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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Russia

상트로 가는길 - 레닌그라드역 붉은화살호

레닌그라드 기차역 대합실 앞 카페에 들어와있는 지금, 피곤함이 몰려온다.

한국시간으로는 새벽 세시.
이미 몸이 지칠대로 지친 시간이기도 하려니와, 캐리어를 끌고 호텔에서부터 지하철, 환승역, 기차역까지 오는 길, 무거운 짐, 긴장된 마음, 불편한 시스템, 말 안통하는 답답함까지 겹겹이 지치게 하기 때문이렷다.


상트 가는 기차표를 끊을 때 가장 걱정했던 것 중 하나가 출발역을 딴데로 끊으면 어쩔까 하는 것이었는데 
(프랑스에서 리옹역 두고 헤메던 트라우마 재발) 
의외로 간단한 룰이 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는 역의 이름이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것(정확히는 상트의 옛이름인 레닌그라드역)
그래서 상트로 가는 역은 하나밖에 없다.

룰인즉, 도착지 기준으로 역이름이 정해진다는 건데, 첨엔 이게 뭔가 싶다.

쉽게 말하면
서울과 부산을 잇는 노선이 있는데
서울에 있는 부산행 기차가 출발하는 기차역 이름이 부산역(부산으로 가니까)
부산에 있는 서울행 기차가 출발하는 기차역 이름이 서울역 (서울로 가니까)

마찬가지 이유로 상트에 있는 '상트출발- 모스크바도착'의 기차역이름은 모스크바역이다. 


음, 간단하다고 하지만,

그냥 헷갈릴 뿐 ㅜㅜ


일이 어떻게 될지 몰라 일찌감치 나왔더니 출발시간보다 3시간이나 먼저 도착했다. 표를 대충 확인하고, 대합실이나 가까운 카페에서 시간을 때우려고 했는데, 엉덩이 붙일만한 좁은 공간도 하나 없이 전부 사람이 가득 차 있다. 캐리어를 끌고 여기저기 가게를 전전하다가 그나마 여유있어 보이는 카페에 들어섰는데 여기도 빈 테이블이 없다. 눈치보고 쫓겨 나와서는 가게 유리창밖에 붙어서있다 자리를 뜨는 사람들이 있길래 냉큼 달려가 자리부터 앉았다.   


자리가 없어 눈길조차 못 받은 카페에 기어이 기어들어와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우리한테 곱지않은 시선이 떨어진다. 카푸치노 두잔을 시키고, 뭔가 더 따뜻한 걸 먹고 싶어 러시아말로 된 메뉴판을 붙들고 아이폰 러한사전과 씨름하길 20분. 끝내 종업원이 와서 말도 없이 메뉴를 뺏어갔다. Unfriendly Russian, 여기서 또 처음겪는구나. 영어로도 노어로도 따질 수 없다는 사실이 짜증나다가도 서글프다. 그냥 따뜻한 블린느 한접시가 먹고싶을 뿐이었는데..


게다가 지금 앉은 이 카페, 담배냄새가 너무 심하다.
그나마 괜찮아 보임에도 불구하고 대합실에 붙은 이 카페에 오기 싫었던 이유는 대합실에 가득찬 담배냄새가 열어놓은 문틈사이로 다 들어오기 때문이었는데, 대합실 담배냄새는 고사하고 이 작은 카페 안에서도 앞뒤로 담배를 펴대는 통에 두손 다 들었다. 사실 알고 보면 나만큼 담배에 너그러운 여자도 드문데, 오늘만큼은 숨막히게 하는 이 공간이 참 견디기 어렵다.

▲ 레닌그라드 역에서는 지쳐서 사진도 한장 못 찍었기에, 상트의 모스크바역 사진으로 대체 ㅋ 구조는 비슷하다.

▼ 시베리아 횡단열차 포함 기차가 지나는 역을 안내한 벽면의 안내도, 면적으로나 구성으로나 위엄있는 포스 인정!! 



카페에서 피곤하고 지친 와중에도 블린느 먹겠다고 지친머리에 열심히 찾아가며 애썼는데, 결국 타의로 메뉴판을 뺏기고 난 뒤 빈정이 상해 '에이 나가서 사먹을테다 , 치사해서 안 사먹어'라고 뛰쳐나와 탑승전 매점에서 골라잡은 비스킷 한봉지.


우유섞인 그 비스킷이 너무 맛있어서.
러시아는 유제품이 좋아서 그런가?
침대칸에 누워서도 아작아작
감탄하며 아작아작


근데, 다영이가 그러는데 그 과자 한국에도 있다네?!
이럴줄 알았으면 인증샷하게 과자 사진이라도 한장 찍어놀 걸.

 



붉은 화살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기차안 (표 해석 여전히 불가능)
거친표면의 이불과 콘센트 하나 없는 자리는 중국의 잉워보다도 못하고, 
잠기는 문, 문에 붙은 큰 거울, 넉넉한 탁자공간, 수납공간은 러시아 기차 쿠페가 낫다.

오랜만에 타는 야간열차 침대칸이어서 그런지 달달거리며 흔들리는 느낌이 좋다. 
놀이기구를 탄 것마냥. 간질간질하니 

가장 걱정하던 4인실 침대칸 나머지 두자리의 주인들로는 다행히 미국에서 온 50대 부부가 들어왔는데 
아저씨 아줌마의 수다에 맞춰주는 조금의 수고만 들이고, 마음 한시름 놓을 수 있어서  
참 좋다만
(그들에게도 우리역시 행운일 테지만) 
요 두분 금슬이 어찌나 좋은지 윗층에서 자지도 않고 애들마냥 킥킥거리고 떠드시는 통에 잠을 다 못 자겠다.

두분 그만 주무세요!!




▲ 밤새 달려 마침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모스크바역에 도착한 새벽. 오른쪽에 보이는 표트르 대제의 흉상!  
    벽에 쓰인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어가, 진심 반갑고 너무 예뻤다. 나 키릴문자 좋아하나봐. 하하

▼ 모스크바역의 위용. 모스코브스키 바그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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