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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Book

책의힘

책을 편다고 모두가 지식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책을 통해 어떤 것을 얻을 수 있는지,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은 여전했다. 그런데 자신있게도, 이 일본의 사회학자가 "독서를 할때 책과의 상호작용을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서 생중계해준다니 구현해 내었다고 하니 흥미로웠다.  최근 곧잘 책읽는 방법에 대한 책 을 몇권 훑어보았지만 이렇게 심도있는 책은 없었다.


무엇을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왜 사고하는가 로 진입하여

사회과학에서 '시간'을 , 문학에서 '죄'를 , 자연과학에서 '신'을 다루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떻게 쓸 것인지, 쓰는 것이 왜 의미가 있는지 덧붙였다.


작품 독해는 생각보다 난이도가 있어서,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내용을 전부 이해하기란 힘들었다.  비교적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문학'을 기준으로 집중하여 보았다. 텍스트를 꼭꼭 씹어먹지 않으면 한장조차 넘기기 힘들더라. 마치 대학시절 읽기쓰기 중핵수업을 듣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흔한 날림 소설 수필 같지 않고 , 책의 밀도가 굉장히 높아 도서실에 반납기한이 다 차지 않았다면 다시금 붙들고 앉아 읽어볼 수도 있었을텐데, 언젠가 책을 다시한번 접할 수 있다면 사서 책장에 꽂아놓고 몇년뒤에 좀 사고를 키워서 한번 더 도전해볼만 하다.


책의 힘
국내도서
저자 : 오사와 마사치 / 김효진역
출판 : 오월의봄 2015.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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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태의 한복판에서 사고한다.

사고는 사태보다 늦게 온다.이 뒤늦음은 구조적인 것이며 필연이다. 즉 사고가 받아안지 않을 수 없는 숙명이다.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런 조건에 놓일 지 몰라도, 방법에 따라서는 사태의 한복판에서도 사고하는 것이 가능하며, 나는 그런 전제에서 사고를 하려한다. 물론 이런 태도에는 장단점이 있으며, '좀더 순순히(사태에)몰입해라'같은 말을 듣지 않을 도리가 없기도 하다.

동시대와 공진한다.

그러나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것은 적어도 사회학이라는 학문에서는 숙명이자 사명이다. 사회학은 근대에 태어난 비교적 젊은 학문이다. 그것은 '현재'라는 것은 무엇인지, 우리가 지금 실로 경험하고 잇는 것은 무엇인지를 어떻게든 언어로 표현하고 싶다는 강한 충동이 학문으로 결정화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학을 공부한다면서 교과서에 써 있는 것을 읽고 그 옛날의 학설을 외우는 것만으로는 턱없이 모자라고 의미도 없다. 그렇게 해서는 무엇을 위해 '사회학을 한다' 는 건지 알 도리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 연구자는 무언가 '일'이 일어나면 '동시대를 사는 사람으로서 사회학적으로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맞부딪치게 된다. 즉 사회학에는 동시대와 공진한다는 것이 학문적 사명으로 내장되어 있는 것이다.

본질적인 사건은 반복된다.

이론을 자기가 사고할 때 쓰는 언어로 변환한다.

아이디어는 신체 바깥에 있다.

아이디어는 최종적으로 언어화해야 진정으로 이해한 것이 된다. 저 허공에 떠 있는 '무언가'를 서둘러 언어화 하고 싶다는 조바심이 든다. 그 모호한 '뿌연'감각을 서둘러 극복하기 위해 언어화화고 싶다. 서둘러 언어화하지 못하면 그것이 사라져버릴것만 같다. 하지만 서두르다가 지나치게 성급하게 언어화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함부로 다루면 위험하다. 서둘렀다가는 원래 포착하려고 했던 것과는 다른 것을 붙잡고 말았다는 인상을 갖게 된다. 뭔가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 것만 같은 , 거기 분명히 커다란 물고기가 있었는데 잡고보니 다른 물고기였다거나 하는 기분 말이다.

종이위에 쓴다.

