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Review/Book

무관심한 사람들을 증오한다.

안토니오 그람시 Antoio Gramsci

반파시즘의 기조 아래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주장한 이탈리아의 지식인이자 정치인. 무솔리니의 파시즘 정권에 의해 불법정당 활동이라는 죄목으로 구속되었다. 재판당시 그람시를 기소한 검사는 그람시에 대해 '위험천만한 그람시, 우리는 이자가 앞으로 20년동안 두뇌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조치해야 할 것이다"고 했다. 결국 그람시는 20년 4개월 형을 선고받았고, 감옥에 갇힌지 11년째인 1937년 세상을 떠났다.


왜 가난한 노동자와 농민이 파시스트 독재를 더 지지하는가? 이 책의 헤드문구이다.

그람시가 옥중에서 남긴 글을 모은 그람시 산문선.


굳이 20세기의, 그것도 저 먼 유럽의 이탈리아의 정치인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 시대의 모습이 놀랍도록 비슷하기 때문이다. 패션만 복고가 아니라, 사람들이 벌이는 짓과 하는 생각도 몇십년을 넘어서도 역사속에 반복되기 때문이다. 예전에 봤던 '정치의 발견'이란 책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정치의 가장 큰 적은 보꼴이나 좌빨이 아닌 '정치에 관심이 1도 없는 사람' 이란 말이었었다. 정치 더럽다, 다들 똑같아서 꼴보기 싫다 하는 것도 핑계일 뿐, 그것이 왜 핑계가 되고 문제가 되는지 그람시는 이 글에서 놀랍도록 치명타를 날린다. 개인적으로는 무관심의 문제는 정치 뿐 아니라, 모든 사회현상을 바라보는 태도에 전부 적용될 문제라 생각한다. 나 역시 회사에서, 여러 관계에서 느꼈던 모든 무기력함을 반성하며 그런 일이 일어날 떄마다 나를 되잡고 초심으로 돌아가기 위해 길지만 거의 전문을 옮겨 써 보았다.




무관심한 사람들을 증오한다.

세상에 시민만 존재할수는 없다. 도시에는 이방인도 있다. 그러나 진정으로 살아 있는 사람들은 시민일 수밖에 없으며, 무언가를 지지하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 무관심은 무기력이고 기생적인 것이며 비겁함일 뿐 진정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무관심한 사람들을 증오한다.

무관심은 역사 안에서 늘 강력하게 작동했다. 비록 그것이 수동적일지라도 항상 작동했다. 무관심은 치명적이다. 무관심은 지성을 맹렬하게 반대하는 원천이자 배출구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가능성 있는 악은 항상 무언가를 행하고자 하는 몇몇 사람들에 의해 발생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이러한 일이 다수의 무관심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영웅적 행동으로 초래될 수 있는 선 역시 이와 같다. 발생하는 모든 일은 단지 몇 사람이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거나 혹은 반대로 그러한 일이 일어나길 원해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역사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치명적인 숙명론은 무관심이나 현실에 대한 방치에 의해 나타나는 명백한 환상일 뿐이다. 실제로 소수는 음지에서 성장하여 발전하면서, 아무런 통제나 감시도 받지 않은 채 집단 전체의 삶을 구상한다. 일반 군중은 이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일반 군중은 그런 사실조차 걱정하거나 고민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시대의 운명은 소수가 제기한 협소한 전망, 단기적이고 즉각적으로 달성 가능한 목표, 활동적인 소수 그룹의 사적인 욕망과 열망, 그리고 이에 순응하는 군중에 의해 결정되고 조종된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그러한 문제제기와 제안에 대해 고민하거나 걱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여 소수로부터 대중으로 성장하여 발전한다는 사실은 어떤 식으로든 나타나게 된다. 음지에서 소수에 의해 구상된 계획이 완성되면, 그때는 그러한 치명적인 숙명론이 모든 사람을 혼란에 빠트린다. 그렇게 된다면 모든 이들은 자신이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알았든 몰랐든, 행동을 했든 무관심했든, 희생자가 된다. 이런 상황이 되면 맨 마지막 희생자는 화를 내며 무관심했던 이를 탓하고, 오히려 자신이 바라지 않았던 결과이기 때문에 자신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선언한다. 그들은 때로 불평하면서 슬프게 울기도 하고 때로는 아무에게나 무섭게 욕을 하다. 그런데 소수의 사람만이 스스로 그 일에 대해 묻기도 하지만, 아무도 그러지 않을수도 있다. '만일 내가 내 의무를 다했다면, 내가 내 의지와 내 조언을 가치 있게 하려 했다면,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러나 극소수의 사람만이 자신들의 무관심과 회의론으로 인해 그러한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반성한다.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 투쟁하고 최선의 상황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시민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활동과 손길을 보내주지 않았다고 반성하는 이는 없거나 극소수다.

반면에 그 외의 사람들 대부분은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하여 이상적이지만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거나, 최상의 계획이지만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거나, 아니면 더욱 최상의 상황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그렇게 하여 그들은 다시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한다. 그들은 분명 자신들의 책임을 모르지 않았다. 더군다나 간혹 더 다급한 문제들이나 많은 준비와 시간이 필요한 매우 위중한 문제들에 대해 명쾌한 해결책을 제시할 능력이 없지도 않았다.

나는 무관심한 사람들을 증오한다. 그들이 오랫동안 무고한 사람들에 대해 지속적으로 불평불만을 제기하는 일에 화가 나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 개개인에게 인생이 그들에게 일상적으로 부여한 과제를 어떻게 해결하였는지를 물었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의 인생 안에서 그들이 스스로 했던 것들이 무엇이었으며, 또 하지 않은 것들은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 물었다.

나는 살아있고 삶에 참여하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나는 삶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을 증오하며, 무관심한 사람을 증오한다.                                                                                         

1917년 2월 11일



가장 세심하고 잘 다져진 진실은 결코 자주 그리고 빈번하게 반복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러한 진실은 모든 사람들도 잘 작동할 수 있는 원칙과 자극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이미 전통적으로 오랫동안 지지와 참여 의사를 가지고 기존의 틀속에서 안정적으로 정착된 정당에 소속된 사람보다 단 한번도 정치에 참여하지 않았던 사람을 정치에 참여하도록 설득하는 게 더 쉽다. 신념을 바꾼 사람은 상대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행동과 방향을 선택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쉽게 틀릴 수 있는지 한번쯤 경험한 사람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깊은 회의론이 남아있다. 회의론자는 행동하는 데 필요한 용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대학교수보다 농부가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대학교수만큼 농부 역시 많은 경험과 사고의 지평을 확장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며, 농부 자신의 희생과 행동은 미래에 실현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유익함과 효율성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무관심을 증오한다
국내도서
저자 :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 / 김종법역
출판 : 바다출판사 2016.03.30
상세보기




728x90

'Review > Book'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  (0) 2017.01.31
삶의 한가운데 - 루이제 린저  (2) 2016.10.26
책의힘  (0) 2016.06.10
채식주의자 읽는중  (2) 2016.05.10
저지대  (0) 2015.10.25