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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 Pic/회사생활

아직 내가 들을 차례

부서에 아끼는 후배가 하나 있다. 회사에서 성실히 일하고 선후배동료 인간관계도 열심히 하는 친구. 시행착오도 많이 겪지만 성장을 위한 노력과 옹골참이 느껴져서 늘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대견한 녀석이다.

어느날 오후 그 친구가 나를 사무실 밖 카페로 불러냈다. 평소에 심경이 불편하면 얼굴에 잔뜩 티가 나기 때문에 표정만 보고도 무슨 일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을 들어본 즉슨 그 즈음에 우리 부서에 발령이 나서 새로 온 남자 과장이 하나 있었는데, 그 친구가 본인이 없는 저녁 자리에서 본인에 대한 뒷이야기를 했다는 것이었다. 꼭 험담이라기보다 업무할 때 태도가 엄격하게 변한다는 식의 내용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좋게, 혹은 안좋게 비춰질 수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나를 앉혀놓고 과장의 그런 행동이 옳은지 아닌지에 대해서 계속 늘어놓던 중이었다. 이야기를 하다보니 아무래도 부서 내 다른 사람의 예가 자꾸 등장했고, 나는 그에 대해 간간히 추임새를 넣으며 궁금한 걸 묻고 있었다. 그러던 그녀가 갑자기 이야기 도중 흠칫 놀라 표정이 굳어지며 말했다.

"과장님, 이 얘기는 듣지 않은 것으로 해주세요."

방금 당사자를 포함하지 않은 이야기의 확대재생산 때문에 화를 냈던 본인의 모습을 말하면서 깨달은 것이다. 그녀는 며칠전 본인이 당한 뒷담화와, 지금 이 대화에서 화제에 오르고 있는 부서 내 다른 사람들이 당하고 있는 뒷담화의 성분이 서로 별반 다르지 않음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사실 그 친구는 나를 앉혀놓고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내 반응을 듣고 있지는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거의 혼자 자문자답을 하고 있는 수준이었다. 선배를 불러 고민토로를 하겠다고 하여 모양새는 갖춰놓았지만 지금 자기 머릿속이 정리가 아직 채 되지 않았다. 본인의 생각에 깊게 빠져서 그런지 평소처럼 상대방이 어떤지 살피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갖춰진 예의는 있지만, 머리를 계속 굴리느라 정작 지금 행동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잘 모르는 것이다.

못들은 걸로 해주세요. 라고 말이 나온 뒤에 우리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말이 없어졌다. 이야기는 갑자기 끝났다. 그러자 그녀는 복잡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언니, 오늘은 들어가요. "



엉거주춤 따라 일어선 난 사실 좀 민망했다. 그녀가 불러서 따라와 이야기를 반쯤 듣다가 마무리되지 않은 채 (못들은 걸로 한 채) 다시 등 떠밀려 돌아가고 있는 셈이었다. 내가 어떤 해결책을 꼭 내놓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은 하지만, ‘이럴거면 지금 날 굳이 왜 부른거지’ 라는 생각이 아예 안들었다면 거짓말이다.

자리에 돌아와서 생각을 해봤다. 그 친구는 그렇다치고,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게 맞는지.


이야기를 중단한 것은 사려깊은 행동이었다고 생각한다. 멈출 줄 아는 용기라고 해야 하나. 그녀에게 중요한 건 본인에게 닥친 그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일 지 어떻게 대응해야할지 고민하는 일이었다. 원인 분석 단계에서 흔히 저지르는 실수, 똑같이 뒷담화와 화내기로 대응하는 것은 스스로 막았다. 그녀는 차근히 자신의 문제를 직면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나는 문제를 도와주는 사람이었다. 물론 그녀는 내게 도움을 요청하고서 내용은 다 드러내 보여주지 않았다. 도움이 무색해졌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본래 그녀를 따라 나섰던 나의 목표는 그 녀석의 기분을 원래대로 돌리기였다는 것이 중요하다. 애정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나의 무쓸모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줄 땐, 내가 하는 이야기에 취하지 말고 상대방의 기분과 반응을 잘 살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묻지도, 듣지도 않는 이야기를 나 혼자 떠벌이며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내게 듣기를 요청하고 있는 저 상대방이 감정이 격앙되어 누군가와 말은 하고 싶지만 1)아직 정리가 되지 않은 것인지 2)내게 공감을 원하고 있는지 3)정말로 내 의견이 궁금한 것인지 살펴야 한다. 저 친구가 들을 준비가 되어있는지 살펴 보았는데 본인의 생각이 아직 정리되지 않아 넋이 나가있다면 그건 내가 아직 계속 들을 차례라는 뜻이다.

내 역할이 꼭 무언가를 제시하는 것일 필요는 없다. 자기가 묻고 자기가 답을 내리기까지 난 그냥 앞에서 들어주기만 해도 충분한 경우도 있는 것이다. 마치 인간 일기장 처럼.


이후 그녀는 결국 이 이야기를 내게 다시 꺼내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며칠 뒤 밝은 얼굴로 인사를 건네는 그녀를 보면서 생각했다. 앞으로 누구와 이야기하든 권위의식을 좀 덜어내고 관찰력을 키운다면 나도 지금보다 더 나은 굿 리스너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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