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리퀴타에서 나와서 식당 옆에 난 길을 따라 조금 올라갔다. 잘 꾸며놓은 돌바닥을 따라 나란히 상점이 이어져있었고, 처음엔 구경도 할겸 헤갈레이아를 향해 걸어 가보려고 했다. 그러나 점차 언덕배기가 나타난데다 거리가 아주 가까웁지도 않아서 곧 우리는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아까 아래쪽에 대 놓은 차를 가져갈 것인지 말 것인지 말이다. 우리 차는 신트라 궁전에서도 한참 아래쪽에 있는데 헤갈레이아는 그것과는 반대방향이었다. 지도상으로는 2KM내외로 걸어갈만도 한 거리인 듯 했는데, 고저를 몰라서 주저했다. 평지였다면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행은 늘 앞을 모른다는 것이 문제다.
우리는 주차된 차로 돌아가는 걸 선택했다. 오기 전부터 신트라가 주차가 어렵다는 말을 많이 듣긴 했었는데, 아침에 쉽사리 차를 댄것이 자만에 빠지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차를 빼서 주차장을 빠져 나오는데, 주차장 입구에 열대가 넘는 차가 일렬로 기다리고 있었다. 주차장이 만석이니, 더이상 차단기가 열리지 않아 무작정 기다리는 차들이었다. 이때 처음 들었다. 쎄한 기분 - 그러나 이미 차는 주차장을 나왔다. 아침과 비슷한 길을 돌아서 다시 헤갈레이아로 향했다. 차량에 장착된 네비와 구글 지도가 아까와는 또 다른 길을 안내하였는데 우리가 가는 길에는 불법 주차한 차량 때문에 통행이 어려운 경우도 있었다. 일방통행이 너무 많았고, 무엇보다 길이 너무너무 좁았다. (나는 차량으로 좁은 길을 통과하는 것을 유난히 괴로워하는 증세가 있다)
길을 찾다가 언덕 쪽 일방통행길로 들어설 때 쯤이었다. 우회전을 해야하는데 오른방향 길목에 주차된 차량 하나가 길을 막고 있었다. 그래도 잘 피해서 가보려고 하니 근처 식당에서 한 아주머니가 나와서 손을 내저으며 통과 안된다고 좌회전을 하라고 했다. 아 이거 이럼 또 뱅뱅 돌아 다시 와야 될것 같은데.. 걱정하며 왼쪽 담을 끼고 돈 순간, 아뿔싸.
들어선 길이 정말 좁다. 언덕길인데다가, 좌회전한 길을 빠져나가는 것도 어려운데 후진은 더욱 어려운 상황. 정말 길에 끼어버렸다. 그래도 이곳만 통과하면 십여미터 앞에 큰 공간이 보였다. 아까 걸었던 신트라 앞 광장이었다. 그러나 여기 지금 이 길은 오르막길이었고 양옆이 높은 돌담이었다. 긁을 것 같았다. 아니 긁는 게 문제가 아니다. 그냥 차 자체가 벽 사이에 낑겨서 나는 여기서 문도 못 열고 갇혀버릴 것 같았다. 탈출 자체가 안될 것 같았다.
나는 당황했다. 정말 많이 당황했다. 공포감이 엄습했다. 차가 가득차버린 골목길에 아까 그 아주머니의 가게가 있었는데 식당에 드나들던 손님이 한몸 피할 공간이 없어 식당 앞에 선채 우리를 노려보며 기다렸다. 사람이 전혀 지나갈수가 없었다. 그들은 이런 우리를 보고도 어떻게 해줄 생각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우리를 구해준건 백미러까지 접고 수없이 공회전을 하며 벽에 낑기기 직전 십여미터 앞에서 눈이 마주친 한 건장한 흑인 아저씨였다. 팔뚝에 문신이 가득한 외모에 첨엔 뭘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길가에 서있는 사람인가 싶더니, 우리 차를 본 순간 차를 향해 아주 작은 손짓으로 손가락을 접으며 나오라는 표시를 했다. 그는 우리 차의 정면에 서 있었다. 분명 눈이 마주쳤다.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었다. 나올수 있다는 표시였다. 그는 아주 미세한 각도로 방향을 틀기도 했지만 대부분 그저 손짓만 했다. 차가 핸들을 돌릴때마다 손짓은 살짝씩 멈추었다.
길고 긴 시간이 지난것 같았다. 절명의 순간이 지나 차가 광장 언덕으로 올라섰다. 아저씨는 아무일도 아니라는 듯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었다. 우리 차는 그의 바로 옆을 지나갔다. 이미 옛적에 조수석 창문은 끝까지 내려가 있었다. 차에 탄채로 창문에다가 땡큐하고 인사를 건넸다. 할수 있는 말이 그것 뿐이라는게 안타까웠다. 내려가서 손이라도 덥썩 잡고 연신 허리를 굽히거나, 사례표시라도 해야할 것 같았다. 나의 절박함은 그정도였다. 그 아저씨는 내마음을 알았을까?
