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도에 관하여
워낙 유명한 책이어서 기대했는데 나쁘진 않지만 백퍼 와닿지는 못한 느낌이다. 오히려 기대하지 않았던 허지웅이나 정문정의 글이 더 기억에 남는 걸 보니. (물론 정문정도 몇편의 글 이상의 감동을 에세이 집 전체에서 전달해주진 못했지만) 그러고 보면 나는 조금 더 엄격한 문체를 선호하는 것 같다. 이동진의 '기생충' 영화평과 같은 밀도있는 단어의 조합.
그러나 이 책이 꽤 오래전 책인데(2015년작) 최근에 이런 류의 자기 위안 힐링에세이를 너무 많이 봐서 그저그렇게 보이는 것일 수도 있겠다. 당시에 이렇게 솔직하게 '나'와 '관계'를 돌아보는 책이라면 당연히 주목받았을 것 같네.
에세이도 가끔 보면 마음이 말랑해지고 좋은 것 같다. 소설과는 다른 일상 문장의 향연들에 눈이 즐겁다. 좋은 에세이를 추천받아 보고싶은 기분도 들었다.
[적어놓은 문장들]
# 일단, 어쨌든, 움직여보는 것의 중요함을 통감했다. 게다가 생각하는 것에만 너무 중점을 두다 보면 자칫 행동하지 않을, 움직이지 않을 부정적인 이유를 만드는 데 생각이 더 쓰인다. 나한테는 무리니까, 난 이것밖에 못 하니까, 라며 스스로에 대한 선입견을 만든다. 자신에 대해 모르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나를 ‘이렇다’라고 단정 짓는 것이다.
# 어차피 우리는 정답이 존재하는 세상을 살아가지 않으니 혼란 속에서 중심을 잡고 내가 내린 답을 믿고 나아갈 뿐이다. 슬픈 얘기지만 근본적으로는 그 누구도 내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없다. 내 인생은 스스로 알아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선택해서 행동하고 책임지는 것이다. 그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 세상에서 가장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으면서 가장 알기 어려운 것이 나다. 이제부터 집중해 생각하자고 해서 바로 생각을 길어 올릴 수도 없다. 그 생각은 자칫 당시 분위기에 휘둘린 감상일 수도 있다. 현실에서는 오히려 ‘생각’하고 ‘행동’하기보다 ‘행동’을 하면서 ‘생각’이 따라서 정리되었다. 그때의 청승맞은 여행도 그저 생각을 비우는 역할을 했을 뿐이었고, 깊은 생각은 돌아온 후 새로운 일의 가능성을 손수 알아보려고 움직이면서 비로소 자극받아 꿈틀대기 시작했다. 나의 안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나의 밖을 둘러봐야 했던 것이다.
# 자신의 수준을 냉정하게 직시하고 나한테는 이것이 최선이야, 라고 현실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큰 용기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행동을 일으킨 다음 자신에게 맞는 자리를 찾는 과정에서 얻는 깨달음이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머릿속에서 선만 긋는 것과는 다르다. 확고한 생각이나 단단한 가치관이 되어주는 것들은 내가 자발적으로 경험한 것들을 통해서 체득된다. 생각이 행동을 유발하지만 사실상 행동이 생각을 예민하게 가다듬고 정리해준다. 머릿속이 정리가 되지 않을 때는 일단 그 상황에 나를 집어넣어보는 것이 좋다. 가장 확실한 리트머스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용기는 그래서 필요하다.
# 생산적인 시간을 내가 직업으로 하는 일에 투입하는데 내 마음과 열정이 그곳에 없어 빈껍데기처럼 일한다면, 그만큼 충족되지 못한 마음과 열정을 다른 곳에서 어떻게든 해소시켜줘야 한다. 그러려면 사생활이 정말 재미있어야만 할 것 같은데 어떻게 보면 사생활을 재미있게 하는 게 더 힘들어 보인다. 일의 문제는 그만큼 인생을 통틀어서 가장 오랜 기간에 걸쳐 나의 삶의 질에 가장 깊숙이 영향을 주는 문제인 것이다.
# 사랑에 잘 빠지는 사람들을 보면 여러 가지 것들에 열정적으로 잘 반하는 것 같다. 그들은 사람이든 물건이든 그 안에서 자신이 좋아할 수 있는 점을 발견하는 에너지가 있다. 그리고 그들은 사랑을 주면서 행복해한다. “너무 잘해주지 마. 널 만만하고 당연하게 생각할 거야.” 주변 사람들은 너의 자존심을 지키라고 하지만 그들은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아한다고 표현하는 마음을 더 소중히 여긴다.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내가 먼저 호감을 보인다고 해도 그것은 전혀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표현했다고 해서 상대가 그걸로 나를 만만하게 본다면 상대가 가진 마음의 용량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한다.
# 도저히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며 계속 부모 이슈를 붙들고 산다면 어쩌면 내가 일부러 부모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려는 게 아닌지 냉정하게 자문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상처를 소중히 하려는 심리가 작동하는 것은 그 상처를 소중히 하지 않으면 그 외에 소중히 할 만한 게 별로 없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사실상 그쯤 되면 그건 부모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인 것이다.
# 성장은 나의 부모가 나처럼 한낱 불완전한 인간임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부모와의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해결하지 못할 바에는 물리적으로 벗어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깔끔하게 포기하고 인생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 가족 운이 없다고 자조하고 떨쳐버리는 것이다. 어찌 되었건 가급적 빨리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독립해서 부모 품을 벗어나는 것이 서로를 돕는 길이다.
