리아픔 증상과 다른 이유는 조금 걸으면 금방 괜찮아지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장시간 의자에 앉았다 일어날 때도 비슷한 증상인 걸 보면 그냥 오래 묵는 자세가 안 좋은 것이 분명하다. 이에 예상되는 고통을 겪지 않으려 되도록 천천히 움직이도록 조심하고 있다.
3. 엉덩이 근육이 빠진 느낌. 분명 허리 엉덩이 골반 라인은 착실하게 살이 붙어 두꺼워졌는데 어째 엉덩이가 배기는 느낌은 더 드는 것인가. 이것이 2번과도 연관이 있는 건가 모르겠다. 정보를 좀 찾아보면 이것이 임산부 환도선다 증상 같기도 하고.
4. 계속 커지고 있는 가슴. 아는 언니가 임신출산 과정에 자기 가슴을 내려다보며 뿌듯해 했다는 말이 자꾸 생각나 실실 웃는다. 커지고 통증이 있어서 불편하기도 한데 한편으론 나도 이런 가슴을 언제 가져보겠나 생각하며 흐뭇해 해보기도 한다. 10주대 초반에는 피부가 간지럽고 벗겨져서 임신 소양증의 일부인가 했는데 지금은 그 증상은 사라졌다.
5. 피부와 머리카락 건조증. 몇주 전 갑자기 이마에 주름이 자글한게 보여서 깜짝 놀랐고, 이마 양쪽에 파란 핏줄과 더불어 볼과 이마에 작은 여드름 같은 게 잔뜩 올라와서 식겁했다. 급작스런 피부 트러블은 임신의 영향도 있을수 있다고 하여 임산부 화장품을 급히 검색했다. 순한 성분의 스킨로션을 사고 샘플 여러개를 시켜 급한 처방을 했더니 ( + 정성스런 욕조목욕) 조금 나아져서 다행. 그 뒤로는 건조증만 심하고 트러블은 없었는데 , 눈에 뜨게 변한 것은 머리카락이 건성이 되었다는 것이다. 원래 하루만 지나면 떡지는 머리였는데 임신후엔 3일이 지나도 멀쩡해서 깜짝 놀랐다. 최근 머리를 자른 이후로는 스타일이 안나고 너무나 푸석해보여서 그게 다 걱정.
21.4.2 (7개월, 25주 1일)
요새 태동을 보고 있으면 도리스레싱의 '다섯째 아이'가 떠올라 문득 고개를 내젓곤 한다. 몇주 전만 해도 살짝씩 두드리는 것 같던 태동이 요새는 강력하고 거칠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친구 선녀가 둘째를 임신하고 둘째의 강한 생명력이 느껴진다고 할 때 일상적인 표현이려니 웃고 말았는데 그게 바로 이런 이야기였다. 태동이 많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는 하는데, 너무 커지는 몸짓에 조금 두려움도 생긴다. 주체 못할 정도로 너무 활달한 아이가 나오는 것은 아니겠지?!
21.4.6 (7개월 , 25주 5일)
임신초기에 검색했던 환도선다 증상을 최근 다시 검색해보았다. 전반적으로 앉았다 일어날때, 누웠다 일어날 때, 돌아누울 때 등과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다. 마치 할머니가 지팡이 짚고 일어나듯 차에서 내릴 때도 차문 윗켠을 붙들고 지탱하고 한 5초간은 멈춰있게 된다. 릴랙신이라는 관절 사이를 늘어트리는 호르몬 때문이라고 하는데, 원래 조짐이 있었던 요통이 다시 재발해서 더욱 심한 것은 아닌가 우려가 된다. 그 와중에 다리 꼬고 앉는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있으니 원. 자세부터 바르게 고쳐야겠다. 그리고 복대라도 좀 알아봐야 할까봐.
21.4.20 (7개월, 27주 5일)
누군가 뱃속에 장어가 돌아다니는 기분이라고 했는데, 그말이 딱 적당하다. 왜 아무도 임신중의 반절이상이 태동과 이렇게 함께 하는 것이라고 말해준 적이 없었나. 나는 그저 배만 나오는줄 알았는데 -
태동이란 것이 아이의 존재를 확인한다는 면에서 분명한 장점이 있는데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집중력을 흐트려트려 나의 생활을 방해하는 단점도 있겠다. 두개의 심장이라는 것, 홑몸이 아니라는 것이 흔한 표현인 줄 알았는데 요새 너무나 몸소 깨닫고 있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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