조망감이 중요하다

종이위에 쓸때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종이가 너무 작으면 마음쓰이는 사항 전부를 적기에 모자라고, 종이 위에서 사고가 전개될 여지가 없어져버린다. 그런데 이 단계에서는 몇 장에 걸쳐 이어서 쓰는 메모 같은 것은 또 의미가 없다. 한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순번을 매긴다.

자기사고가 실제로 거친 순서와 타자에게 설득력 있는 순서는 서로 다르다. 화제를 어떤 순서로 배치해야 타인도 납득할까. 자기 사고의 실제 전개보다는 타자에게 제시할 순서를 먼저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는 까닭은 타인에게 이해받기 위함이다. 자기 사고가 도달한 지점에 타인도 도달하게 하는 것, 그것이 글을 쓰는 이유이다.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인가.

본질적인것, 특히 무언가 중요한 것에 관해서는 보통 오가는 말들이나 일반적으로 주어져 있는 설명은 대개 틀렸다고 보는게 좋다. 조건반사적으로 나오는 답은 대개 사태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다. 우리 모두 충격을 받았다. 그 충격의 크기나 격렬함에 비해 tv쇼 뉴스 해설자같은 사람의 주어진 설명은 너무 범용해 보인다. 이렇게나 충격을 받았는데 이런 잡담 같은 결론을 납득할 수 있을까. 인간은 빨리 안심하고 싶은 법이어서 뭔가 상황에 들어맞는 판에 박힌 설명을 갖다 붙이고 납득하려 한다. 하지만 그걸로 납득할 수 있다면, 당신은 과연 놀라기나 한 것인가. 충격 다음에 오는 것은 불안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그것을 빨리 해소하고 싶어진다. 그때 불안을 소중히 할 수 있느냐 없느냐. 그것이 사고를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결정적 분기점이다.

논쟁하라

이런 논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를 설득하는 것이 아니다. 지적 성장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내가 말하는 것 가운데 어느 부분에서 상대가 납득을 못하는지 선명해진다는 점이다.토론 경험을 쌓아나가다 보면 '이 부분을 치밀하게 설명해야겠다'하는 것들을 파악하게 된다. 20대무렵에는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하지 못한다. '좀처럼 남들이 이해해주지 않는다'는 기분도 들지만 거기서 뻗대는건 탐구에 하등 도움이 안 된다.

미래의 타자를 향해서 생각한다.

무언가에 충격을 받았다. 그것을 인생 내내 지속시키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충분히 깊이 생각해 언어화하는 수밖에 없다. 언어화되어 나오도록 깊이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의미있는 체험이 된다.우리가 정말 좋은 책이라고 생각하는 책은 벌써 수백년 전 것인게 많다. 그렇게 살아남은 책은 극히 한 줌에 지나지 않을 뿐이지만 . 그것을 목표로 한다. 그렇게 사고한 것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타자가 읽기에 값하는 것이기를 바란다. 그것이 사고의 궁극적 목적이다



이언 매큐언의 '속죄'

속죄의 불가능성이라는 문제는 그대로 소설의 불가능성이기도 하다.

"그런 일들(로비,세실리아가 서로 만나지 못하고 전쟁중에 죽었다는 사실을 그대로 서술한 설명)에서 독자가 희망이나 만족감을 얻을 수 있겠는가? 연인들이 두번 다시 만나지 못했고, 사랑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을 누가 믿고 싶어할까? 냉혹한 사실주의를 구현한다는 것을 빼면 그런 결말이 가져올 장점이란 과연 무엇일까? 나는 너무 늙고 겁먹어서 나에게 남겨진 얼마 안되는 삶이 너무 소중하다. 더이상 비관론을 끝까지 지켜나갈 용기가 없다.

