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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 Pic/일상

카페에서의 한시간

집에 있는 장난감들의 반복된 소리가 힘들어진다고 느껴지는 건 시간이 필요하다는 신호였다. 나간다고 해결될까 확신이 없어 직전까지 갈팡질팡 했다. 스트레스 쌓이는데 고민하느라 질질 흐르는 시간은, 아무도 잡지 않는데 스스로 갇힌 도르마무 같은 괴로움의 덩어리였다.

"나 좀 나갔다올께"

나혼자 제멋대로 쌓아올려 폭주 직전이었고 그간 아무말 않고 앉아있었기 때문에 갑자기 외친 선언에 남편의 의아한 표정과 시선이 뒤통수에 떨어졌다. 도망치듯 현관문을 여는데 엘리베이터가 막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황급히 잡으려 손을 뻗다가 버튼의 점자에 손마디가 살짝 베었다.

갈 곳을 정하고 나온 것이 아니라서 지하일층을 누를지 일층을 누를지 또 결정해야 했다. 이곳 아파트는 층수 출구에 따라 행선지까지 가는 거리가 달라진다. 머리를 식힌답시고 무작정 걷는 것은 또 내 성격이 아닌 것이다.

시간이 많지 않다고 생각했다. 환기(리프레시)가 되려면 어서 그 공간에 들어가 환기에 도움이 될만한 것들을 마련해야 했다. 조용함과 선명함 같은 것들.

10분거리에 새로 생긴 카페에 들어갔다. 누가 이런 불편한 델 가냐고 시시덕거리며 지나쳐갔던 기억이 떠올라서 혼자 씁하고 웃었다. 이 동네에 흔치 않은 넓직한 사이즈에 밖이 잘 보이는 카페였다. 내부엔 먼저 온 손님 한 분 뿐이었다. 힘차게 밀고 들어온 나무문이 내 등 뒤에서 닫히며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한바퀴 돌았다. 그리고 공기를 채우고 있는 베이스 묵직한 음악.

나올 때만 해도 카페인 가득한 진한 커피를 먹으려고 했는데 왜인지 누그려진 마음에 자두차를 시켰다. 이중 내열 유리컵에 담긴 주황빛이 도는 차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맛이었다. 가져간 정세랑의 책을 펼쳤다. 주인공 ss씨의 시원스런 언사에 마음을 빼앗겼다.

얼마 뒤, 창가자리를 정리하러 내 근처로 오셨던 사장님이 갑자기 말을 걸었다. 30대 초반쯤 보이는 젊은 남자분으로 말끔한 차림새에 조심스러운 말투였다.

"손님 , 커피 한 잔 더 드릴까요?"

잠시 회로가 멈췄다. 여기가 무슨 이케아도 아니고 이럴리가 없는데 생각하며

"커피로 리필...이 되는 건가요?"

촌스럽게 되물었다. '네 감사합니다.' 라고 미소지으면 되는걸, 그 짧은 순간 난 커피를 시키지 않았는데 커피값을 또 받으면 어쩌지 생각했다.

사장님은 내 말에 웃으며 마침 볶아놓은 좋은 원두가 좀 있는데 오늘따라 사람도 별로 없고 하여 맛보여드리고 싶다고 했다.


30분이 채 지나지 않아 단호히 알게되었다. 리프레시엔 한시간도 필요 없었다. 그냥 너무 많은 생각을 하지 말자. 혼자 만든 악순환의 늪에 빠지지 말자. 그냥 나와 앉아있기만 하는데도 좋았다. 그냥 이 수요일 저녁무렵의 한산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도 고맙고, 이 세련된 공간도 음악도 책도 좋았다. 칭얼대지만 건강하고 귀여운 아기와 언제나 든든히 힘이 되어주는 센스만점 육아동지가 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데, 오늘 처음 간 가게에서 좋은 원두로 내린 커피까지 선물받다니.

얼마 뒤 저녁거리를 사러 아기와 나올까 한다는 남편의 문자에 책을 탁 덮고 카페 앞 신호등 앞에 기다리고 섰더니 멀찍이서 가까워오는 두 사람이 갑자기 너무 반가워 손을 크게 흔들었다.

본죽에 들러 소고기야채죽을 아기와 나눠먹었고, 떡갈비 두 덩어리와 복숭아를 사서 집에 돌아왔다. 늘 고마운 남편과 한잔 해야겠다.


막상 가져다주신 상큼한 핸드드립 커피는 고소 취향인 제 입맛에는 맞지 않았지만, 고맙게 잘 마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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