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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 Pic/일상

9호선 퇴근길



오늘은 퇴근길에 구호선 완행을 탔다. 방금전에 오른쪽 승강장에서 급행열차가 막 떠나기도 했고 , 동시에 왼쪽 승강장으로는 완행열차가 진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출퇴근시간에는 아무래도 급행보단 완행이 사람이 적어서, 완행을 타면 시간이 조금 더 걸리더라도 몸은 좀더 편히 갈수 있는데, 필사적으로 급행을 사수해야하는 출근시간과는 달리 조금더 인간다운 모습으로 퇴근할수 있다고 해야하나. 금요일 퇴근길인데 일주일중에 가장 여유를 부려도 될만한 시간이 아닌가 싶었다.

신논현에서 처음 탈 때까지만 해도 그 결정이 옳았다 할만큼 여유가 확보되었다. 완행을 탄김에 은행도서실에서 도착한 책을 읽으려고 꺼냈는데, 급행에서 책읽기란 사치이자 한사람의 숨쉴공간을 빼앗는 이기적인 행동일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책이 상당히 두껍고 무거운 터라서 앞에 사람을 피해 자리를 잡느라 약간 번잡스러워졌다.

그러는사이 열차는 사평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완행열차는 뒤따라오는 급행을 보내느라 잠시 정차를 한다. 몇몇 사람들이 내리고 열차가 정차하고 있는 사이, 몰려있던 사람들이 적절한 공간을 찾아서 띄엄띄엄 인적구성의 재분배를 이루니 마치 소금물이 융해되듯 어느새 균일한 밀도가 되었다. 나도 눈치를 보고 잽싸게 위치선정을 했는데, 다름아닌 지하철 마지막칸에만 특별히 있는 벽에 기댄 자리. 그렇게 편안하게 한정거장이 지났다.

고속터미널에 진입한다. 이곳은 내가 지나는 구간중 가장 악명높은 구간, 헬게이트가 열렸다. 밀려오는 사람 때문에 읽고있던 책은 편채로 가슴팍에 품을수밖에 없었고, 나는 벽에 바짝 기대있어 망정이지, 내 앞의 사람들은 마치 해일에 쓸리듯 빠르게 시야에서 왼쪽으로 떠밀려갔다. 마침내 내앞에 멈춰선 여자는 급한대로 내 오른쪽 귀에 닿을락말락하게 팔을 뻗어 손바닥으로 벽을 짚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돈달라는 불량배의 모양새였다고 할까. 그녀의 숨의 온도까지 느껴지는 이 불편한 사태도 동작까지만 가면 그래도 조금 괜찮아지리라.

열차는 다시 출발하여 신반포를 지나 구반포에 닿을때쯤이었다. 정차하려고 속도가 점차 느려질때쯤에, 내리는쪽 반대편 출입구쪽에서 누군가 '내릴께요' 라고 말했다. 목소리가 굉장히 작아서 마치 속삭이는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몸집은 훨씬 더 작은 아담한 체구의 여자가 앞뒤의 큰 사람들 사이에 파묻혀 있었다. 차가 거의 정차할 때쯤 낑낑대며 먼저 좀 움직이려는 기색도 보였지만, 사람이 가득 들어차있어 어려워보였다.

문이 열렸다. 환승역에서는 사람들이 어지간히 내리고 타기 때문에 적당한 이동과 이에 따른 공간이 생기게 마련인데, 구반포는 완행역이라 그런지 거의 내리는 사람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단 한 사람 내렸는데 그것은 문 바로 앞에 서있던 사람이, 다른 내리는 사람의 편의를 위해서 비켜준 것이었다. 내리려던 여자는 나름 애써 나오려고 하는 것 같았는데, 가득 들어찬 사람의 벽 때문에 쉽사리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멀뚱멀뚱 서있는 사람들 뒤로 조금 더 높아진 목소리의 여자가 소리쳤다. “내릴께요!" 그러나 미동.. 여자는 한겨울 산골에 가슴팍까지 쌓인 눈을 헤치고 나가듯 자기 눈높이까지 오는 사람벽을 헤치고 열심히 나가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거의 내리고 타지 않는 이 역에, 기관사는 어느새 출입문을 닫는다고 두번째 안내멘트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출입문까지 90% 이상 헤치고 나온 여자는 마지막으로 " 내릴께요!!!" 하고 절박하게 소리쳤다. 그러나 매정한 출입문은 뚜뚜뚜 울리며 스크린 도어부터 천천히 차례로 닫히고 말았다. 다른때처럼 출입문에 아슬아슬하게 슬라이딩하는 사람도 없이 아주 평온한 광경이었지만, 열차 안에는 눈뜨고 코베인 표정의 여자와, 열차 밖에는 비켜주느라 내렸는데 다시 못탄 여자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는 것이 달랐다.


다음역에 다달았다. 열차가 미처 서기도 전에 여태껏 가장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여기저기서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내릴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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