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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 Pic/회사생활

점심



습관적으로 옆구리에 책을 끼고 혼자 점심을 먹으러 내려가는데 , 교보타워 유리출입문을 나섬과 동시에 전화벨이 울렸다. 발신자를 보니 변호사님이다. 왜 전화하셨지? 이분 점심 때마다 누구랑먹을지 뭐먹을지 동네방네 사냥하는 분인데, 혹시 오늘 점심파트너가 없어서 나에게까지 마수가 뻗치는 건가? 아 약간 귀찮은데 그래도 안받으면 안되겠지?

“여보세요?”
“윤과장님 어디에요?”
“ 저 지금 로비인데요”
“오늘 나랑 밥먹기로했잖아”
“네.?...”

지난주 과외를 한시간 해드렸더니 변호사님이 고맙다고 점심을 먹자고 언제 시간이 되냐고 물으시길래, 나가면서 아무때나 괜찮아요 라고 대답했더니 뒷통수에 월요일에 먹어요 라고 스러지듯 메아리치던 소리가 이제야 기억이 난다.
난 심지어 혼자 삼계탕을 먹을까 미역국을 먹을까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식당까지 거리,소음도,가격,국물의 온도와 어제 시킨 치킨과 삼계탕간의 재료 반복도를 면밀히 비교한 뒤 , 미역국으로 85%정도 마음이 기울어 가던 중이었다.

“아휴 , 늦어서 미안~ 나 없어서 먼저 나간거야? “
“아니에요, 뭐드실래요? “
“과장님 좋아하는 거 먹어요. 내가 사는거니까 비싼거 먹자”
“...”
“아 저기 찜닭 파네? 자기 찜닭 좋아해? 저거 먹을까? “
“네네~”

혼자 밥을 먹으면, 아무리 먹고싶어도 못먹는 메뉴가 있는데, 그게 바로 찜닭같이 기본 2인이상인 음식류이다. 홍수계찜닭이라고 이름붙은 이 가게는 교보타워 후문 앞 최근 오픈한 상가건물 일층에 있는데, 회사에서 가장 가까운 식당 중 하나이지만 그동안 혼자 먹는터라 가볼 기회가 없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가게에서도 가장 구석지고 조용한 창가 자리에 안내를 받았다. 벽자리를 변호사님께 양보하고 맞은편에 등받이 없는 나무벤치에 엉거주춤 들어가 앉으니, 열려있는 가게 문으로 따라 들어온 서늘한 바람이 내 옆자리에 따라와 앉는다.

들고온 책이 약속을 잊어버린 나의 잘못을 계속해서 상대방에게 환기시킨다. 왼쪽 구석에 올려놓고 장지갑으로 애써 제목을 가려보았으나 두툼하고 커다란 책이 가려질리가 없다.

“책을 엄청 좋아하시나봐요. 한달에 도대체 얼마나 읽어요? “
“아, 아니에요. 그렇게 많지 않아요. 이 책도 산지 보름 넘었는데 여태 다보지도 못했구요. 사실 맨날 티나게 들고다니기만 하는 거죠. 하하”
“그래도 엄청 보시는 거 같은데 ? “
“아니, 아니에요. 올해 다 본게 40권도 안되는 거 같은데요..?”

한달에 몇권을 읽냐니, 난 사실 이렇게 단박에 셀수 있을 정도로 많은 책을 읽지 않았었다. 책을 가방에 비교적 꾸준히 들고는 다니는 편이긴 하지만 , 그래도 매주 매달 독파하듯 책을 보진 않았다. 속도도 느린 편이기도 하고. 그렇지만 올해는 유독 많아진 권수와 , 무엇보다 10월 현재스코아, 몇권째인걸 아는 것만으로도 특별한 해라고 생각했다. 내가 40권이라고 말했을때, 변호사님은 속으로 얘는 책들을 다 줄세워서 숫자를 매기나 하고 이상해 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치즈찜닭을 주문하고 마주앉은 우리에게 약간의 정적이 흐르는 사이, 변호사님이 팔을 뻗어 내옆에 놓여진 책을 집어들었다. 어쩔수 없이 나는 머뭇머뭇 설명을 했다. 그 유명한 유발하라리의 신간인데, 나도 이분 책은 처음이다. 우연히 목차를 보게 됐는데 챕터들이 근래 보기드문 흥미로운 주제들과 도전적인 소제목들로 이루어져서 구미가 당겼다고. 그분은 내가 펴준 목차를 유심히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몇년전에 예술가들 몇이랑 철학스터디를 한적이 있었어요. 한5년정도 했는데, 그때 라캉이랑 들뢰즈 책 읽는다고 죽을뻔했네”
변호사니 법전이나 비문학쪽으로 매진해왔을것 같은 분인데, 의외의 취향이다.

“내가 보기엔 윤과장님도 뭔가 은행원스럽진 않아, 글쓰기나 이런거하려다가 선회한거 아니에요? “
“글쎄요.. 음..그런건 창의적인 사람만 할수 있는 거라고 오래전부터 생각해왔어서요. 저는 별로 창의적인 사람이 아니에요”

말하다보니 자연스레 꼬리를 물고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나는 그간 능동,수동적인 것과 창의적,비창의적인 것을 혼동하며 커 왔던 게 아닌가 하는. 나는 부모님과 선생님이 하라는 것을 곧잘 따라온 수동적인 학생일 뿐이었는데, 하고싶은게 뚜렷하고 자기 목소리를 크게 냈던, 그래서 간혹 어른들과 마찰을 일으켰던 친구들에 비해 비창의적 인물이라고 혼자 결정내려버렸던게 아닐까.

그녀가 묻지도 않았는데 나혼자 다시 대답했다.
“음 그래도 생각해보면, 저도 표현에의 욕구란 건 있는 것 같아요. 글쓰거나 사진찍는거 그림그리는거, 특히 춤을 추거나 춤을 보는 걸 즐겨하는 걸 보면요. 다른 어떤 것보다 그런것만 관심이 있으니까요”

엉겁결에 이분께 고백을 해버렸다.
연두색과 하늘색과 단풍의 색깔을 좋아한다고.
춤을 추는 걸 좋아한다고.
올해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선명한 예쁜 색깔을 흰도화지에 그으면서 기뻤고, 위로받았다고. 미련하게도 나를 모른채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고, 여전히 이렇게 우매한 대답을 일삼고 있다고.

내게 질문을 던졌던 이 분은 본인이 일으킨 작은 내 심경변화를 아는지 모르는지 희미한 미소를 지은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찜닭을 바라보며 말했다.

“먹자! 맛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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