남편도 내심 놀랐을 것 같지만 당시는 적어도 나에게 티를 내지 않았다. 글쎄 그도 아마 물어보면 식은땀을 흘리고 있지 않았을까? 물어보진 않았다. 그치만 미끄러지듯 광장을 탈출하면서 (좁은 길을 유난히 못 견뎌하는 나를 잘 아는 터라) 한숨을 푹 내쉬며 내게 미안하다고 했다. 본인도 분명 놀랐고 걱정했을텐데, 늘 나를 함께 신경 쓰는 그가 고맙고도 안쓰러웠다.
한숨 돌리기도 전에 뒷차가 밀려드는 일방통행길이라 계속해서 앞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다시 네비를 켜서 작은 골목길 말고 차량이 지나는 큰길 위주로 검색을 하였더니 빙빙 돌아 가는 길을 안내한다. 이십분 넘게 오르락내리락 하여 다다른 곳은, 아까 디저트를 먹고 나와 걷다가 걸음을 멈추고 차로 향하던 바로 그 지점이었다.
헤갈레이아는 그곳에서부터 불과 오분 거리에 있었다. 누가봐도 특이한 건물과 입구가 등장했다. 바로 저기구나! 직감으로 느낄만큼. 오 설레기 시작한다!!!
정문 매표소까지 차를 몰았더니 길이 두갈래로 갈리며 건물을 왼편으로 끼고 돌아 올라가는 길과 오른쪽으로 빠지는 길이 나타났다. 오른쪽 길 바로 옆에 조그만 주차장이 있었다. 차가 한 다섯대쯤 대져 있었나. 어떤 차 한대가 비상깜빡이를 켜고 서있어서 그 옆을 통과하여 지나갔더니 또 애매한 사이에 낑겨버렸다. 내려서 깜빡이 차 운전수 얘길 들어보니 그 사람도 자리가 없어서 그냥 공간이 날 것을 기다리는 중이란다. 우리가 첫타자도 아닌데 주차공간 다섯대가 고작인 여긴 어렵겠구나 싶다. 아래 쭉 나있는 내리막길로 들어가니 거기 끄트머리 부분에도 불법 주차가 줄줄이 되어있었는데 내가 거기라도 대자고 했더니 이 고생을 하면서 여길 왔는데 너무 멀다 싶었는지 그가 거절했다. 좀더 나은 곳이 있겠지 하면서. 아까 건물 위쪽으로 나있던 길로 한번 들어가보자고 하였다.
나는 대개 도전하지 않는 편이라 더 나은 것을 취할 기회도 잃어버리는 편이다. 그러나 차선(2nd)은 잘 택할수 있는데 이것이 내 장점이자 단점이다. 오늘은 바로 그 차선이 필요했다. 돌아가 헤갈레이아를 지나쳐 간 길은 마지막 옵션이었기 때문이다.
신트라 길이 거지같은 것인지, 정보를 미리 안 찾아본 것이 문제인지 모르겠다. 분명한 건 그 길로 들어선 순간 뒤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해졌단 것이다. 좁은 일차선 일방통행이었고 뒤에 차가 바짝 따라왔다. 산길이라서 차를 잠시 정차할만한 갓길도 나오지 않았고 후진을 할수도 없었다. 한쪽은 절벽이라 U턴도 어려웠다. 이 일방통행길은 최소 20여km를 가야 비로소 반대방향으로 향하는 길을 탈수 있었다. 산 능선을 넘는 길이었고 그 반대방향이래봤자 산봉우리를 두고 아주 크게 한바퀴 돌아 아래쪽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운전이 능숙한 그에게도, 아니 그 어떤 누구에게도 이 길을 한번 들어선 이후 회군(?)은 어려웠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산길에서 20여km는 꽤 오래걸리는 길이다. 차도 별로 없었고 사람도 별로 없었다. 구글 지도가 안내한 작은 마을을 통과하는 길은 마치 유령마을처럼 삭막하고 황폐했다. 길은 좁고 오르락내리락하여 아까 간신히 빠져나온 좁은 돌벽의 골목같은게 나타날까 자꾸 긴장이 되었다
나는 말이 없어졌고 그는 눈치를 보았다. 나는 처음에 걸어가자고 주장했던지라 화가 좀 난 건 사실이었지만, 생각해보면 이건 그의 잘못은 아니다. 누가 이런 크리티컬한 일방통행이 있으리란 생각을 하겠는가. 걸어가는 사람이 뒤를 돌아 걷는 건 쉽지만, 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길을 잘못 들면 돌아가는게 어렵다는 건 잘 안다. 특히 고속도로나 대로나 교차로 같은 곳은 훨씬 더 치명적이다. 나는 운전을 잘 못하기 때문에 늘 그런 공포감이 있지만 사실 운전을 잘 하는 그는 그런게 별로 없었을 것이다. 언제든 돌릴수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고 ,내게 좀더 좋은 상황을 만들어주고 싶었을 것이다. 내가 화를 내는 건 맞지 않았다. 그렇지만 난 옹졸했고 굳이 말을 하였고 뱉어버린 말에 그는 상처받았을 것이다.