# 좋은 인간관계에 대해 생각을 해본다. 나는 누가 좋을 때 그저 그 사람이 이 세상에 나와 같은 시대에 존재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기쁘다. 상대가 나에게 무엇을 해주었고 내가 무엇을 해줘야 한다거나 얼마큼 자주 보고 함께 무엇을 같이해야 한다는 당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서로에게 작용하는 것 없이 나는 그저 그 사람이 좋고 그 사람이 행복하기를 바라게 된다. 관계에서 그 사람의 존재 자체가 주는 기쁨이 가장 크려면, 나는 정서적으로 독립해야 할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을 보노라면 나도 분발해서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홀로서기를 두려워하는 이들에겐 이것이 쉽지 않다. 파괴적인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외로움과 소외감이 두려워 뻗쳐 오는 손을 덥석 잡고 자신을 비굴하게 제물로 갖다 바친다. 착취당하는 인간관계에 한번 익숙해지면 빠져나오기가 어렵다. 혼자서 잘 서 있을 수 있어야 타인과 함께 있을 때도 더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고, 마음이 통하지도 않는 누군가로 공허함을 가짜로 채우기보단 차라리 그 비어 있는 시간들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는 것이 낫다. 그래야만 내가 앞으로 어떤 사람들과 있어야 진정으로 나답고 편안할지를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관계를 가급적이면 ‘관리’하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다. 내가 나다울 수 있는 인간관계를 제외하고는 부디 놔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 스트레스를 주는 인간관계 문제들에 대해 나는 다음의 세 가지 방식으로 대응하기로 했다. 1. 정면 돌파 2. 피하기 3. 놔주기 첫째, ‘정면 돌파’는 쉽게 갈라서지 못하는 관계에 적용된다. 서로의 장례식에 가서 복잡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게 될 사람들. 어쨌거나 평생 내 삶 속에 안고 가야만 하는 사람들. 가령 부부나 연인, 부모 자식 관계, 그리고 절친한 친구들. 이들에게는 애먼 기대를 가져 혼자 낙담하거나 실망하는 대신 진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요구했다. 설사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해도. 마찬가지로 그들이 내게 기대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할 수 있을 만큼만 하고, 타협으로 공존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고통스럽지만 정면 돌파를 하고 결론이 어떻게 나든 모호한 부분은 분명히 하고 넘어간다. 아무리 노력해도 접점이 없으면 다른 대안인 피하기나 놔주기로 넘겨야겠지만 그래도 끝까지 최선을 다한다. 실패한다 해도 최선을 다해보지 않으면 미련이 남을 것 같아서.
# 보통 이들은 첫인상이 사근사근하고 친절하여 가까워지기 쉽지만 어느덧 께름칙한 느낌과 함께 그 관계는 내가 그의 들러리로 이용당한다는 소모감을 안겨준다. 그럴 때는 말없이 피할 수밖에 없다. ‘인간관계에는 노력이 필요하다’라는 조언이 있는데, 어떤 관계는 서로를 위해 내가 먼저 피해주는 것이 노력이 된다. 그들은 어쨌거나 자기 자신에게밖에는 관심이 없으니까. 마지막으로는 ‘놔주기’가 있다. 인간관계는 저마다의 생로병사 운명이 있어서 절친한 관계였다가 도중에 별다른 일이 없었음에도 자연 소멸하거나 서먹해질 수가 있다. 이때 자연스럽게 흘려보내고, 애매한 채로 놔둘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왜 자연 소멸이 될까? 아마도 두 사람은 서로에게 충분히 매료되지 않았거나 그 관계에서 둘 중 누군가는 좋아하는 척하며 무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도 예전에는 왜 이렇게 멀어졌을까 자꾸 분석하고 시시비비를 가리거나 그 관계의 끈을 다시 이어보려고 애썼는데 돌이켜보면 그것은 나나 상대를 위하는 일이 전혀 아니었다. 단지 그 관계에서 내가 부족하거나 나쁜 사람이 아님을, 나는 인간관계를 유지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님을 입증하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어정쩡한 인간관계로 걸쳐놓는 것이 내가 나쁜 사람이 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내가 그 관계로 불편하다 해도 그 이상으로 상대를 직접적으로 화나게 하거나 상처 입히는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 친분이 있는 어떤 소설가는 얼마 전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자동차와 충돌해서 사고가 났다. 몸이 자전거에서 튕겨져나가 붕 떠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그 순간까지의 몇 초간을 그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고 했다. 그는 119 응급차에 실려 가는 동안 육체적 고통을 호소하거나 골절을 걱정하기보다 ‘아, 이젠 교통사고에 대한 묘사는 잘할 자신이 있다’며 흐뭇해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글을 쓰는 일은 건강에도 썩 좋지 않고, 평균적으로 돈벌이에도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으며, 성격은 말할 것도 없이 점점 이상해져가지만 다행히 한 가지 구원이 있다. 이렇게 모든 고통과 슬픔과 사건 사고에서도 무언가를 ‘건질’ 수가 있다. 혼자라는 느낌이 들 때, 고독이 뼛속 깊이 사무칠 때, 무언가를 상실했을 때, 고통의 감정은 내 안의 여러 생각과 감정을 미친 듯이 자극시킨다. 비관으로 무너져 내리기보다 이 느낌이 사라지기 전에 어서 글로 표현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고통은 어떤 형태로든 창작의 원천이 되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