인간은 속죄할때 자기죄의 희생자가 된 타자에게 다음처럼 말해야 한다. 'X에 대해 죄송합니다' 'x에 대해 용서해주세요' 라고. x 는 속죄하는 주체의 죄나 잘못을, 즉 속죄의 발화주체에게 부정적인 것을 말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 속죄하는 주체가 수용할 수 있을만한 최소한의 희망이나 구원이나 선을 포함해야만 하는 것이다. 브리오니 또한 그러한 긍정적인 것을 x에 부여하기 위해 마지막 허구 부분을 덧붙엿다. 그러나 그러한 개정은 속죄할 대상,속죄가 그곳을 향한 것이라는 사실을 치명적으로 훼손해버린다.

속죄의 불가능성이란 곧 소설의 불가능성, 그리고 신의 존재가 불가능한 이유와 같다. 이 세계에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있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어째서 이토록 파괴적인 죄의 존재를 허락한 것일까. 세계를 창조하고 주재하는 신이 존재한다면, 이 세계의 온갖 일들은 신이 그것을 허용할 정도로는 선할 터이다. 달리 말해 속죄할 수 없는 일이 존재한다는 것은 곧 신의 치명적인 실패를 의미한다. 이것은 오래된 주제로 구약성서'욥기'의 주제도 같은데 있다. 욥기는 종교적 정전의 일부이면서도 신의 무능성에 대한 암시를 함유한 텍스트이다. 속죄는 그것의 현대판이다.


필립 클로델의 '브로덱의 보고서'

우리는 보통 이렇게 생각한다. 우선 신이 있고 신이 죄 깊은 우리를 용서하고 구원해준다고 말이다. 그러나 '브로덱의 보고서'독해에서 도출된 논리느 이러한 상식을 완전히 뒤집어버린다. 보통은 우리 인간쪽에서 신의 존재나 용서에 대해 내기를 건다. 하지만 여기서 본 논리로는 그렇지 않다. 신(그리스도,안더러) 쪽이 먼저 무모한 내기에 나선다 '너희 모두가 용서받았다, 구원받았다'라고, 신이 느닷없이 선언해버리는 것이다. 이 선언을 실효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 인간의 몫이다. 우리가 용서받기에 값하는 자로서 행동했을때, 신의 이 선언은 '적절했던 것'이 된다. 만약 우리가 용서받기에 값하게끔 행하지 않는다면, 신이 내기에서 이길 수 있게 만들어줄 수 있는 셈이다.




인생은 유한하다 일단써라

젊을 적에는 어쩐지 인생이 무한히 계속될 것만 같은 환상을 품고 있었다. 그랬기에 쓰고 싶은 것이더라도 준비가 필요하면 더 나중에 해야지 하고 미뤄왔다. 하지만 어느순간부터 인생이 어느시점에선가는 확실하게 끝난다는 사실을 생생히 실감하게 되었다. '이제 죽는건가'하는 생각이 들떄를 몇차례 경험한다. 자기가 죽어갈 때 느낄' 무념'을 마취 선취한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그것은 '그걸 썼어야 했는데,'그걸 안쓰고는 못 죽겠어' 같은 형태를 띤다.

불안을 극복할 약

집필 직전에 왜 우울한 기분이 되었던 것일까. 불안했던 것이다. 정말 쓸 수 있을까 결론에 잘 도달할 수 있을까 이 울적함을 극복할 방법이 있다. 특히 마음에 들었던 걸출한 논문 혹은 책을 조금 읽는 것이다. 내가 논문이나 책을 쓰는 것은 물론 과거에 다른 누군가의 논문이나 책에 감동하거나 충격을 받는 등의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쓰기를 시작하기 전에 특히 좋아하는 책 , 의중에 몰래 품은 연인과도 같은 책을 종종 다시 읽는다. 그러면 집필을 앞두고 정신이 고양된다.

마음이 들썩이는 글이 아니라면 쓰지 말라

쓰기에 의한 발견이란 대략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가!'와 같은 느낌이다. 써보지 않으면 자신이 무엇을 생각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씀으로써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인지를 깨닫고 스스로 놀란다. 그런 감각이다. 때론 말함으로써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만, 쓰기에 비할 바가 못된다. 쓰기의 독자적 가치, 독자적 기쁨은 이 발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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