분위기를 반전하기 위하여 여기까지 온 김에 호카곶을 먼저 가는 것은 어떤지 제안하였다. 이미 많이 서쪽으로 와있어서 호카곶까지 5킬로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전화위복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야지. 바다를 면하고 있는 서쪽으로 향했다.
대서양의 거친 바다를 마주한 산지는 구릉이 이어져있는 느낌이었다. 양치식물이 주로 산다는 그곳은 큰 나무들도 없이 구릉이 줄줄이 이어져있는 초록 언덕 같았다. 가는 길이 황량하기도 하고 장엄하기도 했다.
차를 달리고 달려, 어느새 좀 야트막한 구릉같은게 이어나온다 싶더니 저 멀리 조그맣게 주황색 등대 같은 건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저 끝이 아마도 세상의 끝이리라. 녹색 초원 위에 얹은 주황색 등대와 작은 집이 보일 때쯤. 꽤나 설레었다. 새상의 끝이래봤자 유럽인들에게나 그럴테지만, 이상하게도 그 만들어진 이미지에 나역시 동화되고 있는 것 같았다. 저 곳이 정말 길을 걸어온 오래전 사람들이 마주했을 거친 바다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울컥하다고 해야 하나.
주차를 하고 카메라를 들고 나왔다. 그늘 한 점 없는 엄청난 땡볕이었다. 선글라스와 모자로 가려보아도 한계가 있었다.
곶 끝까지 걸어가니 눈 앞에 나타난 길쭉한 탑 위의 십자가. 꽃보다 청춘에서 신구할배가 찾아갔던 바로 그 곳이다. 사람들이 잔뜩 모여있었다. 등대가 있는 건물쪽과 구불구불 길에도 곳곳에 사람들이 모여 서서 세상의 끝 바다를 구경했다.
포르투갈의 유명시인 카몽이스가 구절을 하나 새겨놓았다. "육지가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
탑에서 조금 떨어진 등대쪽으로 걸었다.
땡볕인데도 이상하게도 차분한 하늘의 색감과 단아한 주황색 지붕이 잘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이야.
걷는 길에 발견한, 신트라에도 있는 로타리클럽!
등대 안에서는 '세상의 끝' 인증서를 12유로에 팔고 있었다. 이런 상술들 같으니.
다른 건 모르겠고 마그네틱이나 좀 사려했는데, 그마저도 이쁜 마땅한게 없어서 관두었다. 마그네틱은 장소마다 퀄리티 부침이 심한게 문제다. 이리 사고픈 나같은 사람들에게도 못 팔다니, 호카 곶 반성해라 ㅎㅎㅎ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니 십자가 탑이 조그맣게 보이고
대서양의 세찬 바다는 절벽 저 아래에 있었다.
바다까지 꽤 거리가 있었는데도 파도 치는 소리가 세차게 들린다. 누군가는 호카곶을 보고 마치 제주도 섭지코지 같다고 하였는데 자연 그대로의 바다와 들판은 어딜가나 제 몫을 하는 법이렷다
대양이라 .. 잔잔하고 푸르기만 한 아름다운 바다는 적어도 아니었다. 절벽 끝 새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마주하니 오묘한 감정이 물결쳐왔다.
'Travel > Portugal'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포르투갈 9 - 카스카이스 : 컴팩트한 아름다움, 카스카이스 산책 (0) | 2020.06.01 |
---|---|
포르투갈 8 - 신트라 : 알록달록 레고같은 페냐성 (2) | 2020.05.26 |
포르투갈 6 - 신트라 : 높은 산속에 숨겨진 왕실의 신비한 궁궐 (2) | 2020.05.14 |
포르투갈 5 - 리스본 : 코메르시우 광장에 오르는 단 하나만으로도, 리스본에 머무를 이유는 충분하다 (4) | 2020.04.29 |
포르투갈 4 - 리스본 : 일곱개의 언덕과 일곱개의 전망대가 있는 도시 (0) | 2020.04.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